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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안고 남해 거제도를 다녀와서
-거제도 연구현장 탐방기-
□ 대진 고속도로를 달리다
05:00 집을 출발하여 버스,전철을 갈아타고 마치 어린이마냥 설레임을안고 오랜만의 연구 탐방길에 나섰다 08:00 우리 과우회원들 59명을 버스 2대에 나누어타고 희망의섬 거제도를 향해 출발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님들, 동료친구여러분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선배님, 그동안 건강하셨는지요? 오랬만에 만나뵈니 송구스럽고 너무나 반갑습니다.” “ 그래 박사장, 잘 있엇나? 사업은 잘되고? 요즘 어려움들이 많다고 하던데.” “ 예 선배님 선배님과 친구 여러분의 격려와 도움으로 감사하게 뛰고 있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으로 차에 올라 일일이 인사를 드렸다. 아침부터 봄비가 보슬보슬 소리없이 내리고있다. 마치 우리 과우회 선,후배들에게 무언가를 조용히 생각하라는듯이 조용히 이슬처럼 내리고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기흥휴계소에 잠깐 들렸다 다시 남으로 향했다. 우리가 탑승한 차에서는 유범식 선배님과 송춘규 선배님께서 많은 수고를 기쁜마음으로 해 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슬슬 고파왔는데, 때맟춰 떡과 음료수를 주셔서 맛있게 꿀맛으로 먹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대전까지 경부선을 달릴때, 계속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밖의 광경이 마치 안개속같이 희뿌옇게 흐리게 비속에 보였다. 분명 봄도 한창인데 창 밖의 산과 나무들이 생기없이 희미하게 보이는것 같았다. 웬지 마음이 무거워지는것같다. 정말이지 우리나라 산천은 금수강산으로 아름답다. 굽이굽이 휘어져 흘러가는 강들이며, 그렇게 높거나 험하지않은 포근한 느낌의 첩첩산들, 이렇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이강산을 , 그렇게 넓지도 않은 우리 이 국토를 이리 파고 저리 파헤쳐서, 이리 가르고 저리 갈라 자연을 훼손하고있는 4대강 사업등을 생각할 때 저 밖의 산과들에 나무와 풀에 미안한 마음이든다.
그러나 자연은 저 빗속에서도 어떻게 보이느냐에 상관없다는듯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들의 한숨소리가 내 마음에 들리는것같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변함없이 제 길을 가고 있다고. 단 미래에 돌아올 자연의 보복은 너희들의 몫이라고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것같다.
이제 대전을 지나 대진(대전-진주) 고속도로를 달리고있다.
아마 개통된지 그리오래 된것같진않다. 소백산맥의 맥을잇는 명산들인 덕유산과 지리산,대전8경의 하나라는 십장산과 보문산등을 좌우에 멀리바라보면서 300m 이상이라는 고지대를 달리고있다. 이제 날씨가 맑게 개이고있다. 옆에 앉은 이상덕 선배님의 친절한 각 지방 강과산들의 설명을 들으며 정말 아름답고 좋다고 감탄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저들 나무와풀 강과 산을 담았다. 인삼의 고장 금산휴게소에 10시20분경 잠깐 들렸다, 다시 11시45분경 산청휴게소에 들러 산채비빔밥으로 식사를 한 후, 다시 남으로 달렸다. 함양, 거창과 진안,무주,장수를 좌우에 바라보며, 함양과 장수를 가로지르는 유명한 육십령고개(현재는 3170m의 우리나라 2번째 긴 터널이 뚫려있음)를 넘었다. 높은 지대를 달리다보니 굽이굽이 흘러가는 금강, 남강의 상류물줄기와 좌,우의 산과 산 사이의 산골마을들이 더 가까이 느껴졌다.. 몇호 안되는 저 마을들이 이들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첩첩산골 마을이었으리라. 마을 앞뒤 산과산의 계곡으로 산등성이로 고무줄같이 가늘게 이어지는 저 오솔길들. 이들은 저 길따라 산 너머너머 그리운 이들을 그리며 따스한 정 마음깊이 간직한채 살았으리라. 산청땅을 지나다 보니 우리나라 불교계의 큰 족적을 남기신 성철스님과, 고려 공민왕때 원나라에서 최초로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가져와 이곳 단성땅에 장인 청천익께 재배를 부탁하여 우리나라에 목화꽃이 만발하게하여 따스한 옷과 이불을 가능케한 문익점 선생이 생각났다. 역사적으로 보면 산촌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탄생했다고한다. 산의 아늑함과 믿음직스러운속의 청정한 맑은공기과 변함없는 자연의 숨결속에, 위로 보이는 파랗고 드높은 하늘을 우러르며 꿈과 그리움을 키우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니 눈앞에 잔잔한 진양호의 맑음이 눈에 들어온다. 진주성의 혈전과 논개의 절개로 유명한 진주, 『토지』로 유명한 박경리 선생의 고향 통영을지나 거제도로 입성했다. 가는 차 안에서 해양연구원과 인연이 깊은 박진균(?)님의 해양연구원과 남해해양연구소등의 현황과활동, 거제출신으로 과학기술기자출신인 신종오님의 거제도에 대한 설명, 우리가 탑승할 온누리호, 우리나라2번째로 큰 거제도, 포로수용소, 대우,삼성 양대 조선소, 거제군에 얽힌 역사적의미등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셔서 다시한번 우리가 탐방할 곳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다.
□ 희망의 섬 거제도에 들어가다.
거제도는 1억2천만 평방미터의 크기로 우리의 서울 1억8천만평의 2/3크기로 앞에 언급한 남해 해양연구소, 대우, 삼성 양대 세계적 조선소, 포로수용소, 또한 거제 8경(내도,외도의비경등)등이 많은 곳이다. 거제대교, 신거제대교로 통영시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가덕도, 부산광역시와 연결을 위한 “거가교”가 건설중에있다. 신거제대교를지나 거제도에들어섰다. 여의도의 120배크기의 섬이다. 양 옆의 남해바다의 물결이 파랗고 맑다. 달려온 길 옆의 아파트 숲들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등 도회지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 왔는데, 혼잡하고 복잡한 서울등 도회지에 어울릴 아파트숲이 이곳 거제도에도 들어서서 눈에 띄는것이 어쩐지 낮설게 느껴진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이곳 섬에도. 그러나 이곳에 대우,삼성등 세계적 조선소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겠구나 생각이든다. 깊옆의 산들이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상당히 급했다. 의외로 대나무들이 많다. 올겨울 유난히춥고 변덕스런 날씨탓에 서울근교의 대나무들이 제대로 성장을 못했다는데 이곳엔 대나무숲이 무성한 편이다. 양옆으로 펼쳐지는 파아란 바다, 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하늘과 바다가 하나되어 나의 마음에 다가온다. 길 옆의 유자나무 가로수가 남쪽의 향기를 느끼게한다. 대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양옆의 풍경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했는데, 이곳의 파아랗고 맑음에 저절로 감사의 정이 깃든다. 너무다 좋다.
□ 바다는 우리의미래, 남해연구소 연구 현장에 오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들러싸여있다. 우리의 미래는 바다에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14:00경에 미래 희망의 연구현장에 들어섰다. 이곳은 한국 해양 연구원 남해 연구소 현장이다. 이곳에 도착하자 한국 해양연구원 부원장을 비롯한 연구소 소장, 임직원 여러분의 따뜻한 환영인사가 있었다. 간단한 인사 소개가 있은후 “온누리호”에 승선했다. 온누리호는 1992년 1월15일에 바다에 처음 띄워졌으며, 1422톤급으로, 길이 63.80m, 배의폭이 12.0m 속력 12.4노트 (28.5km)의 해양연구탐사선으로 승선인원은 41명이다. 배의 규모에비해 승선 인원이 적은것은 연구탐사를위한 기계등이 많기 때문이다. 연구소 임원들의 설명을 들은후 배를 구경했다. 식당, 승무원휴게실숙소,방,선장실등 곳곳을 구경했다. 배를타고 남해연구소를 떠나 앞바다를 구경했다. 날씨는 맑고 하늘은 파랗고, 바다도 그렇게 파아랄 수가 없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다. 멀리 바다가운데 진해를 바라보며 연구소 앞바다를 돌았다. 배에서 바라보니 연구소 위치가 천혜의 요새임에 틀림없다. 2시간정도 한바퀴돌아왔는데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있고 한면만 약간 틔여있을분이다. 마치 호수를 달리는 기분이다. 바닷물결은 그렇게 거세진 않았으나 바닷바람은 상당히 세차게 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갑판위에서 연구소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주위 경관을 구경했다. 그러고보니 이곳이 그 옛날 임진왜란때 원균장군이 패퇴하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승전했다는 칠천도해역이였다. 멀리 왼쪽으로 칠천도가 보였다. 우리는 선장실에 올라가 임원들의 설명을 들었다. 바다 해양 관측장비등도 있었다. 선장실에서 바라보니 그 옛날 임진왜란때 우리 선조들의 함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 옛날 선열들의 뜨거운 함성을 마음에 담으며 연구소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배가 흔들림없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아마 천안함의 우리 용사들도 이렇게 평온한 느낌속에 잠들었다. 당했을까? 임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 배는 해양 연구탐사선으로 남극세종기지등 세계바다를 항해한다는것이다. 그래서 배이름도 온누리호로 세계곳곳을 누비도 다닌다는 뜻이라고한다. 그리고 바로옆에 정박해있는 “이어도호”는 357톤급의 조그만 연구선으로 이번 천안함사태 때문에 백령도 현장에 파견되어 사고 인근 해양을 조사하고 돌아왔다고한다. 파도가 심할떄 파도와 파도사이의 간격을 보면 파도 높이를 알 수 있다고한다. 2층 갑판위와
빨간색의 구조선에 서있는 41 persons는 바로 이배의 승선할 수 있는 인원수를 말한다고한다. 어떤 배든지 구명정에 써있는 사람숫자를 보면 배의 승선인원을 알 수 있다는것이다. 돌아오면서보니 멀리 떨어진곳에 커다란 배들이 유조선인지 화물선인지 떠있는것이 보였다. 산밑의 바닷가 마을들이 정답게 보였다.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배에서 내려 16시20분경 연구소 본관 대 회의실로 향했다. 본관동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한후 곧바로 환영인사에이어 연구성과 동영상 시청 및 업무현황 보고가 있었다.
한국 해양연구원은 경기 안산시에 “본원”이 있고, 대전 대덕특구에 “해양시스템안전연구소” 인천 송도에“부설극지연구소” 경북울진군에 “동해연구소” 이곳 경남거제시에 남해연구소가 있다고한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지로서 전 지구 면적의 71%를 차지하고, 생물종의 80%가 서식하고있으며 무한한 수자원의 보고라고한다. 석유,천연가스등이 다량 매장되어있고 전세계인의 단백질의 공급원이며, 기후조절능력, 해양생태계의 재생산 능력등 매년 22조달러의 가치를 보유하고있으며 또한 전세계 교역량 75%(우리나라는 99.7%)인 약 50억톤의 화물이 바다를통해 수송된다고한다. 그래서 해양연구원에서는 관할해역의 과학적 관계구축, 해양자원의개발, 이용, 해양환경보전, 해양발전,운송기술개발등 우리 인류의 미래를 위한 비전에 도전하고있다고한다. 바다에 미래가있다. 바다에 도전하자. 연구현장의 과학기술자들에게 응원의 박수를보내자. 지구의 생존력의 핵심인 “녹생성장”은 바다에있다.
□ 해양연구원 임직원 여러분의 친절이 진수성찬보다 식욕을 더 돋우다.
드디어 저녁식사다. 식사전 연구소 홍보관에서 우리는 담소를나누다 식당에 들어섰다. 푸짐한 해산물, 조개구이 바베큐등 친절한 연구소 여러분의 친절속에 둘레둘레 모여앉아 즐겁게 담소하며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식사전 해양연구원 부원장님의 환영인사와 박승덕 과우회 회장님의 답례 말씀이 계셨다. 온누리호에서의 느낌, 세계적인 해양연구에 감사드리며, 이러한 연구로 해양대국의 꿈을 갖자는 건배제의가 있었고 이승구 한국기술연구원장님, 박병천 박사, 봉종헌 전 기상청장님의 건배제의가있었다. 끝으로 해양연구원 근무경력이있는 변명섭감사님의 해양연구원의 발전과 과우회회원님들의 발전을위한 건배제의가 있었다. 그리고 정말 맛있게먹는 중에 우리의 귀와 정신을 활짝 열어젖히는 기쁨과 감격의 소식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여성은 정말 강하다. 우리 대한의 여인들은 정말강하다. 굴곡의 수많은 역사속에서 오늘을 있게한 원동력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든다. 대한의딸 오은선씨, 한국시간 6시20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봉(8091m) 등반성공, 히말라야 14좌를 등반성공한 세계최초의 여성등산가이다. 정상에서의 “신령님 고맙습니다.” 인사와 감격의 눈물, 18년여만의 정말 의미있는 등반성공이라는 것이다. 본인으로선 5년여만의 도전의 성공이란다. 본인의 기쁨과 감격은 물론, 수 많은 굴곡의역사를 살아온 우리 대한국민 모두의 기쁨이며, 우리 대한의 힘과 저력을 보여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정말 좋은날인가보다. 마음에 남아있는 파아란 남해바다와 하늘, 우리의 미래 희망을위한 연구원 여러분의 끊임없는 도전, 해양연구원 여러분의 마음에서 우러난 우리 과학기술계 선배들에대한 친절, 여기에 세계최초의 여성 14좌 등반성공, 마음이 뿌듯하다. 우리는 아낌없이 기쁨과 감격의박수를 보냈다.
저녁식사후 홍보관에서 차 한잔 나누며 친구 강양원 변리사와 많은 경험담을 나눴다. 이 친구는 경제기획원, 재경원, 과기부, 특허청 경력이 다양하며, 1990년대 러시아 유학도 한 경험이있다. 당시 러시아에선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이 비참한 수준이었으며, 우리 존재도 잘 모르고 있었다고한다. 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국가의 공무원으로서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으로 배우고 연구하며 이겨냈다니 역시 나의 동지요 친구다.
□ 온누리호에서 밤을 보내다.
이번 연구탐방동안 우리는 한곳에서 자지않고 숙소가 4군데로 나뉘었다. 제1조는 관사에서 김홍석 선배님을 조장으로 13명, 제2조는 직원맨션에서 노홍길 선배님을 조장으로 12명, 제3조는 온누리호에서 양해본 선배님을 조장으로16명, 제4조는 외부숙소에서 권혁진 선배님을 조장으로 18명이 하루밤을 자게 되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은후 온누리호에 잠을자기위해 올랐다. 홍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조금 늦게 배에 올라보니, 이방 저방 문이 닫혀있고 누구도 보이지않았다. 그래서 배에 있는 연구원 방을 기웃거리니 연구원중 한명이 식당에 몇분이 TV를 시청하고 있다는것이다. 그래서 1층 식당으로 갔더니 몇분이 TV를 시청하고있었다. 주로 천안함사태 영결식, 오은선씨 등반 성공이야기 등이었다. 10시까지 함께 이야기하며 시청하다 방으로왔다. 우리방은 230호로 지하1층에 있었다. 혹시나하고 이곳 저곳 기웃거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피곤들해서 그냥 잠자리에 든 모양이다. 방마다 2사람이 겨우 잘 수 있을 정도로 이층 침대에 책상하나, 옷장하나 있을정도로 공간이 크지 않은 편이었다. 나는 신종오님과 한 방이었는데 방이 비좁고 갑갑하다고 휴게실에서 잔다는 것이었다.방에는 TV도 없다. 조용히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대진 고속도로를 달리며 보고 느꼈던것, 남해바다와 거제도의 경관, 남해연구소와 직원들의 친절함 등 거기에 이상덕 선배님같은 훌륭한분과 함께 버스에앉아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감사한 마음으로 내 마음에 조용히 물결쳤다. 배안에서 잠자는 것은 처음이다. 너무나 조용하고 조그만방에 홀로있으니 여러생각들이 교차했다. 계속들리는것은 기관실의 엔진 기계 소리가 윙윙하고 들렸다. 그것대로 싫지가 않았다. 천안함 영령들의 영결식과 그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생각나 영령들의 평화와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오늘밤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보내고 싶었는데 다들 피곤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함께 모여있을 넓은 공간도 이곳에는 없었다. 평소의 습관대로 기도와 묵상에 들어갔다. 이러한 좋은 기회를 주심에 하느님께 감사하고, 지금까지 내가 뜻의길을 가는데 많은 격려와 도움을준 선배님들,친구들,여러사람들을 떠올리며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마음깊이 새기고 결코 잊지않겠노라고 다짐하며 평화 건강을 빌어드렸다. 그리운 정으로 마음에 간직하여 결코잊지않으리라. 기도와 묵상을 바치고나니 12시 자정이 넘어있었다. 1시경 갑판으로 나가봤다. 아무도없다. 저 멀리 깜깜한 절벽속에 띄엄띄엄 불빛들이 하나 둘씩 보인다. 그곳은 별빛이 되어 나에게 다가 오는것같다. 아마 낮에 보였던 유조선 또는 화물선이나 산밑 어촌의 불빛이겠지 생각하며, 차가운 바닷바람을 내 가슴 깊이 마시며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누우면 바로 잠에 떨어지는편이다.
어쩐지 추워지는것같아 새벽 4시30분경 잠에서 일어났다. 방이 상당히춥다. 갑판으로 갔더니 새벽 바닷바람이 상당히 춥게 느껴진다. 심호흡을 깊게 한번하고 2층 갑판에 올랐더니 선미에 우리 태극기가 희미하게 나부끼고있다. 반가웠다. 새벽5시쯤에 방에 내려왔다. 평소 좋아하던 산책을할까 어쩔까 생각하다가 누가 옆에 있었다면 분명 새벽 산책을 나갔을것이다. 홀로 너무나 조용하니 기관실의 기계소리를 내 심장의 박동소리로 생각하며 기도 묵상에 들어갔다. 아침6시경 1층 갑판에 나갔더니 태양이 떠오르고있었다. 잔잔한 호수같은 연구소 앞 바다를 빨갛게 물들이며 치솟고 있었다. 어제 상당히 심했던 파도가 잔잔하게 출렁인다. 마치 밝은 태양아래 조용히 아침을 준비하는것 같다. 저절로 손이 모아지고 기도가 되었다. 오늘도 우리 과우회 선배님들, 이나라 과학기술의 산증인들인 선배님들 건강 지켜주시고 방문하는곳에서 과학 기술의 영원한 힘을 느끼게 하소서 빌면서, 다시 2층 갑판 배끝 저쪽에서 나부끼는 태극기에 묵념하고 내방으로 내려와 생각에 잠겼다. 아침7시경 배에서 내려오니 건너편에 이어도호가 정박해있고 바닷가 한쪽에 해양기후관측장비가 눈에 띄었다. 양선배님과 함께 반갑게 다가가 사진도 몇장찍고 산책길에 나섰다.
아침 8시 연구소 구내 식당으로갔다. 조개국을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식사후 바로 뒷산으로 산책을 나갔다. 대나무들이 많다 대나무 밑 둥치에서 죽순을 몇 개땄다. 보라색 빛깔의 껍질에 싸인 죽순은 마치 커다란 옥수수를 연상케했다. 몇 개 따서 밑에내려가 선배님들께 드렸더니 좋아들 하셨다. 아침9시 너무나 친절한 연구소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연구소를 떠났다.
□ 김영삼 대통령 생가를 방문하다.
주위의 경관이 시원스런 아침공기와 함께 눈에들어온다. 장목면소재지를 지나서 왼쪽으로 거가교(거제-가덕도,부산광역시) 신축현장을 멀리바라보면서 마치 동해안 해변도로를 달리듯 시원스레 남해의 푸른물을 바라보면서 달린다. 길이 유난히 구불구불하다. 오히려 쭉뻗은 길로 씽씽 달리는 것보다 여유로워좋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김영삼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다. “浩然之氣”라는 명판이 눈에 띈다. 마당 한복판에 김대통령의 흉상이있고 전통시골기와집으로 본채와 행랑채가있다. 집터는 300여평으로 그리 넓은 편은아니다. 건너방에 “大道無文”과 거실방의 “民主主義” 이라는 두 개의 현판이 그분의 평소 마음자세를 보여주는듯하다. 뒤편 한쪽마당에 우물이 정답게 있었다. 집앞에 멸치등을 파는 아주머니들에게 멸치 몇봉지들을 사가지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짚앞산이 그리 높진 않지만 상당한 급경사가 진것으로보아 김대통령의 곧은 성품을 보여주는것같다. 바로 이러한 앞산의 기상과 푸르고 너른 저 앞바다에서 님의 꿈이 자라지 않았을까?
□ 조선 왕국의 현장을가다. - 세계 제 2위의 대우조선소에서
오늘은 파도도 별로없이 고요하고 파아란 남해 바더를 왼쪽으로 바라보면서 굽이굽이 해변산길을 따라 대우 조선소로 향했다. 옥포면 소재지에 들어서자 반기는것은 양쪽에 늘어져있는 아파트들이다. 아마 대우 직원들이 사는곳일까? 한 도시를 형성하고있다. 조금 더 가자 눈에 띄는것이 이 충무공의 거북선 모형이다. 아, 이곳이 그 옛날 임진왜란떄 옥포대첩이 있었던 현장이구나 생각하며 대우조선소로 향했다.
대우 조선소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띄는것은 잘 다듬어진 정원과 정성드린 나무들이다. 역시 세계적 조선소답게 정성드려 잘 가꾸어 놓았다. 그리고 눈에 팍 들어오는것은 이름 모를 거대한기계, 기구들이다. 아마 배를 건조할 때 쓰는것인 모양이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조선소 구내에는 더 이상 우리차로선 갈 수 없고, 회사에서 제공한 차로만 갈 수 있다고한다. 조금있으니 차가 도착하고 우리가 올라가자 대우직원인 예쁘고 매력적인 아가씨가 대우조선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의할것은 아무데서나 사진을찍지 말라는 것이었다. 야, 한마디로 대단하다, 이곳의 장엄함이. 예쁜 아가씨의 상냥한 설명이있었다. 예쁘고 매력적이어서 그런지 설명이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 듯 했다.
대우 조선은 1973년 우리나라 조선입국의 큰 뜻을품고 대우조선해양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조선산업역사를 매일 새롭게 써가고 있다고한다. 이 대우조선이 위치한 옥포만은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형, 자연환경을 이용한 탁월한 해군 전략으로 소수의 배로 수 많은 외적선을 물리치고 조국산하를 수호한 유서깊은 장소라고한다. 4백만 평방미터의 부지위에 3만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으며, 조선 설계 인력만도 2800명 정도라니 정말 대단하다. 연간 70여 척의 대형 상선과 초대형 육해상 플랜트, 전투잠수함(연간 2척 생산능력) 구축함(연간3척)등을 건조하고있는 다목적 종합조선소라고한다. 2010년도에는 13조원 이상의 매출과 100억 달러 이상의 수주를 경영 목표로 설정하여 매진하고 있다고한다.
특히 대우 조선은 고기술,고난이도 선박에 큰 장점을 보이고있다고한다. (이 점에선 중국의 조선기술도 우리에 미치지 못한다함). 특히 고부가가치선의 상징이자 선박건조기술력 척도인 액화천연가스운반선도 세계시장의 1/3 이상을 차지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장 잘 짓는 조선소로 평가받고 있다고하니 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은가. 최근에는 우리 국민이 이틀간 사용할 수 있는 천연가스를 한번에 운송할 수 있는 세계최대크기인 25만3천 미터 세제곱 급 초대형 액화천연가스운반선과 14,000 TEU 초대형 컨테이너 운반선을 세계최초로 인도하였으며, 30만톤급 초대형 원유운반선도 세계 조선시장의 15%를 점유하고있다고한다. 또한 고난도 대형 해양플랜트를 건조하는 높은 기술력등 세계최고 품질의 해양제품을 생산하고있다한다. 특히 건조 제품의 대부분이 수출품이며 국산화율도 90%가 넘어 외화획득에 일등공신으로 국부창출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내 아가씨 설명은 계속된다. 부산광역시민 350만여명, 자동차 8000여대를 실을 수 있는 대형선박 건조능력을 가지고 있다고하니 이 어찌 대단하지 않는가. 한마디로 대단하다. 물론 전에도 많은 말을 들은적 있지만 직접 현장에와서보고 말을 들으니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가슴이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아니 과학기술이 아니런가. 우리의 과학기술수준이 이정도로 발전했다는것은 지금 조용히 듣고 계시는 우리 훌륭하신 선배님들께서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시며, 과거의 정책, 기술현장에서의 몸부림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시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이곳에 내려 현장을 둘러보고 사진도 찍고, 직원들과 대화도 나누면서 우리 대한민국 대단하구나! 결코 약하지않다 세계의 1등국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마음에 담으며 대우 조선을 떠났다. 우리나라에 세계1위의 울산 현대조선소, 제2위의 거제도 대우조선소, 제3위의 삼성조선소를 비롯한 7개 세계적 조선소가 있다니 이 어찌 자랑스럽고 가슴뿌듯한 일이 아닌가.
□ 6.25 비극의현장 거제도 포로 수용소 유적공원에 가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6.25 동란중인 1951년부터 거제도 고현,수월지구를 중심으로 설치되었으며, 인민군 포로15만 중공군포로2만등 최대 17만3천명의 포로가 수용되었는데 그 중에는 300여명의 여자포로도 있었다고한다. 특히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에 유혈살상이 자주 발생했고 1952년 5월7일에는 수용소 사령관 돗드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는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현장과 같은 살벌한 모습이었다고한다. 1953년 한국정부의 일방적인 22000명의 반공포로 석방이있었으며, 1953년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수용소는 폐쇄되었다고한다. 현재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5호로 지정, 보호되고있다. 현재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는 “디오라마관, 부서진 대동강철교, 6.25역사관, 포로수용소 유적관”등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재현하고있다. 그 중에도 가장 감명 깊었던것은 국내 최초의 단일 디오라마관으로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배치상황,생활상, 폭동현장이 생생하게 재연되고있었다. 마치 창문을 열면 현실 상황이 그대로 재연될것같이 먼 산밑 상황까지도 실감나게 다가왔다. 당시상황을 상상하면서 감명깊게보았다. 12:00 수용소를나와 근처 식당에서 멍게식사로 맛있게 먹었다. 멍게 비빔밥이라는데 생전처음 비빔밥에 고추장을 넣지 않고 비벼서 맛있게 먹었다. 고추장을 넣으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고한다.
박승덕 회장님과 이승구 회장님과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박 회장님은 6.25당시 학도병으로 중공군 2명을 생포하셨으며 화랑 무공훈장까지 받으셨다한다. 이승구 원장님은 조부께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셨으며,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게 가난하다고한다. 그래도 이 원장님은 차관에 원장님이시고 따님이 판사라고하니 대단히 출세한 편이라고 웃으시며 이야기 하셨다. 모처럼 먹어보는 멍게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13:00경 서울로 출발하였다.
해양연구원 남해연구소 임직원들이 이곳까지와서 배웅해주셨다. 정말 이번 연구탐방길에 보여준 해양연구원과 남해연구소여러분의 진정한 친절에 머리숙여 감사한다. 내일의 미래는 바다에 있다는 자부심으로 밤낮연구활동에 매진하고있는 과학기술자들이 선배 과학기술자들에 보여준 마음의 존경과 예우라고 생각한다. 진정 감사한다.
순창 휴게소에서 잠깐쉬고 서울로 향했다. 비가 계속 내리고있다. 서울을 출발할때도 비가 조용히 내렸는데 돌아갈때도 보슬보슬 내리는 비는 과학기술의 현장에서느낀 격한 감동들을 조용히 식히며 되새겨보라는 하늘의 배려인것같다. 모두들 피곤한지 조용했다. 침묵에 잠겨있던 차안에 갑자기 송춘규 선배님께서 사회봉을 잡으셨다. 이번의 연구탐방이 너무나 즐겁고 보람스러웠다며,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우리의 노년 건강에 대한 상식을 넓히자고 제안하시면서 이광영 대한 암협회 부회장님을 소개하였다. 이 부회장님은 골든에이지 포럼에 대해 설명하셨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가정,사회에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과거의 생각에서 탈피하야한다고하셨다. 65세 고령자가 2000년대 7.2% 였던것이 2010년에 12%로 증가하고 2018년 경엔 14%로 증가 추세라고한다. 현재 WHO에서 적용하고있는 고령화기준 65세문제, 고령자 노인 개념연구, 호칭문제등을 연구하고있다고한다. 늙은 개념의 노인, 고령자 대신 적합한 호칭을 찾기위해 관계자여러분이 애쓰고 계시다고한다. 나이가 들면 죽음문제예민, 피부가 건조해지고(가려움심함), 이가 약해지고 시린증상이 나타는등 고령자들의 특징이 나타난다고한다 그래서 고령자에 적합한 치약개발등 쉬지않고 연구하고 있다한다. 다음은 서은석 대한항공전직 임원회 소속 부회장님께서 걷기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셨다. 과천 서울 대공원 삼림욕장 등산로를 중심으로 70여명의 회원이 참여하여 걷기운동을 하고 있다고한다. 두 분의 말씀은 이곳에 있는 우리 과우회원들에게 금과 옥조같이 귀한 말씀이라생각한다. 오후3시경 다시 날씨가 개이고있다. 변덕스럽다. 인삼의고장 금산 휴게소에 잠깐 들렀다 다시 서울로 향했다.
□ 과학기술은 근본원리요, 이론이며 실천이다.
서울에 가까이오니 또 보슬비가 내리고있다. 이제 차안의 선배님들은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고 조용히 침묵에 잠겨들 계신다. 아마 이번 탐방길에서 과학기술이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이요 국부창출의 일등공신임을 청춘을 바쳐 나라위해 불살라오신 과거를 회상하며 뿌듯한 마음을 가시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이번에 연구현장에서 보고 느낀바와같이 미래의 희망은 바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삼면이바다인 우리의 바다의 정복이야말로 과학기술발전의 현장임을 확인했다. 현지연구임원들도 말했지만 과학기술부가 왜 없어졌는지 너무나 아쉽다고들했다. 과학기술은 말로떠든다고, 일시적 여론이 움직인다고 되는것이아니고 국가의 백년대계를위해 이번연구현장 과학기술 종사연구원들처럼 조용한 가운데 원리를 찾고, 이론을 세우며 실천하는 기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낌없는 국가적 지원과 장기적인 계획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탐방길에 우리 선, 후배들은 다시한번 느끼고 새겼다.
이번 탐방길에 나와같이 앉아 우리나라 산천에대해 설명해주시고, 안내자역할을 해주신 이상덕 님께 감사의 정을 보내고싶다. 이제 서울 강남역, 비속에 우산을 받쳐준 과우회 정과장님께 감사드리고 전철에 몸을실었다. 오후 6시가 넘었으리라.
이번의 보람을위해 계획하고 실천해주신 박승덕 과우회장님, 김대석 사무총장님, 이승구 기술경영연구원장님, 그리고 정과장님을 비롯한 과우회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아낌없는 박수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정말 보람있고 즐거운 연구, 탐방길이었으며, 이번에 함께하지못한 선배님, 친구여러분에게 정말 아쉬운인사를 드립니다. 훌륭하신 과우회 선배님들, 항상그리운 친구여러분 48년만의 최악의 봄 날씨속에서 고생많으셨습니다. 건강과 평화를 빌며, 진정감사함속에 안녕을….
2010.5.7
다솜데코 박진우 드림
첫댓글 탐방과정과 느낌들을 아주 세세하게 잘 표현해주셨습니다.일일히 기록하고 정리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탐방기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이 했습니다.
거제도 탐방기 잘 읽었습니다.그리고 죽순선물 너무 고맙습니다.
오고 가는 길목, 구수한 이야기거리를 곁들인 자상한 탐방기를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자상한 탐방기 잘 읽엇습니다 다음기회에도 꼭 참석하십시요
박동지의 청산유수격의 기행필치에 또 한번 감탄을 했오.
생생한 탐방기 잘 읽었습니다. 박진우님의 느낌이 내 느낌이 되어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생동감 넘치는 탐방기를 잘 읽고갑니다. 한편의 귀한 문학작품이었습니다. 감사합1니다.
상세하게 쓰신 탐방기를 읽고 놀랬습니다. 훌륭한 문학작품을 읽는것 같앴습니다. 다만 "그렇게도 넓지도 않은 우리 이 국토를 이리파고 저리 파헤쳐서 이리 가르고 저리갈라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생각할때". . . 각자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수술을 하고 산고를 치러야 훌륭한 애기가 탄생하듯이 더욱 아름답고 훌륭한 국토를 만들려고 노력하는것이 나닐까요? 숙소가 4군대로 나뉘었는데 계획이 변경되어 김홍석씨는 딴곳에서 취침하고 제1조조장은 이세용 이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