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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십자가, 하나님의 지혜
성경 : 고린도전서 2장 6-12절
찬송 : 151장
지난 사경회를 통해 주신 말씀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온 세상이 반드시 들어야 할 구원과 생명의 복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약 안에서 지독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누구나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을 통해 선포하신 예언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받은 복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얼마나 크고 놀라운 복을 하나님께 받았습니까?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한다고 하십니다.(임마누엘 하나님) 너희는 세상의 복이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너를 저주하면 저주를 받고,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십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이스라엘)입니다.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항상 져주시는 사람들!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사람들! 그러므로 이 세상 누구도 감히 일어나 해코지하거나 저주할 수 없는 사람들! 세상에 이렇게 영광스럽고 존귀한 백성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의 어떤 민족이나 나라도 이스라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향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옛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구원과 복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돌로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 피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예배하며 복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친히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가 늘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따라 함께 이 믿음을 고백해볼까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친히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다음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을 하나님 보좌 앞으로 인도하셔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십니다. 죄인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보니 알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는 너무너무 끔찍한 형벌입니다. 십자가형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형벌입니다. 인류가 개발한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형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실 때, 그 육신이 이만큼 고통스럽고 힘드셨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분명합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고, 이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일하심이 아니면 아무도 이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진리를 성경이 어떻게 증거하는지 직접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6–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죽음입니다. 이 사실은 육신의 눈으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두고 하나님의 지혜라 합니다. 아멘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다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죽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죽음입니까?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은 대속하시는 죽음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절대 죄인을 그냥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죄인을 향해 쏟아 부으십니다. 그러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죄인을 향해 쏟아 부으셔야 할 저주와 형벌을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누구를 향해 쏟아 부으셨습니까?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향해 쏟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죄인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향해 모든 저주와 형벌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죄의 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을 속량하셨습니다. 이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죄 용서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은 죄인을 대속하시는 죽음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이 큰 구원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다시는 그에게 정죄가 없습니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구원입니까? 하지만 이 사실은 세상이 절대 자기 지혜로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은혜로 알려주실 때만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은 심판하시는 죽음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단번에 심판해버리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거짓 주인 노릇하는 죄와 사망과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더 이상 죄와 사망과 사탄의 종이 되어 살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친히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나시므로 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 안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죄와 사망과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세상 또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향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죄와 사망과 사탄에 매여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 그를 구원하신 예수님처럼 삽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가 되어 임마누엘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완전히 새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신부, 하나님의 양떼, 빛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가 받은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불신 세상은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도를 어떻게 대합니까? 이를 알려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였는지 보면 압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23:35-39)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고 계시는 예수님, 나를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이런 영적 태도를 보이는 인생은 얼마나 악합니까? 얼마나 참담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여기에 더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기 위해 너무너무 큰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을 위해 얼마나 큰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뜻한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다음 그들은 기고만장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고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수고를 통해 그들이 가장 무너뜨리려고 했던 바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그들을 철저하고 완전하게 심판하셨습니다. 대신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이들을 영원히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선물해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보니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대적하는 인생들은 한없이 비참하고 부끄러운 인생입니다. 교회가 당한 핍박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고 박해하였던 수많은 이들을 보십시오. 한때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였던 사울을 보십시오. 그들이 행한 수고가 헛된 수고로 드러났을 때, 그들은 얼마나 참담하고 부끄러웠을까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을 때, 사울은 지금까지 그가 목숨을 걸고 행한 모든 일이 헛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완전한 절망에 빠졌습니다. 살고자 하는 모든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이 끔찍하고 비참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우리는 브올의 아들 발람과 바벨론 나라를 통해 확인한다. 발람은 감았던 눈을 떠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스럽고 존귀한 모습을 다 보았습니다. 그랬으면서도 끝까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이 세상 재물과 지위를 위해서였습니다. 돌아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이스라엘 위에 쏟아 부으려 했던 모든 저주와 형벌을 하나님께서 발람의 자기 머리 위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온 세상 나라와 민족들의 수고를 통해 세워진 바벨론과 그 도성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그 마지막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바벨론의 영화와 부요함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의 성벽은 훼파되겠고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백성들의 수고는 헛된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잔하리라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렘51:58, 64)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깊이 탄식하며 웁니다. 불신앙에 싸여 삼위일체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인생,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구주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세상을 보며 통곡합니다. 도대체 왜 이들은 이런 길을 갑니까? 그들이 육신의 눈으로만 십자가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대속의 죽음, 심판의 죽음을 오직 육신의 눈으로만 바라보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통해 베푸시는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9–11)
두 강도가 처음에는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다가 나중에 한 강도가 회개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어떤 구원을 그에게 선물해주셨습니까?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2-43)
두 강도의 모습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살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없이 그를 비참하게 하고 부끄럽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가난이 그의 주인이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일어나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사랑과 기쁨으로 그를 맞아주셨습니까? 아들이 저지른 말도 안 되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는 버선발로 뛰어 나가 그를 안고 우셨습니다. 다시 그를 상속자로 세우시고, 가장 풍성하고 즐거운 잔치를 열어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왜요?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이유를 설명하라면, 이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에 반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는 항상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품안에 안겨 사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복이며 영광인지 그는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부요함이 아니라 자기의 성실함과 의로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랑하는 성실함과 의로움은 결코 그에게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그의 성실함과 의로움은 한없이 무가치하고 부끄러운 것일 뿐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를 받아 품에 안고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아들들을 사랑하시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탕자를 향해 베푸시는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가 보여준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제게는 아버지의 사랑 따위 필요 없습니다. 저는 동생을 향해 베푸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사는 동생과 달리 오직 저는 제 힘으로 살 겁니다. 제 성실함과 의로움으로 살 겁니다.
어떠세요? 이런 사람 어디서 많이 보지 않으셨어요? 이는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반역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이들은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크고 놀라운 구원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이들의 관심은 썩어질 육신에만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고 부끄러운 인생의 모습입니까?
이들이 왜 이렇게 비참하고 부끄러운 인생을 산다고요? 육신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을 뜨십시오.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통해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모시고 믿음의 싸움, 믿음의 경주 잘 감당하도록 하십시오. 믿음의 경주, 믿음의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