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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권(馬券)
유 항 림
시계를 들여다보는 척하면서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굴러가는 골프 알을 보고 동시에 무사히 넘어선 코스를 한 번 다시 훑어보며 회심의 웃음을 지어 웃는 상대자의 표정까지 곁눈질하고 그가 자기 편을 보기 전에 얼핏 시선을 시계 위로 떨어뜨렸다. 이것으로 삐삐골프 한 번 치는 사이에 세번째 시간을 보는 셈이다.
“저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바뻐서 껨 중도지만 실례하야겠는데 용서 하십 시요.”
“천만에요. 그리 바쁘지 않으면 같이 치시면 좋을 텐데…….”
“중도에 참 미안합니다. 다음에 또 짬이 있으면…….”
그 사이에 요금을 치르고 말을 끝까지 마치기 전에 총총걸음으로 달리듯이 골프장을 나왔다. 그런즉 어디로 갈까. 만성 (萬成)이는 아직도 바쁜 걸음을 늦잡지 않은 채 갈 곳을, 적어도 가도 좋을 곳을 찾느라기에 발보다도 머리가 분주히 돌아감을 느꼈다. 인제는 찾아갈 곳은 한 바퀴 돈 셈이고…… 옳지 도서관이 있지 않은가.
열람표를 사 쥐고 신관으로 가는 동안 삐삐골프장의 일이 생각났다. 게임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졌던 것이니까 미련이 있을 리 없고 시계를 두세 번 꺼내 보다가 바빠서 미안타고 중도에 나오고 보니 자기를 한가해서 견디지 못해하는 사람으로는 보지 않을 것이다. 그만하면 거기서는 성공이다.
“네?”
신 맡는 사람은 자기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았던지 신장에서 얼굴을 돌리며 따진다.
“아니 혼잣말이외다.”
신문실로 들어서니 담뱃내가 자욱한데 칠팔 명 둘러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남은 것이라고는 지방신문밖에 없다. 하는 수 없이 후꾸오까일보(福岡日報)를 들고 그 읽기도 싫은 기사 위로 넘겨다 열람자의 종류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바로 도어 안편 의자에 깊이 앉아서 신문을 들고 읽는 삼십 내외의 쯔메에리*와 그 맞은편에 한 손으로 턱을 고이고 읽고 있는 이 또한 삼십 가까운 쯔메에리와 그 앞자리의 한복은 분명히 신문이 읽고 싶어서가 아니고 공부하다가 담배가 먹고 싶어 내려왔어도 그 시간을 이용하려고 그러는 모양이다. 담배 빠는 데만 온 정신이 팔려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반대로 만성의 바른편에 앉은 작자는 연재소설을 읽느라고 불 꺼진 마코*를 성급히 빨다가 다시 성냥을 그어댄다. 그때 만성은 자기 왼편에 있는 중학생에게 주의가 끌리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뒤에서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손에 못인지 펜끝인지 뾰족한 것을 쥐고 우정* 가린 신문지 아래로 삽화를 따내서는 남모르게 포켓에 구겨 넣는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고 그때는 벌써 시침을 떼고 선 채 신문을 읽고 있는 만성의 뜻하지 않았던 존재에 저 혼자 열쩍어하며 신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나가버린다. 그 틈에 얼핏 신문을 바꾸고 그 자리에 앉아서 가장 긴급하게 참작하여야 할 기사나 찾는 사람과 같이 기사는 채 읽지도 않고 제목만 눈을 스쳐가며 한장 두장 넘기다가 양덕읍내 전화 개통이라든가 최모가 어느 사립학교에 200원 기부라든가 하는 종류의 대수롭지 않은 곳에 잠시 눈을 멈추었다가는 다시 넘긴다. 그러나 기실은 몇 곳이나 오려 갔는지 헤보는 데 약간의 흥미를 가지고 여섯 곳을 찾아냈을 뿐이다. 위로 올라가 책을 청하려고 보니 무슨 책을 택할는지 카드를 뒤져야겠으나 그것은 갔어도 좋을 곳을 찾는데 버금가게 있음직하고도 없는 것을 찾는 어려운 일이다. 우선 월간
잡지 한 권을 적었다. 그러나 잡지 한 권만 찾아들고 어슬렁어슬렁 자리를 찾아가는 양은 아무래도 한가한 사람으로 뵐 것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하는 수 없이 카드함을 열려고 하는데 변호사 시험 공부를 한다는 풋낯*이나 알던 사람이 열람실에서 나오다가 인사를 한다. 긴급히 읽고 싶은 것이 없고 따라서 책 선택에 망설이는 자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문득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는 게 사 읽고 남은 『세스또프* 선집』 이었다. 관원은 열람표를 받아 들고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책의 번호도 기입하지 않았고 성명도 쓰지 않았다고 퉁명스런 손세*로 돌려준다. 조금 불쾌할 수밖에 없었으나 바빠서 잊어버린 듯이 웃으며 머리를 벅벅 굵고 아무렇게나 이름을 갈겨썼다. 직업은 무어랄까 회사원은 이 시간에 올 것 같지 않고 예술가라고는 객쩍은 일이려니와 한가한 백성이고 상업은 싫고 학생은 아니고 기타라는 것은 더 가림이고·…… 종시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 책이 있기나 한가고 의심하면서 책 번호를 찾는 틈틈이 아까의 그 사나이를 살핀다. 변호사 시험 준비에 그야말로 침식을 잊는다던 그는 공부하느라고 얼굴이라도 조금 수척했음직한 일이건만 양대 같이 흠썩하다.* 개기름이 번지르한 얼굴에는 때 아닌 여드름까지 퍼릇퍼릇해 가지고 소설 부문을 뒤지었다 의학 부문의 카드를 뒤척였다 하다가 『나체미술전집』 한 권을 적는 모양이다. 만성의 책도 요행히 있어서 번호를 써 냈다.
책을 받아들고 자리를 찾아 앉으니 주위에 빽빽이 찬 군중은 정숙에도 불구하고 상념을 간섭하여 마음을 가다듬을 길 없다. 잡지의 창작란을 펴놓았지만 각별히 읽고 싶은 글도 실린 것 같지 않다. 첫머리의 몇 줄씩 읽다가 밀어놓고 『셰스또프 선집』을 되는대로 들춰놓았다. 앞 책상에서는 중학생들이 하던 공부는 집어치우고 산부인과 책을 얻어다 펴놓고 서로 쿡쿡 찌르며 소리를 죽여 웃고 있다. 그 사이에 졸음이 온다.
여기서 졸면 그건 정 창피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포켓을 뒤지어 휴지 겸으로 넣어두었던 원고지를 꺼내놓고 가장 긴급한 것이나 같
이 엄숙한 표정으로 적는다.
“이 이 (二二)는 사(四)는 사(死) 의 처음이다.”
그 아래 난잡한 글씨로
“그리고 이이(二二)는 오(五)는 발광의 처음이다. 사(死)가 생 (生), 생이 사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건 셰스또프 너의 고백이다. 산 보람이 없는 생, 발광에만 전도가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고백이 또한 그렇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다시 졸리기 전에 곧 거기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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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은 일기를 쓰고 자려고 일기장을 펴놓고 하루 지낸 일을 회상하면서 앞에 쓰인 생활을 한 번 다시 들여다본다.
9월 12일. 낮잠을 자고 있노라니 아버지가 들어와 깨우며 사람이 그렇게 먼숭먼숭 놀기만 하면 못쓴다고 훈계한다. 언제는 한다고 야단, 이제는 안한다고 걱정. 그리고는 죽은 사람만 언제까지 생각지 말고 좋은 자리 있을 때 장가를 들라는 으레 나올 줄 각오했던 그 이야기다. 죽은 처를 못 잊어 재혼하지 않는다고는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편리하고 감사할 일이다. 죽은 처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범속(汎俗)의 가정을 가지고 간 것을 감사하는 나이다. 창세와 두어 시간 가까이 골프를 쳤다.
9월 23일. 우정* 아버지 보도록 『육법전서』와 『법학통론』과 『취미의 법률』을 가지고 들어갈 때 그의 기뻐함! 책은 종서에게서 얻어온 것이고 책값으로 타낸 10원은 술값으로. 종서는 술 먹으면서도 ‘그레이트 앰비션’ *만은 잃지 않아야 한다고 하던가. 만세! 박수! 만만세.
9월 28일. 또 낮잠. 하품. 글 몇 줄. 거리로―
9월 29일. 또 그렇게.
9월 50일. 또.
10월 1일. 또.
10월 2일. 또. ‘또’가 거듭되니 분주한 것 같아도 보인다.
(자유 일기라 한 페이지에 5일간의 일기를 쓰고는 하루도 빼논 일 없던 일기를 나흘 동안이나 쓰지 않았다.)
10월 7일. 허무의 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자기의 일이다. 무위의 생활을 하는 것같이 보임은 세상에 대한 자기의 일이다. 무위의 생활로 보이는 때문에 나의 생활이 더욱 무위하게 되는 것 아닌가. 남이 뭐라든 나는 나대로 줏대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이 있었을 때는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용허할 여유가 있는가, 분주한 척한다고 남을 속이는 짓은 결코 아니다. 나를 특별히 한가한 인종으로 차별하기를 중지함은 공평한 일이고 또 나의 당연한 요구다. 주의 (1) 큰 거리로 여럿이 짝지어 다니지 않을 것. (2) 걸음발 빨리 할 것. (3) 할 것이 없으면 위선* 그리 반갑지도 않고 만나야 할 일도 없는 동무들이라도 차례로 한 번씩 찾아감도 무방. (4) 단, 한 시간 이상의 장좌(長坐)*는 금물(禁物).
(그 후 며칠 동안 갑자기 일기가 길어지고 기억나는 것의 친지를 방문하느라고 일없이 분주하던 일을 적은 것이 있었으나 그것은 읽지 않고 만성은 오늘 일기를 만들려고 붓을 들었다.)
10월 14일. 아침 잠이 늦다고 대장이 화를 낸다. 예의 하루 벽두의 조그만 사건이다. 기림리로 A를 찾아갔다. A는 맞은편 집 앞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그의 고무신 가게로 가서 30분 동안 앉아 있었다. 기림리서 전차로 황금정까지. 버스 노리까에.* P를 찾아갔다. 스끼야끼*집도 술장사라고 정오가 넘었는데도 아직 안 일어났다. 오래간만이라고 같이 술잔이나 하자는 것을 분주타고 나와버렸다. 삐삐골프장은 한가한 인종의 장터다. 졌다고 등 달아할* 필요야 없겠지. 도서관에 들러 셰스또프를 복습. 밤― 창세와 종서가 집으로 찾아왔다. 같이 정섭의 집으로 갔다. 댓 살 맏이이고 문단에 이름이 조금 팔리었다고 우리들보다 퍽 어른다운 척한다. 또 어른답기도 하다. 나보다 우리 대장이 어른답듯. 찾아갈 곳이 벌써 없어졌다. 다음부터는 오늘 정섭의 집에서 예술은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함인가 하는 것으로 말한 것과 같이 되도록 큰 문제를 내걸고 논쟁해보는 것도 좋다. 마음만은 분주할 것이고 무엇보다 일기의 내용이 풍부해진다. 문제 (1) 행복이란 무엇인가. (2) 무엇 때문에 사는가. (3) 죽음이 두려운가. (4) 종교는 과연 아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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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므로 종서를 찾아가지고 창세의 집으로 갔다. 금방 읽다가 그대로 책상 위에 펴논 책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만성은 무슨 책인가 묻는다. 창세는 그 말에는 대답지 않고
“사는 것은 수평적 타락이다.” *
하며 혼잣말같이 중얼거리었다.
“누구의 말이가, 네 말이가.”
“아니.”
“누군지 우리보다 별로 잘난 놈도 아닌 모양인데…….”
“왜? 장 꼭또*의 말이다.”
만성은 방석을 엎어 베고 길게 누우며 연극 대사 읽듯이 그 말을 한 번 받아 외었다. 종서는 옆에 누운 그의 허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수평적 타락이라니.”
“글자 뜻대로지 별것 있나.”
그 사이에 만성은 자기의 일기, 더욱이 어제·일기를 생각하고
“그거야 생의 의의란 것과 연결되는 말이겠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물을 때 그 목적 이 없는 사람의 생활을 말함이겠지.”
“아니, 그 목적에 대한 회의도 될걸.”
종서는 동무들의 허무적으로―그의 생각으로서는―흘러가는 경향을 막아보려고 힘썼고 지금도 그들의 말이 몹시 합당치 못하게 들리었기 때문에 별로 홍미가 없는 듯이 잠자코 그도 눔고 말았지만 그것은 반박을 강조한 제스처였다. 그런 때는 으레 무관심한 척하는 태도를 짓고 있다가도 자기 생각만 수습되면 돌연 공세로 나서는 그의 솜씨를 짐작하고 만성은 은근히 그의 말을 꾀듯이 “죽고 싶은가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만 기계가 되겠는가 묻는데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과연 종서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굵은 눈썹을 움칫하고 언제나 의지를 두 입술로 물듯이 꼭 다물고 다니던 입술에 힘을 주는 듯한 어조로 공세의 제일탄을 던지었다.
“그렇지만 자살하는 사람보다 기계가 돼서라도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그렇기에.”
창세는 입으로 가져가던 담배를 성급히 비벼 끈다.
“사는 것은 수평적 타락이라고 하는 말이다. 기계가 돼서야 멀 하러 살겠나 말이다.”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사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 가운데 사람이 있지 않을까. 죽음은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끝이 아닐까.”
“무섭게 운명적인데! 사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고는 무서운 일이다.”
하고 과장의 한숨까지 짓는다.
“장 꼭또 자신도 살어 있는 한 어떻게 살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어있다. 죽음이란 생물학적 사실이 있을 뿐이다. 죽음을 사상한다는* 것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사상은 어떻게 살까 하는 절박한 문제에서 도피 할려는 어 리석은 수단이다.”
“그건 상식이다.”
그 상식을 향해 던지듯이 불 꺼진 담배를 힘 있게 메치면서
“피치 못할 엄숙한 죽음의 문제에서부터 눈을 가리우는 것 이다.”
만성도 일어나 앉아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같이 침까지 삼키며 듣고 있다.
“죽음 없이 생의 가치를 어떻게 증명 한단 말이가. 아모리 비열하고 초라한 생활이라도 네 말대로 하면 훌륭하다. 생물학적으로 살어 있으니까. 죽음을 생각지 않고 어떻게 사니.”
“그럼 생의 자극으로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너는 왜 자기 생각에서 한 발자국 내딛기를 그렇게 무서워하니.”
하고 만성은 또 한마디 던지듯이 뱉어놓고 눕는다. 종서는 맥 풀린 눈으로 만성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가 경계하던 동무들보다도 절망과 슬픔이 가득 찬 표정이라고 만성은 마주 쳐다보며 생각했다:
“너는 언제나 어떻게 살까 하는 걸 말하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니가.”
“어떻게도 할 수 없어 보이는 현실을 어떻게 해볼래는 것이 인간이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을 아직도 자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너다운 곳이다.”
이때 창밖에서 기침 소리가 나고 곤색 신사 양복을 단정히 입은 사나이가 들어왔다. 창세의 팔촌 형뻘 되고 만성이나 종서와도 낯이 있는 태흥이다. 창세는 그 의외의 침입자가 없었더면 좀더 열변을 토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만 멋쩍게 입을 다물고 입에 발린 수인사*나마 대답할 줄을 모른다. 좁은 방 안에 넷이 들어앉으니까 가득 차지만 말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조용할 수밖에 없다. 수작에 쏠리어 잊었던 담배들을 일제히 꺼내 문다. 방 안은 순식간에 눈이 아리도록 연기가 가득 찬다. 태홍이는 바로 문 안에 앉은 창세더러 문을 열어놓으라고 한다. 종서는 만성과 마주 보고 왜 웃느냐고 물으면서 자기도 따라
웃는다. 따라 웃는 그는 이유도 없이 반사적으로 그랬지만 만성이가 웃기는, K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사(理事) 견습을 마치고 처음으로 이곳 금융조합에 부이사로 부임되어 온 이 점잖은 신사가 만일 조금 전에 우리들이 지껄일 때 밖에서 듣고 있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가, 할 것 없는 사람들의 탁상공론이라고 비웃었을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제각기 딴생각을 하느라고 말도 없이 눈만 멀찐멀찐하는* 세 얼굴을 둘러보니 자연 실없는 웃음이 새 나왔던 것이다.
어석버석한 침묵에서 한두 마디 말이 시작되자 식은(殖銀)*의 초급이 얼마고 사택료와 보너스가 얼마고 누구누구는 판임관* 몇 급인데 월급이 얼마라는 종류의 세상 물정을 소개하는 태홍의 혼잣말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금융조합 이사의 월급은 얼마며 판임관 몇 급의 것과 같느냐곤 묻는 만성의 물음에는 당장에 주저치 않고 가르쳐준다. 만성은 종서를 보며 또 웃고는 기침으로 웃음을 감추며 열려진 문 사이로 가래를 뱉고 문을 닫았다.
다시 금융조합 마크 설명으로부터 자력갱생이니 농촌진흥이니 하는 동안에 서향 방 안은 벌써 불 켜지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각기 집으로 가려고 나오는데 창세는 뒤떨어져 나오는 만성에게 귓속말로
“태흥이 작자 요즘 색시 선보레 단기노라고 분주한 모양이다. 오늘도 하나쯤은 보고 왔을걸.”
하며 웃는다.
그날 밤 만성과 창세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영사중에 정전으로 하는 수 없이 그곳을 나왔다.
창세는 들으란 속이겠지만 누구를 향해서 하는 말도 아닌 것같이 글 읽듯이
“순수한 밤이다. 별도 없고 달도 없고. 전등이 켜지면 무어든지 뵐 것 같지만 진열장이 뵈고 계집이 뵐 뿐이지 그 우에 무엇이 뵈는가.”
만성은 또 시작했다고 대꾸를 놓으려다가 일일이 반대하기도 어리석어 보여서 묻는 말도 아니니 못 들은 척하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휘파람을 불면서 조금 떨어져 걷고 있었다.
그들의 의견이 맞는 일은 극히 드물다. 종서를 상대로 할 때는 그의 이론에 입각한 자신(自信)에 반항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며 회의의 파문을 던지려고 겨뤘고 따라서 창세와도 마음이 맞지만 창세만을 대할 때는 종서와의 경우보다도 위험한 폭발성을 언제나 느끼는 것이었다.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은가.
등불에 어렴풋이 보이는 게시판 앞에 멈칫 섰다.
“그건 좀 재미나는 일인데.”
창세는 자기 말이 재미난다는 줄 알았던지
“재미날 일이 아니네……”
“아니 저것 좀 보게. 장진강 발전소의 고장이라니까 오랫동안 정전될 모양인데 일요일이니까 혜경이가 종서네 집에 찾어오지 않었겠니. 불이 껌벅하고 꺼질 때 어드랬을까. 가서 몰래 들여다볼까.”
“건 머라고.”
어두운 길을 우정* 종서의 집까지 더듬어 와보니 요행히 대문이 열려 있다. 어둠에 삼키듯이 두 그림자는 소리도 없이 문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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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만성의 말과 같이 그때 방 안에는 단둘밖에 없었다. 갑자기 전등이 꺼지자 서로의 호흡까지 들리는 아질아질한 침묵 속에서 혜경을 껴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여전히 떨어져 앉아 있는 것이 착각이 아닌가고 의심하여 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종서는 태연히 일어나 성냥불로 초 한 자루를 얻어다 불을 켜놓았다. 그러고는 혜경의 편을 될 수 있으면 보지 않도록 남실거리는 촛불을 들여다보며
“그래서 어떻게 됐소.”
하고 중단되었던 이야기를 계속토록 재촉한다. 그것은 그 뒤를 듣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고 딴생각의 알리바이에 지나지 못하는 뜻 없는 목소리라고 해서 좋을 것이다.
벽력― 벽력이라고 할 만한 일이 아닌가. 그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달시키려는 듯이 둘이서 직각으로 주시하던 촛불이 별안간 꺼질 듯이 너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서는 늙은 아낙네를 비추어냈다. 동시에 움칠 놀라는 그들을 추궁하는 말이 뜨겁게 얼굴을 향하여 떨어졌다.
“너희들 어두운 데서 멋 하고 있니.”
그래도 자기의 마련 없음˙을 깨달았는지
“어머니는 어데 가셌니.”
하고 화제를 돌린다.
그는 메피스토*도 요파*도 아니고 몇 집 건너 사는 길수 어머니였다.
촛불은 붓끝 같은 화심을 다시 모아 가는 연기를 내두르고 있다. 종서는 얼굴을 붉힌 채 예배당에 가셨다고 촛불을 향하여 대답한다. 그때 목소리는 그답지도 않게 떨리었다. 4년을 두고 사랑해오는, 그리고 혼자 계신 어머니도 묵인하고 일요일이면 그들을 위해서 밤 예배가 끝난 뒤에도 반드시 어데 들렀다가 열시 지나서야 돌아오는 사이의 혜경을 상대로 어둠이 가져오는 충동을 누르고 그런 체 없이 자연스런 동작을 가질 수 있는 게 그의 노력의 한계가 아닌가. 길수 어머니의 출현은 벽력에 틀림없다.
길수 어머니는 들어앉을 마음도 뒤를 이을 적당한 말도 없었던지 혹은 사태를 짐작하고 한턱 내는 솜씨로 자리를 틔워주려는 셈 인지
“불 꺼진 때도 퍽으나 오랬지.”
하며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가버린다.
혜경도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덤비는 빛도 보이지 않고 돌아갔다. 종서는 대문까지 따라나왔다. 그러나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구듯발 소리가 동무들의 것인 줄은 알 길 없었다.
종서는 그 밤을 새워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도 날이 밝고 그가 봉직하고 있는 S상회의 탁자에 앉아서 장부를 펴놓았을 때는 그런 체 없이 붓대를 놀리고 있었다. 한고비 분주한 시간이 지나고 사무에 피곤함을 느끼자 머리가 무거워지며 꺼질 듯이 졸리어서 바람이라도 쏘일 작정으로 길가로 나왔다. 저편에서 만성이가 바쁜 걸음으로 오는 것이 보인다.
“어델 갔댔나.”
“양복점에. 오늘내일 하면서 언제 돼야지.”
“외투……”
“응.”
만성은 버룩버룩* 웃으며 곁으로 가까이 와서
“어젯밤에 어떻게 됐니.”
“무어가.”
“정전됐을 때 창세하고 너희 집 갔댔다. 딜여다볼래는데 너희들 나오는 바람에 도망해버리고 말었다. 그래도 시침 따겠니.”
“그따위 실없은 수작은 두었다 해라.”
다시 분주히 걸어가는 만성의 뒷모양은 자기를 조롱하느라고 어기적거리는 것같이 종서에게는 보이었다. 실없는 억측으로 자기를 놀려먹으려는 그를 아무리 친한 동무 사이라 하더라도 요강에 물 떠먹은 것같이 꺼림칙해서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불 꺼지었다고 어떻게 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냉정한 마음으로 해결하려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불이 꺼지었다는 우연에 맡기어 될 대로 되어버린다고는 너무나 통속소설적이고 우연에 대한 인간의 패배이고 이지(理智) 에 대한 본능의 승리다.
이런 생각에 해를 지우고 저녁 전에 한잠 자리라고 큰마음 먹고 총총히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에서 밥 짓는 어머니와 이야기하며 벽 문턱에 섰던 길수 어머니는 부엌문에 기대었던 몸을 돌이켜 들어오는 종서를 향하여 능측스런* 웃음을 웃는다. 시침을 떼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구두를 벗는데
“너 장가가라고 왔다.”
“흥.”
돌아보지도 않고 방문을 열어 잡는 그를 붙잡듯이 말을 계속한다.
“내 말 좀 들어라. 방금 그 말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 혜경이 어머니를 길에서 만났댔는데 지금 차에서 내리는 길이라며 며칠 묵어가겠다드라. 기회가 마츰 좋은데 이번에는 혼인말을 내서 어떻게 하야지 않겠니.”
“그런 말씀 마시소. 결혼이 다 무어요.”
“그런 일이야 없을 줄 믿지만 젊은 아이들의 일이라 혹시 잘못될지도 알간.”
“그런 일이 있다고 하는 말씀이요, 없다고 하는 말씀이요.”
그제야 아무 말 없던 어머니가 부지깽이를 든 채 부엌문으로 내다보며 타이른다.
“그게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렇게 말하는 법이 아니란다. 싫으면 싫다고 하지.”
“싫기는 머이 싫어. 공연히 그러는 게지. 넌 가만있으렴. 어른들이 어련히 좋게 처리하지 않으리.”
그는 무엇이 우스운지 깔깔 웃는다. 어머니도 따라 웃는다. 그 이상 문답할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 큰대자로 누웠다. 어머니가 뭐라고 했는지
“그렇다고 팔십까지 총각으로 둬두겠나. 좌우간 언제 한번 찾어가겠다고 말해두었습메니.”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귓속말로 하려는 속이겠지만
“내일 내 가볼게. 그런 줄만 알지.”
하는 말이 기울이는 줄도 모르게 기울이고 있는 종서의 귀에까지 똑똑히 들린다. 일어나 부엌 샛문을 열어 잡았다.
“제발 가느니 어드르니 하지 마시고 내 말 들으시소. 그건 뭘 창피스레 가시 겠소. 누가 25원짜리 월급쟁이한테 딸 주갔댑디까.”
“왜! 가문이 남만 못하나, 인물이 빠지나. 단지 돈 한 가지 없지만 당자가 좋다면 그만 아니냐. 아주 쉬 어제만 해도 그런 마음 없는 년이면 불 꺼진 방 안에 남의 총각과 멋 하레 앉어 있겠니. 내가 그만 눈치 없을 줄 아니. 그래 봬도 다 알고 있단다. 그리고 넌 굿이나 받아 떡이나 먹으려무나.”
어처구니없어서 문을 닫고 도로 누웠다. 이번에는 정작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모양이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기어이 거기 갈 것이 분명하므로 다시 방문을 열어 잡고
“이건 내 위신에도 상관되는 일이니까 간다 치드래도 며칠, 한 댓새 기다려 가기로 하시소.”
하는 말을 남겨놓고 자기 어머니만은 자기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 믿고 대답도 듣기 전에 쾅 하고 요란스러이 문을 닫아버리었다. 어제의 오늘인 만큼 갑자기 혼인말을 낸다면 혜경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불안에 마음이 초조했다. 행복을 보장할 수 없는 결혼이고 무엇보다도 어제 일로 해서 별안간 혼인말을 내고 사람을 보낸 것같이 보일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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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은 양복값으로 90원을 타냈다. 얼마만한 잔용돈 같으면 뭐라고 군말을 하려다가도 두말없이 주는 것이지만 맞추겠다고 탐탁히 의논한 일도 없는 양복값을 90원 돈이나 졸지에 내라니까 어이가 없는지
“90환!”
하고 입을 딱 벌린 채 뒷말이 없다. 그러나 언젠가 “양복이 못 입게 됐어요” 할 제도 “응” 하고 대답했고, “양복을 한 벌 해야겠어요” 할 제도 “응” 하고 승낙한 일은 있었으므로 그것을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잡짓에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의복값이라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소절수장(小切手帳)*을 금고에서 꺼내면서도
“90이면 양복값이 너머 대단하구나, 그렇게 올랐니.”
하고 다시 묻지 않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외투도 했으니까요.”
“글쎄, 그러면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소절수를 써서 건넨다. 그래도 아쉬 운지
“너 외투는 있지 않니.”
하고 묻는다.
“못 입게 됐어요.”
돈을 받아 쥔 이상 차언피언할* 게 아니라고 돌아서 나가는 아들의 뒷모양을 내다보며 의아스러운 듯이
“그것이 벌써 못 입게 됐겠다. 재작년에 한 것이 벌써.”
하고는 10여 년 동안을 입고도 아직 몇 해는 넉넉히 수명이 있는 자기의 덧저고리를 들여다본다. 소절수장을 덮어서 금고에 넣는 길에 금고 속에서 몇십 년 동안이나 쓴 것인지 칼날이 칠분* 이상 닳아서 보기에도 흉측스레 된 면도를 껴내 쥐고 거울을, 이것도 면도와 동년대의 것인지 뒷면 수은(水銀)이 군데군데 얽고 농이*로 동여매고 한 거울을 들여다보며 또 중얼거린다.
“자식이 아니면 누가 그 꼴을 본담.”
그러나 만성이가 중학교 4학년 때 독서횐가 하는 것으로 검사국으로 넘어갔다가 요행히 기소유예*로 석방한다며 부형이라고 불러다 놓고 주의시키던 말 가운데,
“계모라고 하는데 사이가 어떻소. 흔히 이런 일에 참여하는 젊은 사람은 가정이 불행한 사람인 줄 명심 하고 알아채리야 하오.”
하던 검사의 말을 생각하니 역시 옷값 같은 것은 요구하는 대로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보나 자기가 그렇게 한 닢 돈에도 구들거리면서도 아들이 청구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은 마음을 알아줄까, 또 저것이 재산을 물려주면 며칠이나 딩길까* 하는 안타까움아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한숨에 안개 지어 사라진다. 그는 그만 거울을 스치려고도 하지 않고 면도를 꽁꽁 싸서 다시 금고에 넣고 쇠를 잠근 다음에 거리로 나와 심심풀이 하기에는 십상인 박참봉네 싸전방*에 들어앉았다. 행길*에 오고 가는 사람들을 내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은 모처럼 마음이 행길에 쏠리지 않았다.
두어 시간 가까이 지나가고 그것도 단념하려고 하는데 행길에서 낯익은 만성이 음성이 들린다.
“응, 저금할려고 금융조합엘 가든 길이네. 그런데 어떻게 지금 나왔나. 몸이 편치 못해서…… 그래도 시험 때는 들어가지? 요즘은 조금 바뻐서…… 짬 있으면 또 만나세.”
집 안에서 아버지가 내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만성은 바로 그 앞까지 와서 발을 멈추고
“진규!”
하고 돌아다보다가
“아니, 다음에 만나서 말하지.”
하고 걸어가버린다. 그놈이 저금은 무슨 저금을 하고 바쁘긴 무엇이 바쁘댄다노 하고 의심하면서 우정 길로 나와 뒷모양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생각지도 못하고 만성은 자기의 말대로 N금융조합으로 들어갔다.
은행에서 소절수를 바꾸느라고 기다리는 사이에 문득 생각난 것은 어렸을 적의 은행 놀이란 것이었다. 지전을 만들어 저금하고 찾아내고 하며 놀던. 거기서 힌트를 얻어 특별당좌예금에 50원을 저금하고 N금융조합에 또 저금하려고 그리로 가던 길에 진규를 만났고 그의 아버지도 그를 보았던 것이다. 금융조합에 20원을 처음으로 저금하고 그길로 우편소로 가서 20원을 저금하고 새 통장을 받아냈다. 이렇게 90원을 세 곳에 넣어놓았다.
그 이튿날은 금융조합과 우편소에서 10원씩 꺼내다 은행에 저금한다. 또 그 이튿날은 은행에서 60원을 찾아 내다 우편소와 금융조합에 저금한다. 늦잠을 자고 나서 그 세 곳을 다녀오면 비용 드는 일도 없이 하루해가 곧잘 지나갔다: 따라서 양복을 다 지어놓고 기다릴 양복점에는 자연 발길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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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서는 저녁을 필하고 혜경을 찾아갈는지 그만둘는지 망셜이다가 어쨌든 집을 나가기로 했다. 화요일이니까 전 같으면 으레 혜경의 하숙을 찾아갔을 것이지만 그의 어머니가 왔다고 하니까 가서 좋을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길수 어머니가 가기 전에 혜경을 만나 미리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고 또 돌이켜 생각하면 부모께 감춰야 할 사이도 아니고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사이였다. 종서가 중학 5학년 때 외켠으로 일가뻘 되는 혜경이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종서의 집을 찾아와서 처음으로 그와 만났고 그 후로도 종서를 어떻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단조한 기숙사 생활에서 집 그리운 마음에 끌리어 친척집이라고 틈틈이 놀러 왔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종서는 시대의 거도(亘濤)*와 보조를 같이하는 세계관과 젊은 열정을 가지고 졸업 했건만 세상은 벌써 혼미한 적막이 있을 뿐이고 졸업 후로 미루었던 포부를 살릴 길 없는 현실에 부대끼고 이론으로서는 극복했다고 믿던 가정과 빵을 위하여 죽은 아버지의 친지를 찾아 25원의 초라한 밥자리*에 매달리었다. 그때 혜경은 이성(異性)으로서의 여자가 되었다. 이렇게 로맨틱한 아무것도 없이 그들의 산문적 로맨스가 시작되었다. 산문적이라고 한 것은 혜경에게서 이성을 본 당초부터 종서는 결혼을 생각했고,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연애를 인정치 않는 그로서는 경제적 보장이 없는 가정에 그를 맞아들일 자신이 없는 이상 적극적으로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조금 남기고 돌아가신 가산은 그동안 낀뽀비*해서 먹었고 지금은 집 한 채가 남았을 뿐이나 그도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그의 월급에 보태어야 겨우 생활해나가는 형편인데 만일 결혼한다면 어머니만 삯바느질하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삯바느질이라도 할 각오라고 저편에서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 이상 될 수 있으면
성을 초월한 그 무엇이라 설명해버리려는 노력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영리한 혜경이가 그런 마음속을 간파하지 못하리라고는 그도 생각지 않았다. 그 노력을 알아준다면 그만이었다. 처음부터 자기의 사랑을 그런 노력으로 감싸고 그 위에 그 사랑의 구조를 보이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상급학교 갈 수 있으면서도 졸업하자 전문학교 다니는 여자들의 젠척하는 꼴을 비웃으며 학교도 가지 않고 그의 아버지가 면장 노릇하는 S촌으로 가지도 않고 집의 반대도 무릅쓰고 설비가 불완전한 B유치원의 보모 자리를 얻어 기숙사에서 하숙으로 옮겨 앉은 것도 혜경이가 자기를 사랑하고 그대로 떨어지기를 싫어하는 증거라고 자신을 가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체 없이 좀더 친함을 보이려고 하거나 좀더 자주 만나기를 원하거나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한 주일에 한 번씩 판에 찍은 듯이 찾아오는 혜경의 이지적 거취는 더욱이 종서에게 무장한 것 같은 조심성스러움을 잊지 않도록 강제했던 것이다. 이러한 두 위신(威信)의 경주가 계속되는 사이에 혜경은 종서를 일요일에, 종서는 화요일에 각기 ‘방문’하는 습관이 생기고 알리지도 않은 창세와 만성도 어느새 눈치를 채었던 것이다.
지금 갑자기 사람을 보내어 혼인이니 무어니 한다면 여태껏의 주의와 긴장과 노력은 도리어 반대의 인상을 주는 데 효과 있을 것 아닌가. 결혼한다 치더라도 직접 만나 이야기해봐야 하겠구 결혼하지 않는 경우에는 더욱이 자기의 위신만은 건져내야 할 것이! 아닌가.
집을 나오려고 차리는데 마침 혜경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그는 문득 혜경이가 하숙에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고 곧 집을 나섰다.
긴급히 할 말이 있다고 혜경을 데리고 나와 조용한 M그릴 2층 한 모캥이*에 자리를 잡았다. 청한 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생각한다―— 홍분해서 떠벌리거나 혀가 굳어지거나 해도 창피한 일이고 말을 꺼내기가 거북해서 우물쭈물하는 것도 약점을 보이는 짓이니까 냉정히 그리고 물 마시듯 자연스러이 말을 시작해야 한다고.
“어제 상회서 집에 오니까 길수 어머니가 장가를 가라느니 중매를 한다느니 하기에 제발 빌고 막었지만……”
종서는 어떻게 말하려던 작정이었는지를 갑자기 잊어버리어 담배를 피워 물고 생각을 수습할 여유를 만들었다.
“그 수다스런 늙은이는 막는데도 집 어머니한테 찾어갈 모양입디다. 그렇게 되면 내가 우진* 보낸 것이나같이 기분 나쁜 일이 아니요?”
또 말이 막히었다.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들이빤다.
“물론 내 태도나 말하든 것을 보아서도 우진 보낸 것으로 생각지 않으리라고 믿소. 성격 같은 것은 나와 공통되는 곳이 많고 대체로 말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요. 그러나……”
또 담배를 들이빤다.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가 쿵쿵 나고 음식이 들어온다. 그것을 테이블에 벌여놓는 동안에 모았던 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이가 내려가자 자기의 명료치 못한 의견을 책하듯이 계속한다.
“반드시 결혼을 전데로 하는 것은 아니요. 결혼이나 연애를 전연 생각지도 않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말을 갑자기 하니까 불쾌하지 않소?”
하며 먹고 싶지는 않지만 흥분하기 때문에 못 먹는 것같이 보일까 하는 생각에 스푼을 들었다.
“아니요, 할 말이야 하야지요. 남들이 어떻게 보든지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도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연애나 결혼의 의사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바로 그것 말이요. 얼굴이나 보고 꽁무니를 따러다니며 죽느니 사느니 하는 그따위 축과 마찬가지로 볼래니 맹랑한 일이지요. 조금만 친한 걸 보면 덮어놓고 연에니 무어니 하고 공론을 하니…….”
“저보고도 너이 연인이 어쨌느니 무어가 어쨌느니 하며 막 놀려먹을려고 해요. 찍 해도 연˙애, 짹 해도 연애 하는 그런 철없는 애들은 모멸하지 않을래도 않을 수 있어야지요.”
“누가 그래요?”
“모두 그 모양이지요. P는 얼마 전에 날과* 연인의 이야기하라고 다자꾸* 조르다가 나는 연인이 없다고 하니까 결국은 자기 연인의 이야기를 하는데―누구라고 말하면 알겠지만― 열렬히 사랑한다고요. 그런데 본처가 있고 아들까지 있다고 고백을 하더래요. 그래도 서로 사랑을 배반할 수는 없다고 나종에는 눈물을 흘리고 야단이에요. 남과 말하라고 졸르드니 제 사정 말하고 싶어서 그러든 모양이에요. 생각하면 우서워 죽겠어요.”
종서는 그 말에 따라 모멸의 웃음을 웃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적지 않게 놀랐다. 마치 그들 어리석은 무리와 섞이지 않고 똑똑한 인간이 되려면 연애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율법이라도 있었던 듯싶이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혜경이가 냉정한 척한 태도로 종서의 ‘위신’ 위에 자기의 ‘위신’을 올려놓으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있을 종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곤! 원 누구가 장가를 가겠다며 중매를 해달라기에 그러는지…….”
“글쎄나 말이지요. 왔으면 콧방⁕을 맞힐걸. 호호. 우정과 연애는 딴것이 아네요? 그렇지 않어요?”
“나도 물론 결혼하자고 하드래도 단연 거절했을 것이요.”
누구든지 하나가 나는 그대를 끝없이 사랑하고 결혼해주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말을 어떻게 서투른 형식으로라도 밝히었다면 당장에 그리고 즐거이 몸을 그의 가슴에 던지거나 혹은 힘차게 끌어안을 만한 마음의 준비를 4년의 세월이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것을 합리화할 이론이 그들의 이지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 그것은 한갓 공상에 속한다.
“그런데 왜 도모지 먹지 않소.”
“방금 저녁을 먹었댔어요.”
종서는 배부른 때는 먹지 않는 것도 자연스런 일임을 새삼스러이 느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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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 왔댔나……”
은행에서 나오는 만성에게로 걸어오며 그를 퍽 찾아다니었었는지 만나기가 바쁘게 창세는 말을 꺼낸다.
“참말 놀랬다.”
“무슨 일이 있었나.”
“집에 곧 가야 하나.”
“아니 저금하려 왔댔지만 안 가도 좋네.”
창세는 골목으로 빠지어 강변으로 나가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야 태홍이 아니라도 떨지 않을 일인가. 미아이(見合)*만 하드래도 여자는 어쩔 줄 모르지 않겠나. 남자 편에서 그러드래도 모르겠는데 여자 편에서 사궤보고 마음을 작정하자고 하드래지. 그것도 그렇지만 집에서 나오는 길에 첫마디로 술 담배를 먹느냐 묻드래. 태흥이 작자는 참하게 뵐려고 안 먹는다고 하니까 손수 담배를 사주며 남자가 담배 못 먹어 어떻게 하는가고 하드래요.”
“혜경이가?”
“응, 그럭허구 돌아오는 길에 식당에 저녁 먹으러 들어갔을 제는 묻지도 않고 비루*˙를 시키어 주드래지. 작자가 조금 떤 모양이데.”
“흥 매우 모던인데.”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술 담배를 권할 만큼 새로운 타입의 여자인 척 하고 이성(異性)을 대해서 태연한 척하지만 어떻게 하면 차기의 새로운 것을 뵐까 해서 그래보는 것이지 정작 술 먹고 주정을 부레보지 머라나.”
“우진 파혼하도록 만들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그래 불량 소녀라지 않든가.”
“오늘 중매쟁이가 와서 색시네 집에서도 만족해하며 반허락이나 하는 모양이니까 이제는 본촌 아버지의 승낙만 있으면 되겠다고 기뻐만 하드라.”
“부잔가 태흥이네.”
“먹을 것이나 있지.”
“그러면 자기 손탁*에 마음대로 놀리리만큼 만만한가 시험 해보느라고 그랜 모양이다. 밥걱정이나 없고 넉넉히 남편의 코를 잡을 수 있어 보이는 데 시집가는 게 제라는 여자의 소위 이상(理想)이다. 초라한 이상이다. 새롭기는 무엇이 새로워. 안일한 생활을 구하는 사람이 위투러워서* 어떻게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겠나.”
“도모지 알 수 없는 일인데 좌우간 밤에 종서한테 물어보세.”
그렇게까지 취하지도 않았는데 창세의 음성은 너무 높다. 혜경의 약혼의 전말은 처음부터 그의 어머니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당연한 일이고 조금도 고통으로 생각지 않는다고 종서 자신이 태연한 일에 흥분하는 양이 만성에게는 우스웠다.
“흥분하잖어도 좋지 않나. 종서의 일이지 네가 당한 일은 아니니까.”
창세는 귀에 거슬리는지 한 번 돌아보고는 여전히 종서와 어깨를 겯듯이* 앞서 걷는다. 입은 다문 모양이다.
빈 전차가 시간 늦은 거리에 요란스런 소음을 널어놓으며 뒤로 물러간다.
좌우의 건물이 커서 그런 것도 아니련만 사람 없는 거리의 임자인 척 가슴을 벋치고 걸어가는 두 개의 뒷모양이 처마 끝에 어울리지도 않게 매달린 네온 아래로 끝없이 초라하게 보인다. 어수선한 적막이여.
또다시 계속되는 말다툼은 끄기를 잊고 가버린 네온보다도 머리에 어지럽다.
“그러면 날과 울란 말인가.”
“울 필요가 없단 말이겠지.”
“나는 연애지상주의자는 아니다.”
“물론 그렇다. 1에서 10까지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려다가 못된 무리들, 그것을 나무라는
속인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하는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무슨 잔말이 그리 많은가. 그리고 창세는 아버지의 악착스런 고리대금에 충고할 수 없던 밸부림*을 종서에게 하려는 셈 인가.
―열정 없는 청춘이여. 어둠을 탄식하는 개구리의 무리여. 높아진 종서의 목소리는 거리의 적막을 깊이 할 뿐이다.
“그것이 한 개의 포즈에 지나지 못하면 어떻다는 말인가. 가령 거세인 인간인 척, 강철의 인간인 척하지만 그것은 한 개의 포즈, 나약한 두부와 같이 나약한 자기를 감추고 자신을 속이는 포즈이라면 무엇이 옳은가. 내가 두부 같다면 더욱이 강철의 그릇이 필요하다.”
만성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간다. 꺼림 없이 지껄이는 말소리가 간신히 들린다.
어처구니없는 자식들, 두부와 같은 눅거리* 생활들. 자기는 두부와 같은 놈이라고 고함친다면 누구가 동정할 줄 아는가. 추태 자랑은 그만하면 족하지 않은가.
“자기를 속이고 어떻게 사니?”
“두부와 같다고 생각하고는 어떻게 사니? 자기를 나약한 인간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쉽다. 자기의 잘못은 전부 자기의 나약한 천성의 탓으로 미루고 힘든 일이면 피하기 십상 좋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짓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안일(安逸)을 구하는 게 양심의 명령인가.”
창세가 뒤를 이어 뭐라고 외치는 듯싶었으나 만성은 듣지 않고 요행히 골목을 만난 김에 동무들이 깨닫기 전에 그리로 달음질치면서 마음속으로는 고함지르고 있었다. 밤새도록이라도 지껄이라 개구리들!
자기를 속이고는 살지 못할 인간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큰 고함치면서도 살고 있는 인간이 있다. 자기의 무력을 알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살고 있는 인간은 너무나 많다. 생활의 궁핍은 이론에 배부르는 법은 없다. 그것은 궁핍의 생활에 자위(自慰)를 줄 수는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멀지 않아서 궁핍의 생활은 몸서리치지 않고는 견딜 수없이 된다. 이론의 마술성도 매력을 잃게 되는 때 그 이론 자체가 그 생활의 일 단면임을 알게 된다. 개구리와 같이 어둠을 탄식한다. 몸서리친다. 다시 자위의 방법을 찾는다. 일시적인 줄 알면서도 다른 마술에 매혹되고 만다.
형해(形骸)*의 생활에 이론은 처음부터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생의 문제다. 생의 칩거를 변명하려는 인간의 문제는 그 패러독시컬한* 매력으로 약간의 자위를 베풀어준다. 무의 형해를 분장하고 다른 그것과 자기의 그것을 구별하려고 한다.
아! 형해. 생활. 형해의 생활. 생활의 형해. 그것에 미련이 있는가, 애착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버릴 용기가 없는가. 용기란 무언가. 그것도 형해의 요소가 아닌가. 미련이 없고 애착이 없는 것을 버리는 데는 용기가 필요치 않다. 형해는 애착이나 미련의 상실과 동시에 버리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형해를 버린 다음에 붙잡는 그것이 또 다른 그것일 것이 두려운가.
개구리와 같이 어둠을 탄식하며 새벽을 맞고 다음 날의 탄식만을 위하여 아침 이슬을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가.
개구리의 불행은 오히려 가벼울는지도 모른다. 불행은 자각하는 때부터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는가.
꼭 자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만성은 수없이 자리를 뒤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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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만성은 일찍이 일어나 진규를 찾아가서 위병(胃病) 때문에 이번 학기에는 못 들어가겠다는 말을 듣고 사정을 말한 다음 C대학 학생증과 철도 할인권을 빌렸다. 그길로 은행과 금융조합과 우편소를 역방(歷訪)하고* 저금을 찾아냈다. 우정 세 곳에 널어논 장난이 긴급한 때에는 얼마나 시끄러운 일이 되는 것인가.
흐린 날에는 저녁이 이르다.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저녁상이 들어오고 있었다.
창세가 찾아왔댔다는 말을 듣고 저녁 뒤에 곧 그를 찾아갔었으나 어디론가 나간 뒤였다. 종서를 찾아갔다. 종서는 외투를 껴입고 나오며 묻는다.
“어제 어델 갔댔나.”
“……“
“한참 가다가 돌아보니까 없기에 찾노라고 둘이서 숱해 싸다녔다.”
“……”
“그럭허구 둘이서 술을 또 먹었다. 어제같이 취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
“창세가 취해가지구 다자꾸 울어서 난처 했댔다.”
대답도 없는데 혼자 말하기가 객쩍었던지 혹은 그런 만성의 태도에 성을 냈던지 종서는 말을 멈추고 찌풋한 얼굴로 걷는다. 그래도 조금 가다가
“바람세*가 비 올 것 같다.”
하고 말을 건네본다.
만성은 입을 열었다. 이때껏 다물고 있던 입하고는 가벼운 어조였다.
“나는 동경 갈랜다.”
“언제.”
“오늘 밤차로.”
“왜 그렇게 갑자기.”
“어젯밤에 벌써 작정 한 일이다.”
“이제 간대야 학교도 못 붙을 텐데.”
“붙는대도 학비를 보내주지 않을 게다.”
“그러면 멋 하레.”
“모르지. 여기 있어도 소용없으니까 간다.”
“그렇드래도 어떤 생활을 바란다는 것이야 있겠지. 지금따라 신문배달을 하고 싶어하지도 않겠고, 그렇다고 노동을 하고 육체노동 가운데 갱생(更生)의 길을 찾겠다는 쎈치*도 아니겠지.”
“왜 알지 못할 미래만을 묻나. 눈앞의 현재를 어떻게 할 소견인가. 생활을 잃은 형해를 버리는 데 미련이 있단 말인가.”
“그거야 추상적 이론으론 그럴 수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사실로선, 구체적 사실로선 한 개의 생활에서 그저 뛰어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한 개의 생활에서 다른 생활로 옮겨 앉든지 발전하든지 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러면 무너져가는 집 안에서 뛰여나오는 사람에게 나와서 거할 집을 미리 생각하고 나오라든지 나와도 거할 집이 없으니까 되루 들어가라고 할 작정 인가.”
“그런 응급을 요하는 경우와 네 경우와는 다르다.”
“과거를 청산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새로운 출발점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묻는 말이겠지. 그것도˙한 쩨네레이숀* 전의 일이다. 발전 가운데 과거를 청산하는 것은 내게는 유쾌한 고담소설*의 이야기에 지나지 못한다. 나는 단순히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 생활 의욕이나 이지적 판단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버린다면 자살이다. 나는 생활 없는 형해를 버릴 뿐이다. 이것으로 나를 좀더 발전시킬 수 있다면 횡재다, 다행이다. 또 그렇기를 바란다. 여기 통용치 못하는 루불* 지폐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마권(馬券)*을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도박이라고 위험하다고 할 수 있겠나. 나는 요행을 바라고 마권을 산 것이다.”
“통용 못할 루불로 단정한다는 것은 현실이 아니고 너의 주관이다. 곤란과 절망은 반드시 씨노님 *은 아니겠지.”
“너는 아직 루불 지폐를 금고에 넣어두고 재산으로 믿고 있다.”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주관에만 절망이 있다, 객관은 곤란할 따름이다. 사람은 가능한 문제만 제출한다. 인간의 문제는 가능한 문제다. 노력해도 얻는 것이 없을런지도 모르지만 그 노력이 어느 모멘트*에 달하면 소득이 있어진다. 그것이 말하자면 변증법이라겠지. 양으로부터 질에, 그것을 내게 아르켜준 사람이 바로 너겠다.”
“변증법은 네게 있어서는 한 개의 주관, 한 개의 희망이다. 어느 구체적 현실이 양에서 질로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곤란 가운데서도 노력이 어느 정도가 되면 소득이 있겠다는 희망이다.
창세는 절망에 빠지여 있다. 절망을 감각하고 절망을 부르짖는 가운데 일종의 안이한 쾌감을 찾는다. 그것에 빠지여서는 그것을 사유(思惟)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주관이 섞이지 않은 객관적 입장으로 현실을 봤다. 사유의 결과는 절망이다. 거기 비로소 맹렬한 주관의 활동이 시작된다. 절망의 힘이 생기는 것이다. 무소유자의 힘이 생기는 것이다. 너는 절망적 현실에서 눈을 가리우고 이론이란 장님의 지팽이만을 의지하고 걷고 있다. 어째서 눈을 뜨고 달음질칠래고는 하지않나.”
“이론이 장님의 지팡이라면 눈 뜨고 달음질치는 것은 꿈속의 일이겠지. 그리고 네가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고 절망이라고 생각했다는 데가 의심스럽다. 그때 과연 주관이 없었는지를 말이다. 처음부터 절망이라는 선입감을 가지고 사유를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네가 말하는 맹렬한 주관을 그 관찰에도 작용시키었더면 절망은 없었을 것이다.”
서로 할 말은 다 해놓고 가분가분한 발은 흥분에 상기된 머리를 조용히 옮기고 있었다. 그 머리를 식히려는 듯이 차가운 빗방울 몇이 떨어진다.
만성은 아까보다는 퍽 정다운 목소리로 변했다.
“솔직한 말이지만 나는 어젯밤에 너를, 너뿐 아니고 우리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가운데 너를 전적으로 경멸할 수 없는 것같이 생각됐다. 모두 개성의 문제같이 생각됐다. 이론 가운데 사는 보람이 있는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나는 거기서 내 결심을 새로이 굳게 할 필요를 느꼈다. 너는 혜경과의 경우에 이론을 몰랐다면 좀더인간미가 있는 인간이 됐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이론이 싫어졌다.”
만성이가 집에 들러 남모르게 트렁크를 가지고 역으로 나왔을 때는 초동(初冬)⁕의 비는 제법 좍좍 소리를 내서 퍼붓고 있었다.
“만성(萬成)이란 이름을 지을 적에는 만사성취(萬事成就)하라고 지은 것이겠지만 지금 보면 우스운 일이다. 창세(昌世)란 이름도 당치 않은 일이다. 네 이름만은 그럴듯할런지도 모르지만.”
이런 가벼운 농담을 하고 웃으며 만성은 기차에 올라탔다. 빗소리를 지우는 기적에 종서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사람을 보내고 난 플랫폼은 빗소리에 한층 더 적적했다. (어느 장편의 일부인 단편)
『단층』 1호(1937. 4)
a유항림(兪'恒林)은 191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7년 『단층』 창간흐에 「마권」을 발표
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이후 「구구(區區)」 「부호」 「농담」
둥의 소설과 「개성·작가·나」라는 평론 둥을 발표했다. 그는 작품들을 통해, 이성적이
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지식 인과 비이성 적 이지만 적극으로 행동하는 인간을 대비시키면
서, 역사적 방향을 상실한 시대에서 올바른 삶은 무엇인지 묻는다. 해방 후에는 「직맹반
장」 둥의 작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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