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태오 12,1-8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저것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다윗의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그는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그 일행과 함께 제단에 차려 놓은 빵을 먹지 않았느냐? 그것은 사제들밖에는 다윗도 그 일행도 먹을 수 없는 빵이었다. 또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는 사제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겨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책에서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잘 들어라.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는 무죄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얼마 전, 안경을 하나 맞추기 위해서 안경점에 갔었습니다. 왜냐하면 쓰고 있던 안경이 자전거에 밟혀서 부서졌거든요. 시력 검사를 한 뒤에, 제가 앞으로 쓸 안경테를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안경테를 바라보면서 제가 고르지 못하자, 그 안경점 직원은 저에게 어떤 안경테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기왕이면 가벼운 안경테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저에게 안경테 하나를 권해줍니다. 정말로 가벼웠습니다. 그런데 옆으로 보이는 가격표. 그 가격이 엄청납니다. 20만원이 넘더군요. ‘Made in Japan’ 이랍니다. 저의 눈을 위해서 자그마치 20만원이 넘는 것을 쓴다는 것이 너무나 호강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했지요.
“조금 싼 것 없나요?”
그러자 10만 원 정도 되는 안경테를 보여줍니다. 이것 역시 가벼웠습니다. 하지만 10만원도 비싼 느낌이 팍팍 들었습니다.
“혹시 더 싸고 그러면서도 가벼운 것 없나요?”
이번에는 3만 원짜리 안경테를 보여줍니다. 앞에 것에 비해서 무겁기는 했지만, 안경테가 튼튼한 것은 물론 가벼운 축에 속했습니다. 점점 이 3만 원짜리 안경테에 관심을 갖자 그 안경점 직원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손님, 만약 이것(20만원이 넘는 제일 비싼 안경테)을 구입하시면 제가 5만원까지 DC를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것(3만 원짜리 제일 싼 안경테)은 5천까지밖에 DC를 해드릴 수밖에 없네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할인율이 높은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격이 저렴한 것을 구입할 것인가를 말이지요. 결국 저는 가격이 저렴한 쪽을 선택했습니다. 아무리 할인율이 높다 하더라도 안경렌즈까지 포함하면 20만원 넘는 비용을 쓴다는 것이 왠지 사치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그리고 의심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할인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안 나간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지금 현재 저는 안경렌즈까지 포함해서 5만 5천 원짜리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전에 쓰던 안경은 무거운 것은 물론, 안경렌즈에 상처가 많이 나 있었거든요. 이런 상태에서 안경을 바꾸니 너무나 가볍다는 느낌과 함께, 흠이 없어서 깨끗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답니다.
이렇게 가격이 저렴해도 제 마음에 딱 맞는 것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비싼 안경이 다른 안경에 비해서 훨씬 좋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렴한 안경도 전에 쓰던 안경보다는 좋으니까 너무나 마음에 들더군요.
사실 우리들은 고급스러운 것이 달라도 다르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그러다보니 화려한 명품만을 선호하는 명품족이라는 신조어도 생겼고요, 명품을 대여해주는 곳도 생겼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사람들이 선호하는 값비싼 명품보다도 자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이러한 명품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즉, 외관상으로만 보이는 하느님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들이 열심히 한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기도와 단식을 밥 먹듯이 해야 하고 안식일 법은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히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안으로 실속을 차리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나요? 겉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명품족은 아니었나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듯이, 이웃에게 베푸시는 자선을 가장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