【김선여 金善汝 (1875 ~ 1910)】 "1908년 신보현 의병부대 좌익장·선봉장,
1909년 김선여 의병부대 의병장"
1875년경에 태어났으며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복흥면(福興面) 상마치(上馬峙)에 거주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되고 한일신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서울에서 시위대가 봉기하였고, 이를 계기로 반일 의병 항쟁이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러나 1908년 초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의병 활동의 중심지는 전라도 중심의 남부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08년 5월 전북 순창군 복흥면 일대에서 신보현(申甫鉉) 의병장이 40~50명으로 편성된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다. 당시 복흥면에 거주하다가 신보현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좌익장과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11월 26일 선봉장으로 의병 200여 명과 순창군 하치등면(下置等面) 내동(內洞)에서 일본군 순창수비대의 의병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또 신보현 의병부대가 이진사(李進士) 의병부대 및 정해석(鄭海石) 의병부대 등과 연합 의병부대를 결성한 뒤에도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연합 의병부대는 300여 명으로 편성되었고, 총기 250여 정과 도검 10여 자루로 무장하였으며, 1909년 2월경까지 전북 순창·정읍·태인, 전라남도 장성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순창군 백방산(柏芳山)에서 김재화(金在化)·김응선(金應先) 등 40여 명을 규합하여 새로운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의병부대는 유격전에 적합한 40여 명으로 편성되었고 의병 활동에서 이탈하여 민폐를 끼치던 ‘가짜 의병’ 처단도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1909년 6월 27일 신보현 의병부대에 참여했던 유종여(柳鍾汝)를 처단키로 결의하였다. 일찍이 그는 의병 동료이자 부하였던 김여회(金汝會)를 이유 없이 살해하였고, 각지에서 금품을 빼앗았으며, 부녀를 강간하는 등 심각하게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사창리 부근 산속에 잠복해 있던 유종여를 체포하여, 6월 27일 상치등면 구산리(九山里)의 논(畓) 가운데에서 총살하였다. 1909년 7월 7일에는 순창군 복흥면 정동(鼎洞)에 거주하는 정삼차(鄭三次)를 처단키로 결의하였는데, 그 또한 유종여와 함께 금품을 빼앗거나 강간을 하는 등 민폐가 심각하였다. 7월 7일 복흥면 귀은리(龜隱里) 도로에서 체포·총살하였다.
1909년 11월까지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17일 소위 폭동 및 모살 죄명으로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1910년 4월 21일 기각되었다. 다시 대구공소원 판결에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됨에 따라 1910년 6월 27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