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성령의 기름 부음을 가지고 계속 일하니까 일을 마치고도 지치지 않는다(벧전4:11).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이 기름 부음이다. 지속된 승리가 있기 위해선 엎드려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믿음의 대가라 할지라도 나가떨어진다.
승리 후에도 넘어질 수 있다는 사례가 엘리야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850대 1의 영적 싸움에서 불의 승리를 하고,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은 상태에서 일곱 번 기도하고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며 폭우가 내릴 응답을 받는다. 불과 물의 승리를 얻은 하나님의 대표적인 선지자다. 그런데 이세벨의 협박에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바란다. 한순간에 낙심한 이유가 그 이후에 성령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역 후에 오는 피곤함도 있겠지만 영적인 나태함에 빠지면 지치게 된다. 사역을 마치고 다시 기도의 자리로 가서 주님을 의지하면 믿음에서 믿음으로,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진다. 이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다.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있었는데 유대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가짜 복음을 들고나온다. 위기 가운데 놓였는데 분열될 뻔했던 교회가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서 하나가 되었다. 바울과 바나바 편에 유다와 실라를 보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겸손함도 있었다. 이 일로 승리 후에 또 승리를 맛보게 되었다(22-28).
그러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바울과 바나바를 칭찬한다(25).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걸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니 가는 곳마다, 사역에 열매가 있었다. 이들은 열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에 틀리지 않다는 것. 이 결정은 성령과 함께한 결정이다. 우리가 결정한 게 아니라는 베드로의 고백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위로받고 상처가 회복되어 하나가 된다.
2년간 2,300km나 되는 1차 전도 여행에서의 사역 후에 다시 한번 전도했던 곳들을 돌아보자고 바울과 바나바가 떠나려 했는데, 마가를 데려가는 것에 대해서 갈등이 있어서 따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것은 아쉬움이고 부족함이고 연약함이다.
본문은 승리 이후에 잘 대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는 다 넘어진다. 그때 회복의 방법을 깨닫는 것이 지혜다. 넘어져도 또 일어날 수 있고 승리 이후에 또 승리로 가속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 공의회 후 이들은 며칠 만에 다시 전도 여행을 떠나자고 결의한다(36). 문제는 마가의 동행 여부였다. 밤빌리아의 버가는 습지라 모기가 많아서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이 많았고 거기서 바울이 말라리아에 걸린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때 마가는 어려운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그런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바나바가 제안하니 바울이 반대했다. 이때 서로 갈라서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다니며 교회를 굳게 했다.
성경은 좋은 것만 기록하지 않는다. 이건 믿음의 본질 때문에 싸운 것도 아니다. 기질상의 문제다. 교회도 기질이 다른 사람이 있으면 부딪힘이 있다. 바울은 일과 목표 중심의 사람이고(빌3:13,14), 위로의 아들 바나바는 사람이 중요하다. 바울이 외면당할 때 교회와 연결해 준 사람이 바나바다. 바울에게 있어서 은인이자 좋은 동역자다. 두 사람이 함께 팀웍을 이루면 사역이 잘 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마가의 실수에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다. 싸우는 교회들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싸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싸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 됨이다. 온전히 순종했으면 잘 되었겠지만, 인간의 미숙함과 부족함에도 하나님은 더 큰 일을 이루신다.
벽에 낙서해도 대가는 낙서 위에 명작을 만든다. 낙서 때문에 명작이 된 게 아니라 낙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페르시아에선 실수로 유리창이 깨졌는데 어떤 대가가 깨진 조각들을 이어 붙여 스테인드 글라스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인생이 낙서 같고 깨진 유리조각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 우리의 범죄고 우리의 연약함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이다.
다툼에도 불구하고 중단하지 않고 갈라져서 사역을 계속하여 2차 전도 여행도 큰 승리의 사역이 되었다(갈6:9).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인데 실라도 헬라파 유대인이다. 실라도 로마 시민권이 있던 사람이다(16:37). 실라는 후에 베드로의 말을 헬라어로 대필해 편지를 썼다(벧전5:12). 이 다툼의 사건을 통해서 실라가 바울의 중요한 동역자로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마가의 회복이다. 마가로 인해 신실한 두 일꾼이 싸우고 갈라서게 되었지만, 이후에는 마가와 바울이 회복되어 서로 의지하는 동역자가 되었다(빌1:24; 딤후4:11).
마가는 베드로를 통해 성장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다 마가에게 들려주었고 마가는 이것을 기록해서 마가복음을 썼다. 하나님께서 마가와 그의 사역을 세워 주시고 우리에게도 유익을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놓이면 이런 모든 것들이 벌어지게 된다(40). 마지막 수습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어 있는 것. 그러니 다 서게 된 것이다. 후에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도 회복되었다(고전9:6).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잘한 것도 아니다.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낙서 같은 인생, 깨진 유리 조각 같은 인생에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셔서 실라라는 일꾼이 세워지게 되었고 마가라는 깨어진 사람이 일어나서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이 되었고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쓰임 받는 종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 다 회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