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이 지구상의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순례자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 목적지를 향해서 끊임없이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저 하늘나라의 삶을 위해 오늘도 한걸음씩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엇인가? 정의내려보면 “천국에서 잘 살기 위해서 연습하는 것이”우리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가 그랬습니다. 가나안에 가서 잘 살기 위해서 광야의 삶을 통해서 훈련도 받고, 시련도 겪으면서 40년을 지냈던 것입니다. 신명기라는 책은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고 다시 한번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들을 리바이벌하는 책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렇게 살라고 하신 말씀을 복습하는 책이 신명기입니다. 우리에게도 성경은 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잘 하는 것인지를 훈련하고 연습하게 하는 책으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가나안의 백성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훈련시키신 것들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하며 은혜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겸손의 훈련.
제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예선전만 보는데요, Bgt,Agt입니다. 재주 있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고 예선을 거쳐 본선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그들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이 있는데 그들은 저마다 분야가 다르지만 나름 권위자로 인정받는 사람들로서 무대에 선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전부 분야는 다르지만 그 심사위원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탁월한 재주를 가졌으면서도 겸손한 사람입니다. 대부분 재주와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교만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주가 있지만 겸손하고, 실력도 있고 겸손한 사람만 못합니다.
광야는 가나안 입학 학교입니다. 말하자면 이 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좋은 성적을 거둬야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이 광야입니다.
학교라는 곳이 환경이 중요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학교가 문제가 많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선생님들의 권위보다 학생 개인의 인권을 중시함으로서 참된 교육과 훈련이 불가능해진 식물학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겸손하고 따뜻한 인격자를 길러내는 학교가 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자 하나님의 첫 번째 훈련내용을 볼까요? “너를 낮추시며 시험하사”to humble you and to test, 요즘은 아이들 기를 살리는 교육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백성들의 기를 꺽으셨습니다. 자꾸 낮추시고, 테스트하셨습니다. 걷기 힘든 길로 인도하시고, 물이 없는 곳으로 이끌어가시고, 만나외에는 다른 음식은 구경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기를 꺽으셨을까요? 하나님이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경계하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삶의 방식이 믿음이 아닌 힘의 논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의 논리로 살아갑니다.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없는 자를 지배하며, 더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를 착취하며 살아갑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갖고 패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구조를 받아들이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일단 힘을 가지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우리 정치인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되기 전과 된 후, 더 겸손해지고 더 낮아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힘을 가지면 그 힘이 얼마나 큰 위력이 있는건지 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약한 자들은 고통의 신음을 토해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의 논리가 아닌 믿음의 논리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힘을 가졌으면 약자를 돌보고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가야 합니다. 겸손은 단순한 미덕이 아닙니다. 빌2장에서 우리에게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자기권리의 포기입니다. 힘을 갖고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낮아지고 약해지고 고난을 믿음으로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겸손은 어렵습니다. 1등석을 탈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양보하고 이코노미를 타는 것입니다. 수십년전에는 미담이지만 오늘날에는 미담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권리 행사를 당연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면서도 당시의 면책특권인 “로마시민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우리는 그 권리를 행사했을 것입니다. 주어진 권리이고 그 권리를 행사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사용할 명분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행사하는 대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일이 나에게 시련을 가져온다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은 그 아이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주고 그로 인해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무엇을 계획하셨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권리행사를 하지 않았을 때, 바울이 낮아지고 겸손하게 행동했을 때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기족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빌립보에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가진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으로 직장생활 할 수 있을까?
믿음으로 세상을 살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답을 주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수 있습니다.
본문을 우리에게 남긴 모세는 겸손의 삶의 원조입니다. 민12:3절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Now Moses was a very humble man, more humble than anyone else.)” 그는 땅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왜요? 그의 지도력은 힘을 행사하는 지도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난미께서 자기에게 주신 힘을 사용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이끌고 갔습니다.
우리 시대는 그런 지도자가 없습니다. 그동안 봐왔던 지도자들은 되기 전과 된 후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힘이 생기면 쓰고 싶은 그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적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모든 정권이 적이 있습니다. 적이 생긴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군을 위해 싸운다는 것입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선이 없는 현대에서 아군을 위한 정치는 또다른 편가르기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모세는 백성들과 이야기할 때 수건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면 엄청난 권위와 힘이 있는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광야의 상황 때문에 불평과 원망에 가득찼고, 그 원망과 불평을 모세에게 쏟아 놓았습니다. 돌을 들어 치려고도 했고, 매를 맞을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힘을 사용하는대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겸손의 본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야 그 백성이 가나안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직분자들은 모세와 같은 겸손한 사람, 자기 권리를 휘두르기 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서 본을 보이는 지도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광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기죽을 일이 더 많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눅이 들고, 힘이 들어 고개를 들지 못할 때도 있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 우리를 가나인 백성 만드시려는 주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겸손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훈련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빵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닌 말씀을 먹고 사는 존재가 되는 훈련입니다. 겸손의 훈련은 순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도 귀를 닫고 삽니다. 교만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죄의 본질이 교만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첫 범죄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모세는 겸손의 본보기가 되었으나 60만명이나 되는 장년들은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광야에서 매일 41명씩 죽는 것을 보면서도 교만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두렵습니다.
그만큼 교만은 영혼의 암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 뿌리를 파내어 버리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낮추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내로서 받아들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여 우리의 영적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복을 받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이셨을까요? 농사지어 곡식을 거두어 먹게 하셨어야 양식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했을텐데 공짜로 아침마다 내려주는 양식을 거둬 먹었으니 감사가 아닌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런 만나를 40년동안 먹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셨던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었던 것입니다. 430년동안 살았던 이집트의 가치관, 노예근성과 풍족한 삶을 누리기 원하는 욕망이 아닌 가나안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가치관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필요와 상황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가 중심이 되어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상황이나 필요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광야 40년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벽한 보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양식을 주시고, 물을 주시고, 발을 보호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낮의 해와 밤에 달도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주셨습니다.
그들이 수고하고 궁리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광야를 지날 수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익히게 만드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광야를 지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믿음은 언어적인 수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현실의 무게 앞에서 우리는 믿음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관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벳세다 들판의 굶주린 오천명을 먹이신 하늘의 능력이 오늘 이 시대에도 행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서 세상의 가치관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월가의 유명한 회사에 면접을 보러 온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면접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대학생이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파타고니아 조끼를 입을 수 있나요?”파타고니아는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옷을 만드는 환경 친화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기업입니다. 좋은 취지에 옷의 품질도 좋기 때문에 월가의 쟁쟁한 회사들은 사원들에게 캐주얼 복장을 권장하며 파타고니아 조끼를 유니폼처럼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퍼지자 파타고니아에서 월가의 회사들에게 조끼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회사에 우리의 제품을 팔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다만 일정 수익을 환경을 위해 기부하는 회사에게는 제품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사실이 알려진 뒤 많은 대학생들이 월가에 취업할 때 파타고니아 옷을 입을 수 있는지를 입사의 지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크나큰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지켜야 할 가치관이 있습니다. 가나안의 백성들은 하나님 한분 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