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Lauren Crothers / The Cambodia Daily) 따께우(Takeo) 도에 위치한 '왓 프놈 찌소'(Wat Phnom Chisor) 사찰에서 온 승려 및 남녀 재가신도들이 어제(10.15) 오후 왕궁 앞에서, 이날 새벽 베이징에서 사망한 시하누크 상왕의 명복을 기원하고 있다.
기사작성 : Kaing Menghun 및 Lauren Crothers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 10월 31일생) 상왕이 자신의 생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타계했다는 어제(10.15)의 뉴스'가 전해지자, 프놈펜에서는 남녀노소가 이 소식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 무렵부터 지인들이나 보도, 혹은 인터넷을 통해 시하누크 상왕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었다지만, 왕궁 주변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하지만 늦은 오후가 되면서부터 구경꾼들과 추모 인파가 왕궁 정문 쪽으로 몰려들면서, 시소왓 키(Sisowath Quay, 시소왓 제방) 인근의 교통상황은 거의 정체상태가 되었다.
히엉 얏(Heang Yat, 57세) 씨는 아침 절의 소나기 때문에 왕궁 앞의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쭘 번(Pchum Ben: 크메르 추석) 명절용 음식을 담은 버킷을 붙든 채 울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왓 보떰'(Wat Botum) 사찰에 왔다가 모또(=오토바이 택시) 운전수로부터 국왕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었다. 너무도 슬프고, 그분이 너무 불쌍하다. 그분은 캄보디아를 위해 너무도 열심히 싸웠던 분이다."
얏 씨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1962년의 판결'을 통해 '쁘레아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을 캄보디아에 귀속시켰다는 뉴스를 듣고 자부심을 가졌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왕자'(공)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던 시하누크 상왕은 그 이듬해 몸소 산 정상에 위치한 쁘레아위히어 사원을 등반한 후, 그곳에서 '캄보디아 국기'의 게양식을 주재했다. 이러한 일은 당시 이 사원에 모여든 캄보디아인들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그가 오랜 기간 중국에 머물긴 했지만, 캄보디아인들은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나는 그분이 자신의 자녀들을 오랫 동안 보살펴줄 수 있기를 바랬다."
얏 씨는 한 남성이 왕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삭발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아들이나 손자가 삭발을 하는 것은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예법이다.
(사진) 노로돔 시하누크 공이 1963년 '왕자'라는 칭호로 통치하던 시절 쁘레아위히어 사원을 방문하고 있다. 당시엔 길이 없어서 그 역시 캄보디아쪽 암벽을 1시간 이상 등반해서 올라갔는데, 국제사법재판소가 1962년 판결을 통해 이 사원의 영유권을 캄보디아라고 결정한 일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사원에서 주재했다.
오전 10시45분경, 흰색 의상을 입은 남성 한명이 왕궁 앞을 흐르는 떤레 삽 강(Tonle Sap river)으로 걸어나가, 막 살발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물결에 흘려보냈다. 그는 물속에 선 채로 자신의 머리를 물에 적신 후, 엄숙한 표정으로 걸어나왔지만, 보도진과의 대화를 사양했다.
프놈펜 시내에서 가장 넓은 대로들에는 캄보디아 국기와 만국기들이 조기 상태로 게양됐다. '독립기념탑'(Independence Monument)에도 조기가 게양됐는데, 일부 운전자나 보행인들은 그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했다.
캄보디아의 관공서들이나 주요 기관들이 시하누크 상왕의 초상화를 노로돔 모니니엇(Norodom Monineath) 왕대비 및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의 초상화들과 함께 나란히 걸어두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일부 정부 부처들의 청사에서는 시하누크 상왕의 초상화가 철거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벤 나위(Ben Navy, 33세) 씨는 프놈펜의 스떵 미언쩌이(Stung Meanchey) 구에서 왔다고 밝혔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들이 온라인을 통해 시하누크 상왕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망연자실했다면서, 특히 그녀의 어머니가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있어서 최후의 국왕과도 같은 분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고국에서 운명하지 못해서 너무 가엾다."
프놈펜의 로쎄이 께오(Russei Keo) 구, 쯔로이 짱와(Chroy Changva) 동에 위치한 '왓 뿌 야람'(Wat Pur Yaram) 사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거한 전임 국왕을 위해 불공을 드리면서, 독경소리가 가득 울려퍼지고 있었다.
쯔로이 짱와 동, 제2리 이장을 맡고 있는 낌 롱(Kim Long, 72세) 씨는 국왕의 서거 소식을 새벽 2시경에 전해들었다고 밝혔다. 그것은 시하누크 공이 베이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낌 롱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을 주민 전체가 매우 슬퍼하고 있다. 특히 연로한 이들 중 많은 수가 그분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주민들이 전하의 유해를 언제 캄보디아로 모시고 오는지 끊임없이 묻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이 시하누크 공이 전성기에 활동하던 모습을 간직한 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젊은 세대인 히 스라이삣(Hi Sreypich, 24세) 씨는 자신도 서거 소식에 슬펐다고 밝혔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 소식을 듣고 내 몸이 굳어지는듯이 느껴졌다. 그분은 모두에게 위대한 국왕이셨다. 그분은 캄보디아라는 가족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오후가 되자 정적은 깨졌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왕궁 앞의 '소티어롯 대로'(Sothearos Boulevard) 상에 설치된 방호벽을 따라 오토바이들을 주차시켰다. 왕궁의 정문 앞에는 호기심어린 구경꾼들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 그리고 방호봉 안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고요한 내부를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끔씩 경비병들만 순찰을 돌 뿐이었다.
정문 밖에는 초병 2명만이 서 있는 상태였고, 따께우(Takeo) 도에 위치한 '왓 프놈 찌소'(Wat Phnom Chisor) 사찰에서 온 승려 및 남녀 재가신도들이 45분 정도 기도를 올렸다. 일행 중의 여성 한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상왕 전하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분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그분의 영혼이 모든 캄보디아인들을 축복해주길 바란다."
껀달(Kandal) 도, 크삿 껀달(Khsach Kandal) 군에서는 어제 아침 약 500명의 군중들이 모여 '물소타기 및 경마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속 켕(Sok Keng, 58세) 씨는 '짬족 무슬림' 여성이었다. 그녀는 상왕의 서거 때문에 슬프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너무도 슬프고 서럽다. 그분은 위대한 국왕이셨고 매우 친절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승하는 너무도 슬픈 일이다."
본지는 껌뽕 스쁘으(Kompong Speu) 도, 삼로웅 똥(Samraong Tong) 군에 거주하는 롱 신(Long Sin, 65세) 씨와도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그녀는 시하누크 상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면서, 자신이 젊은 시절에 국왕을 만났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그분이 껌뽕 스쁘우 도에서 과부들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실 때를 기억한다. 그 집들은 반군들 때문에 파괴됐었다. 나는 여학생 시절에 그분을 만나 악수를 했었다."
보완취재 : Mech Dara 및 Denise Hruby
(자료 동영상) 1965년에 제작된 시하누크 정권의 국정홍보 동영상들. 당시의 캄보디아는 비교적 활기에 찬 국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