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지 않으면, 공감하지 못한다 "
출근길 스마트폰을 열었다.
한 외국 사진작가의 사진들이 페이스북에 떴다.
이스라엘의 스데로트 언덕이었다.
가자지구가 이스라엘의 폭격을 받아
불꽃이 치솟으면 언덕 위 이스라엘 사람들이 환호했다.
댓글을 보았다.
`누군가 죽어가고 있을 텐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느냐`는 글이 보였다.
그러나 언덕 위 사람들이 별난 사람들일까.
타인의 고통을 못 느끼는 사람들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고,
만나지 않은 사람과는 공감(共感)하지 못한다.
상대가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말이다.
이를 입증하는 실험이 있다.
스탠리 밀그램 예일대 교수팀의 실험이다.
참여자들은 선생님 또는 학생 역할을 맡았다.
선생님의 질문에 학생이 정답을 말하지 못하면, 벌칙이 가해졌다.
전기충격이었다.
오답 횟수가 늘면 전기충격이 강해졌다.
선생님 역할의 참여자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전기충격을 가하는 스위치 옆에 `경미한 충격` `보통 충격`
`아주 강한 충격` `격렬한 충격` `극도로 격렬한 충격` 등이 적혀 있었다.
물론 실제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선생님 역할의 참여자는 이를 실제 상황으로 알았다.
연구진은 선생님 역할의 참여자들이
강한 전기충격을 주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벌칙을 받는 학생의 고통에 공감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고통받는 학생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에는 전기충격을 계속 가했다.
학생의 안전을 걱정하기도 했지만
"실험을 계속 해야 한다"는 연구팀의 말을 따랐다.
겨우 35%만이 거부했다.
이 실험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험 참여자가 과학자의 지시를 받아 전기충격을 가했듯이
권위 있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면
타인을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보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우리는 상대편과 공감할 수 없게 되며,
그의 고통을 외면하게 된다.
이럴 때일수록 리더가 중요하다.
밀그램 교수의 실험에서 드러났듯이
권위 있는 리더가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하면,
사람들의 공감 능력은 더욱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리더들의 공감 능력부터가
문제다.
이들도 상대편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리더는 자기편과도 얼굴을 보지 않고,
문서 위주로 대화한다.
이래선 누구와도 공감이 어려워진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학교도 못갈뻔한 시골소녀, 어머니 집념으로 꿈이
열렸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은 에너지가 넘친다.
나이는 잊은 지 오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걸음걸이가 오십 대보다 더 활기차다. 허리도 꼿꼿하다.
종아리엔 젊은이들처럼 힘줄이 돋아 있다. 손을 잡으면 아귀힘이 묵직하다.
그러면서도 두툼한 손바닥살집이 따뜻하고 부드럽다.
안경 너머 눈빛은 그윽하면서도 빛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금세 누님처럼 정갈하고 다정하다.
이길여를 키운 건 팔 할이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 차순녀 여사(데레사·1909∼1998)는 딸만 둘 낳았다.
손이 귀한 전주 이씨 집안에서 차 여사와 딸들(이귀례·85·한국차문화협회이사장과 이길여 회장)은
천덕꾸러기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미운 오리새끼였다.
둘째 이길여는 더 심한
구박덩어리였다.
온 집안이 잔뜩 아들을 기대했다가 한순간 초상집분위기로 변했다.
어머니는 출산 후 곧바로 밭일을 나가야 했다.
할머니는 “무슨 벼슬을 했다고 미역국이냐”며 미역가닥을 마당으로 내던져버렸다.
이길여는 그렇게 태어났다. 누구 하나 축하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때 이
아이를 이 세상 그 어느 아들보다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고 한다.
나도 커가면서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되고야 말 것’이라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뭔가 가슴에 쌓여서 그랬을까. 난 여섯 살 될 때까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말문이 터졌다.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대야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석 달 만에 반장을 하고,
그때부터 이리여고시절까지 줄곧 1등을 달렸다.
여학교는 하마터면 못갈 뻔했다. 아버지(1913∼1948)와 할머니가 결사반대였다.
‘가시내가 글자만 깨우쳤으면 됐지, 많이 배워봐야 팔자만 드세다’는 거였다.
그때 어머니가 나섰다. ‘내가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두부 장사를 해서라도 여학교에 보내겠다’고 결연히 맞섰다.
그리고 밥도 못 먹고 불안에 떨고 있던 나에게 ‘걱정마라. 내가 대학도 보내주고,
유학도 보내주고 다 해줄 테니. 넌 맘 푹 놓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다독였다.
그렇다. 날 여자로 낳아주신 어머님께 한없이 감사하다.
여자로 태어난 게 무슨 죄인가. 아니다. 여자로 태어난 건 행운이다.
엄청난 특권이고 행복이다. 난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날 것이다.”
이길여의 고향 마을은
전북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현 군산시). 비산비야(非山非野)다.
앞에는 대야평야(大野平野)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뒤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병풍처럼 에두르고 있다.
어린시절 이길여는 등잔불 아래에서 공부했다.
동네에서 전깃불이 들어오는 곳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방앗간뿐이었다.
이길여는 으레 저녁을 먹으면 책 보따리를 들고 그곳으로 달려가 책 속에 빠졌다.
그러다가 그만 그곳에서 쭈그린 채 잠이 들기도 했다.
이길여는 전혀 공부 잘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으스대거나 새침데기처럼 굴지 않았다.
보통 땐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공부는 주로 혼자 있을 때 했다.
여고시절엔 한 시간거리의 기차통학을 했다.
기차는 하루 두 번 다녔지만, 기차시간은 제멋대로였다.
학교가 끝난 뒤 밤 12시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이길여는 그런 짬나는 시간에 남들이 모르는 구석에 처박혀 책을 팠다.
“교실 교단 밑엔
다락방 같은 빈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숨어 몰래 공부하곤 했다.
학교 뒷산의 반송 아래도 공부하기 안성맞춤이었다.
기차가 끊기는 날, 한밤중 걸어서 집에 닿으면 새벽 2시가 넘었다.
잠깐 눈 붙이고 다시 학교에 가야했다. 그래도 힘든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당장 ‘누가 학교에 다니라고 했느냐’며 욕바가지가 쏟아질 게 뻔했다.
난 그 시절부터 거의 하루 4시간을 넘게 자 본 적이 없다.
잠자는 자(者)는 꿈을 꿀 순 있겠지만, 잠을 이기는 자는 꿈을 이룰 수 있다.
6·25전쟁 중엔 방공호에서 촛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이길여는 평생 독신이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이길여의 꿈은 의사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집 없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데려다가 돌봐주곤 했다.
아픈 것들은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줬다.
그러다보니 이길여 집은 동물병원처럼 짐승들로 복닥거렸다.
1958년 이길여는 동인천역
앞에 산부인과병원을 열었다.
금세 ‘보증금 없는 병원’(당시 병원에선 치료비 떼일까봐 선불로 돈을 받았다)으로 소문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병원마당엔 치료비 대신 가져온 미역,
생선, 멍게, 소금, 쌀, 감자, 옥수수, 채소 등이 가득 쌓였다.
이길여는 하루 한 끼만 먹고 온종일 진료에 매달렸다.
잠은 진료실 구석에서 자거나 엎드려 대충 때웠다.
그렇게 키운 가천대 길병원은 개인이 세운
병원 중 국내 최대규모로 성장했다.
국내 대형병원은 대개 종교(세브란스, 가톨릭)나 재벌(삼성병원, 서울아산병원),
대학법인(서울대, 고려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참으로 행복했다. 환자들은 내게
애인이고 가족이었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불렀고, 잠을 안 자도 정신이 맑았다.
내 나이 스물예닐곱. 여기저기서 맞선을 보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있으면 환자 한 분이라도 더 돌보고 싶었다.
서른 넘어 뉴욕 유학시절, 재미교포사업가와 한동안 데이트를 즐겼다.
그와 함께 뉴욕센트럴파크에서 나란히 누워 밤하늘의 별을 헤고, 새벽이슬 맞을 때까지 춤도 췄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가 청혼을 했지만 난 거절했다.
난 한 남자의 아내로 머무를 수 없었다. 나에겐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아내와 엄마 노릇을 해야
했다.”
이길여는 최근 그의 모교 대야초등학교에 사재 20여억 원을 털어 ‘가천이길여도서관’을 지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연면적 998m². 그는 이미 대야초등학교 탁구부 전용 실내체육관을 지어줬고,
선수단 전용버스도 마련해줬다. 해마다 훈련비도 꼬박꼬박 대준다.
그래서 그는 ‘탁구할머니’로 불린다. 지난달 도서관 개관식은 한마디로 동네 잔칫날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고, 한쪽에선 왁자하게 노래자랑이 펼쳐졌다.
이길여의
호 ‘嘉泉(가천)’은 ‘아름다운 샘’이란 뜻이다.
류승국 박사(1923∼2011)가 지어줬다. ‘嘉(가)’는
‘길(吉)이 스무 번(十十)이나 더(加)해진다’는 의미.
‘새참광주리에 밥은 없고 놋수저만 가득했다’는 그의 어머니 태몽과 비슷하다.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길여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한 시간 이상 걷는다.
골프비거리가 남자후배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호쾌하다.
2010년엔 에이지 슈트(78타·나이와 같은 타수)를 기록했다.
요즘도 무릎을 편 상태로 허리를 굽히면 손바닥이 땅에 닿는다.
다이아몬드반지 따위엔 전혀
관심 없다.
그 돈이면 첨단의료장비 하나 더 들여놓는다.
휴지 한 장, 이면지 한 장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첨단장비 욕심, 사람 욕심은 아무도 못 말린다.
돈을 물 쓰듯 한다. 하나도 아깝지 않다.
그렇게 뇌과학연구소, 암 당뇨연구원에 수천억 원을 쏟아부었다.
“내 모토는 박애 봉사
애국이다.
나누고 베풀면 행복하다. 그건 나를 위한 것이다.
6·25전쟁 때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 학우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난 그들 몫까지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있다. 그게 애국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만 생각한다.
난 돈에 대해선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이 살아왔다.
그저 내 몸을 던져 환자를 치료했을 뿐이다. 난 많은 돈이 필요 없다.
자식이나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병원은 이길여의 것이 아니라 환자들의 것이다.
유서를 통해 모든 것을 재단에 귀속시킬 것이다.
내 꿈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직 한참 멀었다.”
▼ “학비-취직 걱정마라” 네쌍둥이와의 약속 ▼
“약속 지킬수 있게 잘자라줘서 고맙고
대견하구나”
황슬, 황설, 황솔, 황밀. 1989년 1월 11일 아침,
길병원에서 나란히 태어난 일란성 딸 쌍둥이들이다.
네쌍둥이는 70만 분의 1 확률. 당시 아버지 황영천 씨는
강원도 삼척에서 광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황 씨 부부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네쌍둥이가 나온다는 데,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지 막막했다. 그들에겐 이미 첫째 딸이 있었다.
그래도 황 씨는 “다 제 밥그릇은 차고 나온다”며 내심 개의치 않았다.
부인 이봉심 씨도 “그래도 난 기독교인인데 그럴 수는 없다”며
한 명만 낳으라는 탄광병원의 권유를 거절했다.
“꿈에 산에 올랐는데, 사방 가득 붉은
진달래가 너무도 고왔다.
나도 모르게 ‘어마나 꽃 좀 봐!’ 했더니 어디에선가
‘그렇게 좋으면 다 가져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정신없이 내 품에 그 꽃들을 안았다.
그러다가 그만 꿈이 깼는데 그게 태몽이었다.
얼마 후 배가 자꾸만 불러왔다.
출산 한 달을 앞두고 친정인 인천 주안으로 왔다가,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부랴부랴 근처 산부인과를 찾았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병원을 갔는데 거긴 또 인큐베이터가 없었다.
결국 우왕좌왕하다가 아침 6∼7시쯤 찾아간 게 길병원이었다.”
이른 아침 이길여 원장은
다급한 보고를 받았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방금 네쌍둥이 산모가 들어왔습니다.
진통이 시작됐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무슨 소리야, 당장 제왕절개수술부터 해야지.’
이 원장은 수술집도를 산부인과장에게 맡기고,
모든 의료진을 비상대기 하도록 했다. 한동안 병원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사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네쌍둥이가 모두 건강하게 태어날 확률은 높지 않았다.
산모가 예정일보다 3주나 앞서 진통이 온데다 양수까지 터졌다.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네쌍둥이가 태어난 일은 딱 한 번밖에 없었다.
천만다행
네쌍둥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산모는 출혈이 계속돼 나팔관 제거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 중 셋째 ‘솔(1.7kg)’이만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문제는 병원비였다. 황 씨 부부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인큐베이터비용에 수술비용까지 엄청날 텐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때 이길여 원장이 말했다. “병원비는 됐습니다. 퇴원이나 잘하세요.
훗날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드릴 테니,
네 아이 잘 키우세요.” 그러면서 평생진료카드까지 만들어줬다.
그 후 황 씨 부부는
아이들을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들은 삼척을 떠나 용인에 새 둥지를 틀었다. 가난했지만 화목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네쌍둥이는 중고시절 반장을 도맡아했다.
모두가 태권도 공인 4단일 정도로 활달했다.
모두 3년제 간호학과(수원여대 2명, 강릉영동대 2명)에 수시 합격했다.
2007년 이길여 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18년 전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찾느라고 한참동안 수소문했다고 했다.
3년 동안 네 아이의 대학등록금과 학비 전액을 내줬다.
그리고 ‘너희가 대학가서도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내면,
졸업 후에 모두 길병원 간호사로 뽑아주마!’라며 또 한 가지 약속을 더했다.
3년 후 그
약속도 어김없이 지켜졌다.
아이들은 2010년 2월 졸업과 동시에 길병원에 취직했고,
2011년에는 가천대에 편입해 4년제 간호사과정까지 마쳤다.
2013년엔 모두 좋은 짝을 만나 나란히 결혼했다.
이길여 원장은 2007년 네쌍둥이를
다시 보고 친손녀처럼 반가웠다.
그 부모님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렇게 아이들을 훌륭하고 예쁘게 키웠을까.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잘 자라준
아이들이 참 고맙고 대견했다.
검은 띠에 아이들 이름을 새긴 태권도복을 생일선물로 주었다.
아이들은 이제 모두 우리 길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환자들은 헛갈리기 일쑤다. 나도 처음엔 그놈들을 잘 구별할 수 없었다.
어찌나 똑 닮았는지. 맏이 ‘슬’이가, 막내 ‘밀’ 같고, 셋째 ‘솔’이가,
둘째 ‘설’ 같고. 하지만 이젠 척보면 누구인지 금세 안다.”
"기업에 필요한 人文學(liberal arts)이란 대체 뭘까"
리버럴은 지혜, 아트는 창조 : 기업가치·책임 自問하고… 실제 성과도 만들어
내야
경영이 바로 '리버럴 아트' : 인문사회적 통찰 바탕으로 만들고 건설하고 기르는 것…
리버럴 없는 아트는 맹목… 아트 없는 리버럴은 공허
인문학은 과연 각광을 받는 것일까, 아니면 천대를 받는 것일까?
기업에서 인문학이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아무래도 스티브 잡스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생전에 그는 스탠퍼드대에서 행했던 졸업식 연설에서
기술(technology)과 인문학(liberal arts)의 융합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융합은 기능상 탁월함을 추구함과 동시에
고객의 감성과 욕구를 파고드는 디자인을 구현하는 데 초점을 두었을 뿐,
인문학이 추구하는 근본 질문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어쨌든 그 뒤 경영자들
사이에 동서양의 고전 읽기 모임이 성행하고,
곳곳에서 사내 인문학 강좌가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대기업 계열의 경영진도 앞다투어 인문학과
융합의 소양을 갖춘 직원을 선발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이런 뜨거운 인문학 열기와는
반대로, 여러 대학에서
인문학 관련 학과를 통폐합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로 거론되는 것은 취업률이 낮고,
기업에서 요구하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문학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조차
자신이 소속된 인문학에 대한 관심보다는
경상계열 전공을 복수 전공하면서 취업 준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더 많다고 들린다. 참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피터 드러커는 저서 '새로운 현실(The New Realities·1989)'에서,
경영자에게 필요한 인문학을 이렇게 말했다.
"경영이란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일컬어
온
리버럴 아트(liberal art) 바로 그것이다.
경영은 지식의 근본, 자신을 아는 것, 지혜,
그리고 리더십을 다루기 때문에 '리버럴'이고,
실제와 응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트'다.
경영자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지식과 통찰을,
즉 경제와 역사, 심리와 철학, 물질을 연구하는
제반 과학과 윤리에 대한 통찰을 지녀야만 한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경영자는
이런 지식을 모아서 성과와 결과를,
즉 환자를 치료하고, 학생을 가르치고, 교량을 건설하고,
사용자 친화적인 소프트웨어를 설계하고
판매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창출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리버럴은 인식과 지혜를,
아트는 응용과 연습과 창조를 의미한다.
어느 경영자가 삼국지나 난중일기 평석을 읽고 리더십의 본질을 알고,
논어와 소크라테스를 읽고 삶의 목적과 지식의 의미를 알았다고 하자.
여기까지는 '리버럴'이다.
다음 날 그는 예측 불가한 사업 환경과
다루기 어려운 직원들로 가득한 경영 현장으로 돌아온다.
어제의 앎을 바탕으로 다시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해서 탁월한 성과를 올릴 것인가?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체계적인 응용의 노력과 반성을 반복하면서
힘겹게 이룩해야 할 또 다른 과업이다.
이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아트'가 된다.
기업 경영을 논술한 드러커의 저작들은 어떻게
보면
개인의 인문학을 넘어선 기업의 인문학,
즉 기업의 리버럴과 아트를 탐구한 여정과도 같다.
철학은 실존하는 개인에게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어떤 행동이 도덕적인 행동인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를 질문하고 그 해답에 이르도록 이끈다.
이를 위해서 개인은 역사를 읽고 예술을 감상하고 자신을 반성한다.
기업의 인문학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이 기업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기업은 무슨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가?'
'이 기업은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기업의 도덕과 책임이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기업이 취해야 할 '리버럴' 질문이다.
기업의 '아트(技藝·기예)'는
'리버럴(認識·인식)'을
기업의 임직원들이 공유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로부터 기업의 미션과 비전, 사회적 책임, 의사소통,
변화에 대한 끝없는 대응, 혁신, 강점에 대한 집중, 비핵심 사업의 폐기 등
위대한 기업으로 이끄는 전략과 전술이 등장하고, 구체적인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기업 경영자, 심지어 주주들은 '리버럴'은 고민하지 않은 채,
매출을 올리고 이익을 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때문에 수많은 기업이 탐욕의 주체로 낙인 찍히고
대중 사이에 반(反)기업 정서가 횡행하게 된다.
이는 개인이 '왜 사는가?'
'나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 없이 성공에만 혈안이 된 것과 같다.
칸트식으로 비유하자면, 리버럴이 없는 아트는 맹목이고,
아트가 없는 리버럴은 공허하다.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학은 단순히 고전 읽기나 예술 작품
감상의 문제가 아니다.
리버럴의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아트의 성과를 내야만 할 절대적인 과제가 있다.
막대한 매출과 이익을 실현하는 기업은 많이 있어도
존경받는 기업을 좀처럼 찾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드러커의 통찰처럼, 대학이나 기업을 막론하고
인문학을 리버럴과 아트의 조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 인문학의 혼란상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수 있을 듯하다.
"성공의 3종세트 '우월감·불안감·절제력'… 어릴 때 심어줘야"
성공의 '트리플 패키지' : 유대인·중국계 등…
美서 성공한 집단 분석… 세가지 성공요인 찾아
한국은 완벽한 성공 사례 : 수천년
역사 자부심 있고…
외세 침략으로 불안감 겪어… 근면한 민족으로 절제력도
마이클 조던의 트리플 패키지
: 세계 최고라 말하고 다녀도…
밀려날까봐 늘 불안해해… 매일 1000개씩 슈팅연습
"미국 인구의 2%에 불과한 유대인이 노벨상 수상자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이유가 뭘까?"
"가난한 중국 이민자 가정 자녀들이 학업 성취도가 높은 이유는 뭔가?"
동양적 스파르타식 교육법의 우월성을 강조한 책 '타이거 마더'로
세계적 논란을 일으킨 에이미 추아 예일대 법대 교수는
새로 낸 책 '트리플 패키지'에서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했다.
그녀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근무 중인 남편 제드 러벤펠드 교수와 함께
미국 사회에서 다른 집단보다 탁월한 성과를 내온 유대인, 모르몬교도,
중국계, 인도계, 쿠바계, 레바논계, 이란계, 나이지리아계 등
특정 종교나 민족 8개 집단의 성공 요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 답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우월감(superiority complex)과 불안감(a deep sense of inferiority),
절제력(impulse control)이 그것이다.
방학을 맞아 뉴욕 맨해튼 자택으로 돌아온 추아 부부를 만나
새 책의 내용과 타이거맘 식 교육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중국계 미국인인 추아 교수는 '제국의 미래'
'불타는 세계' 등을 쓴 베스트셀러 저자이고,
러벤펠드 교수 역시 권위 있는 미국 헌법학자이자 추리소설
'살인의 해석'을 써 32개국에 번역된 베스트셀러 작가다.
―이번 책은 이전에 썼던 것과
주제가 다르다.
추아 "'트리플 패키지'는 특정 집단이 성공한 원인을 분석한 책이다.
성공한 집단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미래를 생각한다.
물론 누구나 현재를 즐기고 싶어 하지만,
미래에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선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제드는 이 주제에 관해 '자유와 시간'이란 책을
썼다."
러벤펠드 "미국인들은 현재에 안주해 산다.
미래나 과거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현재 순간을 즐기는 데만 치중한다.
이걸 '즉자적 만족(instant gratification)'이라고 부르고 싶다.
지금 미국 사회는 즉자적 만족에 빠져
성공의 필수 조건인 트리플 패키지를 상실했다.
트리플 패키지는 15년간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를 정리한 답이다. "
―세 가지 특질 중
가장 중요한 건 뭔가.
추아 "균형을 찾아야 한다. 어느 하나가 너무 지배적이면 문제가 생긴다.
아리안족(族)의 우월성을 강조한 나치가
2차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학살한 게 대표적이다.
또 자부심이 너무 강하면 '나는 위대하니까'라며 게을러질 수도
있다."
러벤펠드 "불안감이 너무 강하거나 또 우월감과 불안감은
있는데 절제하는 능력이 없다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
―트리플 패키지는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러벤펠드 "후천적 영향이 훨씬 크다고 믿는다.
물론 유전적 영향을 받는 선천적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후천적 영향이 강력하다."
추아 "오바마 대통령이 좋은 예다. 케냐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를 둔 그는
선천적으로 트리플 패키지 집단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그에게 '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지도자가 돼야 한다'면서 자부심을 심어줬다.
동시에 흑백 혼혈이란 태생 때문에 불안감도 많이 느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절제하는 훈련을 시켰다.
오바마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운동을 했다.
이처럼 트리플 패키지는 어린 시절에 심어주는 것이 좋다."
―인종 우월주의를 부추긴다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추아 "이 책은 인종주의와 무관하다.
오히려 소수민족인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책을 썼다.
책에 나온 8개 집단은 모두 문화적·민족적 자부심이 강하다.
반면 미국 주류 사회에 속하지 않았다는 불안감도 강하다.
이는 이민 2세로서 내가 자라온 방식이다.
나는 초·중·고를 다닐 때 피부색이 달라 고민이 많았다.
발음도 서툴러서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게 금세 표가 났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미국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마이너리티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많이 고민했다."
―이민자를 위해 쓴
책이라니 흥미 있는 주장이다.
추아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반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여학생이었다.
같은 반 남학생들이 항상 내 발음을 흉내 내며 놀렸다.
집에서 중국어를 썼기 때문에 중국식 억양이 영어에 그대로 묻어났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울면서 그런 얘기를 했더니 엄마가 오히려 화를 내셨다.
'왜 바보 같은 남자애 때문에 우느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엄마는 '우린 중국에서 왔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가진 자랑스러운 나라'라며
남자애가 놀려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이렇게 엄마에게 배운 민족적 자부심이 다른 아이들의 놀림을 막는 방패가 됐다.
트리플 패키지는 소수 집단에 더 큰 효과가 있다.
마이너리티도 주류 사회에 기죽지 않을, 믿는 구석이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민자 가정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그런 자부심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이들은 항상 기죽어 지낼 것이다."
―책에 한국계 미국인들의 우수한 학업
성취도를 설명한 대목이 많다.
그런데 왜 성공한 8개 집단엔 한국계가 빠져 있나.
러벤펠드 "한국계 미국인은
정말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한국계는 기본적으로 두 집단으로 나뉜다.
극단적으로 성공한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이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분석하면 평균 이하다.
평균 소득이 책에서 다룬 8개 집단보다 훨씬 떨어진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분석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추아
"한국계 미국인의 학교 성적은 극단적으로 뛰어나다.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엔 한국 학생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명문대 로스쿨과 의대, 줄리아드 음대도 마찬가지다.
예일대 법대 학장을 지낸 헤럴드 고(한국명 고홍주) 교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제법 전문가다.
하지만 사회·경제적으론 성공하지 못한 한국계가 많다.
이는 언어 문제일 수도 있다. 아무리 똑똑한 한국계라도
언어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면 미국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트리플 패키지란 관점에서 한국이란 나라를 평가하면 어떤가.
추아 "한국은
트리플 패키지의 완벽한 사례다.
한국은 수천년간 일궈온 찬란한 문화유산이 있다.
'우리 민족은 특별하다'는 민족적 정체성, 즉 우월감을 갖고 있다.
반면 과거 외세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불안감도 겪었다.
또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민족이다. 그만큼 절제력도 강하다."
―트리플 패키지가
기업이나 국가 차원으로도 적용될 수 있나.
추아 "스포츠 팀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팀은 트리플 패키지를 갖고 있다.
이런 팀은 잠시 슬럼프에 빠졌다가도 금세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반면 항상 하위권을 맴도는 팀은 이런 능력이 없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전 직원이 뭉쳐 있다면 그 조직의 성공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책에서 트리플
패키지를 갖춘 인물 중 한 명으로 스티브 잡스를 꼽았는데.
러벤펠드 "잡스 역시 트리플 패키지를
가진
집단 출신은 아니다(잡스의 생부는 시리아계 이민자였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거만하다고 할 만큼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친구들은 그가 항상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했다.
고아로 입양됐기 때문에 스스로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다른 이들로부터 존경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존경받지 못한다고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경쟁력을 키워갔다.
또 절제력이란 측면에선 굉장히 원칙이 분명했다."
추아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도 좋은 예다.
그는 항상 "나는 세계 최고"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밀려날까 봐 항상 불안해했다.
그는 코치가 시킨 대로만 플레이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플레이를 개발했다.
그는 최고가 되려고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고,
하루에 1000개씩 슈팅 연습을 했다.
그만큼 유혹에 빠지지 않는 충동 조절 능력이 강했다.
절제력이 강했다.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처럼 이타적 인물도
트리플 패키지로 설명할 수 있나.
러벤펠드 "트리플 패키지는 세속적 성공을 다룬 책이다.
아쉽지만 이타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인류나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건 도덕적으로 훌륭한 일이다.
인생에는 세속적 성공 말고도 가치 있는 일이 많다. 모
든 사람이 트리플 패키지를 따를 필요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