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동리목월 문학관
경주 출신인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의 문학적 정신을 기리는 동리목월문학관에 갔다. 박목월의 고향인 경주시에 개관한 것이다. 불국사 에서 가까운 곳인 토함산 중턱에 있다. 동리목월문학관은 2층 건물에 들어서자 왼편에는 목월, 오른편에는 동리문학관이 있었다. 한 건물 안에 방만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동리와 목월이 작품을 쓰던 서재가 각기 생존 당시의 집필했던 모습으로 재현됐고 작품과,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영상실에는 두 선생이 걸어온 생애와 업적을 한 눈에 보는 영상시설도 갖췄다. 동리전시실에는 '등신불', '황토기' 등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영상화했으며 목월전시실에는 목월의 육성으로 시낭송이 흐르고 있다. 먼저 목월문학관을 보고 동리문학관을 보고 1층 영상실에서 생시의 자료를 영상으로 자세히 보았다.
박목월(1915〜1978)은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산골에서 태어났다. 박목월의 본명은 영종이다. 그는 1915년 1월 6일, 경상북도 경주군 서면 모량리 571번지에서 아버지 박준필과 어머니 박인재 사이의 2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준필은 당시 경주군 수리조합(지금의 토지개량조합)의 이사였고, 대구로 나가 중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유지였다. 어머니 박인재는 목월이 보통학교 4학년 되던 해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머니의 신앙은 이후 목월의 정서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목월의 할아버지인 박훈식은 개화의식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개화의식은 목월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목월은 10리 길을 걸어 건천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졸업한 뒤 금융조합에 취직했다. 건천읍내 모량초등학교 바로 옆길로 우회전해 들어가면 목월의 생가다.1980년초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토담집 생가는 헐리고 새집이 들어서 이제 목월과는 무관한 집이 돼 버렸다. 정지용이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 했건만 목월의 생가 보존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 그리된 것이다. 마을 주변은 목월의 서정을 풍부하게 키워주었던 선도산이며 단석산은 아직 그대로 있다. 지금은 보리밭으로 변했지만 목월의 생가 주변은 밀밭 천지였고, 목월에게 밀밭은 사색의 공간이었다. 경주시내를 끼고 흐르는 형산강의 상류지역인 강나루는 아직 얕고 푸른 강물이 흐른다. 목월의 시 ‘나그네’가 이곳에서 탄생했다.〈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언제 읊어도 정겨운 시다.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후, 한국시의 중흥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시인협회 세미나’와 전문시지『심상』의 창간 등이다. 한국시인협회 세미나는 전국에 흩어져 작품 활동을 하는 시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친교를 돈독히 하고, 숙식을 함께하며 한국시의 제반 문제를 논의하는 중요한 시단 행사로, 박목월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현재까지 매년 개최되고 있다. 나는 한국시인협회 회원이다. 그래서 박목월 시인은 내게 더욱 정겨웠다. 그는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에서 돌아온 박목월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누웠다가 64세를 일기로 지극히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역시 경주가 고향인 동리는 젊은 날 목월의 문학 선배이며 문학친구다. 김동리(1913~1995)는 1~10살까지는 고독이 무서운 아이였다. 어머니가 42세 때 얻은 막내였다. 먹을 젖이 부족했던 아이는 아버지가 드시고 난 술대접에 손을 대기 시 작했다. 그것이 3세 때부터 술을 마시게 된 동기였다. 6세 때는 「내가 달라면 주고 때리면 맞아주었던」소꿉친구인 선이를 잃은 충격으로, 평생 죽음이란 명제를 화두로 삼게 되었다. 우울하고 병약했던 소년 동리는 계절마다 이유없이 앓아누웠고, 혼자서 산과 들을 배회했다. 그에게 외로운 「혼자」는 무서우면서도 오히려 본 향으로서의 자연과 합일하는 의식이었다. 33세 때 사천청년회 회장을 시작으로 한국청년문학가협회 회장, 한국문총 사무국장, 문교부 예술위원, 서울시 예술위원, 중앙대 예술대 학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일문화교류협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했다. 대구 계성중학 2학년 때 백형이 안진경법첩을 주고 운필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 뒤 다솔사에 묵고 있을 때 서예가 하동주 선생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동리의 서예삼매는 58세 이후 쭉 이어져 틈이 나는 대로 붓을 잡았다. 집안에는 항시 묵향이 감돌았다. 그는 1995년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관 건너편에 신라를 빛낸 인물을 전시한 전시관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