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투데이 장병호 기자] 이경규가 영화 ‘전국노래자랑’(감독 이종필, 제작 인앤인픽쳐스)을 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 한 편에서 ‘또?’라는 의문이 생겼다. 많은 이들처럼 코미디언이 아닌 영화 제작자 이경규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영화에서 뼈굵은 이종필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는 소식은 영화에 대한 의문을 잠시 접어두게 만들었다. 마침내 완성된 영화를 봤고 그제야 영화 제작자 이경규에 대한 선입견을 지울 때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코미디언으로 충분히 성공한 그가 이토록 영화에 매혹된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코미디언이 아닌 영화 제작자로 이경규를 만난 것은 초여름 날씨가 시작된 지난 8일 오후, 서울 광화문 근처의 한 카페에서였다. 영화 ‘전국노래자랑’이 개봉한지 정확히 1주일이 된 날이었다. 그의 표정은 정성껏 키운 자식을 출가시킨 부모의 모습처럼 먹먹함이 느껴졌다. 매일 아침마다 박스오피스를 확인한다는 그는 “ ‘복면달호’ 때와 달리 지금은 흥행 스코어를 바로 알 수 있어서 통계에 너무 시달리게 된다”며 웃었다. 걱정과 근심, 그럼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마음이 한데 녹아든 웃음이었다.
‘아이언맨3’와 펼친 정면 대결은 예상대로 힘든 승부였다. 그렇지만 그는 “개봉 첫 주 토요일보다 일요일에 관객이 더 들었다. 이번 주말에는 입소문을 더 탈 것 같다”며 “처음부터 개봉일에 후회는 없었다. 맞대결을 펼친 게 더 화제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다만 그게 좋은 결과인지 나쁜 결과인지 모를 뿐”이라는 그의 말에서는 영화 제작자로서의 고충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자 지쳐 있던 그의 표정에는 이내 생기가 돌았다. “홍보사가 시켜서 인터뷰를 한다”고 눙칠 때는 TV 속에서 익히 만나왔던 코미디언 이경규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이경규는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를 “꿈”이라고 말했다. 코미디언으로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스스로는 아직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이나 명예도 중요하지만 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성공의 기준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세월이 흐를수록 하고 싶은 것은 바뀌기 마련이다. 예능인으로서 섹스 코미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며 50대에 접어든 그가 지금 가장, 혹은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은 “좋은 영화를 한 편이라도 만드는 것”이다. PD에게 선택 받아야 하는 코미디언의 입장과 달리 자신이 직접 선택을 할 수 있는 제작자라는 위치 또한 보다 능동적인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희열로 다가온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10대 시절부터 빠져들었던 영화의 매혹은 이경규를 자연스럽게 영화인의 길로 이끌었다. 부산 초량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기억은 늘 영화와 함께였다. 집 근처에 있었던 초량극장, 대도극장, 중앙극장은 이경규의 삶을 영화에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존재로 만들었다.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는 그의 입에서는 ‘고래사냥’, ‘별들의 고향’ 같은 고전 한국영화부터 임예진이 출연했던 ‘진짜 진짜 좋아해’ 같은 하이틴 영화, 그리고 ‘벤허’, ‘쿼바디스’ 등 당시 큰 인기를 얻었던 종교 영화와 이소룡, 왕우, 성룡 같은 무협영화 스타들, 그리고 그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까지 수많은 영화와 영화인들의 이름이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그때 책이나 시를 읽었다면 지금 시인이 됐을 텐데 이상한 길로 접어들었다”고 그는 쑥스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가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짓던 행복한 표정에서 그가 진심으로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서 웬만한 영화들은 다 찾아볼 정도다. 영화에 대한 취향도 명확했다. 휴먼 코미디, 전쟁영화, 그리고 동물영화들은 좋아하지만 스릴러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경규는 “영화적인 설정이 도드라지는 영화보다는 삶이 묻어나는 진정성이 있는, 리얼리티가 있는 영화가 좋다”고 자신의 영화 취향을 설명했다. 영화에 대한 그의 태도는 코미디언으로서 그가 보여준 행보와도 일정 부분 겹친다. 멀게는 ‘양심 냉장고’부터 가깝게는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까지 예능인으로서의 이경규는 늘 사람들의 삶과 함께 숨 쉬며 웃음과 감동을 선사해왔다. ‘복면달호’에 이어 또 한 번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이야기하는 ‘전국노래자랑’을 제작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이경규는 ‘복면달호’도 ‘전국노래자랑’도 모두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 ‘전국노래자랑’에서 김용건 아저씨가 산딸기 엑기스 ‘여심’에 대해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잖아요. 그 말처럼 내게는 내 영화가 ‘여심’ 같은 거예요(웃음).” 가수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봉남(김인권)이 지금 자신의 심정을 담은 인물이라면 원로배우 오현경과 아역배우 김환희가 보여주는 할아버지-손녀의 에피소드는 자신의 미래 모습을 담은 이야기라 더 공감이 갔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신의 꿈을 영화로 이야기할 생각은 아니다. “관객 수로 꿈을 성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300만 관객이 넘는다면 나름대로 내가 생각한 꿈을 이룩한 거라고 봐요. 그때부터는 또 다른 영화를 만들 거예요.”
1981년 MBC 개그콘테스트를 통해 예능계에 발을 내딛은 이경규는 3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꾸준히 코미디언으로 활동해온 성공적인 예능인이다. 크고 작은 부침을 겪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그는 “시대를 잘 만난 것 같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콩트에서 토크쇼로, 그리고 버라이어티로 변해온 예능 프로그램의 흐름이 자신의 재능과 의도치 않게 잘 맞아떨어졌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매 순간 그가 시대의 운만을 기다린 건 아니었다. 막연하게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온 그에게도 자신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몸을 내던지던 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롤모델로 여러 차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그랜 토리노’를 언급했다. 과거 액션 배우로 활동을 시작해 이제는 할리우드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코미디언에서 출발해 이제는 영화라는 꿈을 꾸고 있는 이경규에게 단순히 영화인으로서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의 롤모델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꿈보다는 현실적인 안정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경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인데 조금 건방진 이야기일지 몰라도 안정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 꿈틀거리는 게 중요하다”고 자신의 인생관을 털어놨다. 비슷한 코미디언 출신 감독인 우디 앨런이 삶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길어올리며 웃음을 선사하는 것과 이경규의 인생관에는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년배의 중장년 세대들이 자식들에게서 꿈을 찾으려 하는 것과 달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 속에서 꿈을 발견하려고 꿈틀대고 있다. ‘복면달호’와 ‘전국노래자랑’까지는 6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다음 작품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 제작자로서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는 그는 “이제는 조금 더 빨리 작품을 내놓을 것”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인터뷰가 끝난 뒤 유난히 귓가를 맴도는 말이 있었다. “사람들이 저는 리얼 버라이어티를 못할 거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 아는 PD한테 그랬어요. ‘카메라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어? 나 밖에 더 있어?’ (웃음)” 인터뷰에서 만난 이경규도 TV에서 보던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이경규는 이미지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솔직함이 가장 인간적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30년 넘게 예능인으로 한결 같은 위치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길지 않은 인터뷰였지만 영화에 대한 그의 진심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코미디언이 아닌 영화 제작자 이경규의 진심 또한 언젠가는 관객의 마음에 와 닿을 것이다. [사진=정선식 기자(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