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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내가 죽을 곳”
전쟁터에서 적이 쏜 화살이 꽂히자 스스로 화살 뽑아 다시 적에게 쏘아
적이 곧장 앞으로 달려와 덤비자
검 뽑아 적을 치다가 마침내 최후
남은 군사들이 혈전 펼쳐 승리
홍명구(洪命耉·1596∼1637)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황해도 관찰사 춘경(春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국공신 성민(聖民), 아버지는 병조참의 서익(瑞翼)이며 어머니는 심종민(沈宗敏)의 딸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단아하고 영리해 그 비범함이 남달랐다. 어렸을 때 놀이와 독서를 할 때도 부모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8세 때 시(詩)를 지었는데 시의 품격이 높아 보는 사람이 모두 감탄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보고 기묘하게 여겼고,
상촌(象村) 신흠(申欽) 집안 아저씨인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등이 무릎을 치며 장차 나라의 큰 그릇이 될 것이라 했다.
그는
인품도 훌륭해 벼슬길에 나가서도 간언(諫言: 임금이나 윗사람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할 때는 남의 과실을 각박하게 꾸짖거나 윗사람과 마찰을
일으켜 이름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잠시 여가가 있으면 군사의 직무에 필요한 여러 책을 보고, 고금 인물들의 성공하고 패한 사적을 따져보았다.
재직한 곳마다 그의 정성이 주민들을 감동하게 했다. 관서(關西: 평안도 지역) 산골에서는 그의 부음을 듣고 친척이 죽은 것처럼
애통해했으며, 그가 싸운 전쟁터를 지나는 자들은 모두 오열(嗚咽)하며 눈물을 흘렸다. 집안이 가난했는데, 아주 귀하게 돼서도 지조를 바꾸지 않고
무너진 집에서 해진 자리를 깔고도 편안하게 여기며 개의치 않았다.
서쪽 관문인 평안도 지역 책임자를 교체하는 일을 의논할 때
대신이 모두 홍명구를 천거하자 임금이 특명으로 발탁하니 백관들이 아주 적합한 사람을 얻었다고 기뻐했다. 그가 임지에 이르러 변방의 군대를
검열해보니 영중(營中)의 군사가 7000명뿐이었다. 이에 후한 상(賞)으로 모민(募民)해 1만 명의 숫자를 채운 후 날마다 훈련을 시키면서
불필요한 비용을 절약하고 무기와 연장을 많이 만들었다. 홍명구가 친히 군사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충의심(忠義心)을 격려하자 모든 병사가
감동했다.
병자호란(1636) 때 강원도 신계(新溪)에 이르렀는데 군량이 떨어져 군사들이 콩을 먹어야만 했다. 주인(廚人:
주방·부엌 일하는 사람, 취사병)이 홍명구에게 쌀밥을 올리자 그는 단호하게 물리치고 “나 혼자 어찌 이를 달게 먹겠는가?” 하고는 콩을 가져다
함께 먹었다. 그러자 군사들이 감격해 울면서 배고픔을 잊었다.
그는 1637년 정월 26일 김화(金化)에 이르러 청나라 군사 수백
명의 머리를 베는 한편 조선인 남녀 포로 수백 명과 가축 300여 두(頭)를 되찾고 창고를 열어 군사를 먹였다.
전쟁터에서 그는
호상(胡床: 걸상처럼 된 간단한 접의자)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조정에서 내린 신표(信標)를 아전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죽을
곳이다. 이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니, 네가 잘 간직하거라” 했다. 이어 붓을 들어 글 한 줄을 써서 시종에게 주었는데, 내용은 노모(老母)에게
하직을 아뢰는 말이었다.
몸에 적이 쏜 화살 석 대가 꽂히자 스스로 뽑아 활을 당겨 다시 적에게 쏘았다. 적이 곧장 앞으로 달려와
덤비자 검을 뽑아 적을 치다가 마침내 적의 칼날에 최후를 맞았다. 이때 따라서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그의 남은 군사들이 높은 언덕을 지키면서
혈전을 펼쳐 많은 적을 죽이니 적이 그제야 물러가기 시작했다.
몸을 바쳐 신하의 충절을 다한 홍명구의 장렬함은 역사에 큰 빛을
발했다. 이에 대신이 입을 모아 국왕께 아뢰기를, “홍명구는 일 개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멀리 가서 힘을 다해 적과 싸우다가
들판에서 죽었으니, 속히 포숭(褒崇: 뜻이나 업적을 높이 기림)해 높은 지위(地位)에 있는 사람에게도 권면(勸勉: 타일러 힘쓰게 함)하게
하소서”라 했다.
임금이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평소 그 사람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과연 이처럼 되었구나. 내가 이 신하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다”하고는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추증(追贈)하라고 명했다.
같은 해 3월 13일 김화(金化)에서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냄)했다.
그 후 윤사월 11일 여주(驪州)
이포리(梨浦里) 선영(先塋)이 있는 곳의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홍명구의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위국충절(爲國忠節)은 만세의
사표(師表)가 됐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