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은 엿가락,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25일 별세 최인호의 천주교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 화제
▲ 지난 2006년 정진석 추기경을 예방한 고 최인호 소설가 부부. © 천주교 서울대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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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타계한 소설가 최인호(1945-2013)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식지 ‘말씀의 이삭’에 쓴 투병기와 신앙이야기가 감동을 일으키며 화제가 되고 있다.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제가 쓰는 글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 달콤한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엿장수의 이름으로 바라나이다. 아멘."
최인호는 지난해 1월 1일부터 9주간, 그리고 7월 1일부터 9월 30까지 '서울주보'의 '말씀의 이삭' 코너에 암투병기를 연재했다. 죽음 앞에 선 두려움과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전한 것들이 사후 다시금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70-80년대 이념을 떠나 삶을 천착한 작가로 순수문학 진영이 그를 '호스티스 작가' '퇴폐주의 작가'로 낙인찍었으나 영원한 문학청년이었던 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상기한 '엿가락의 기도'는 1월 22일자 글이다.
그가 지난해 1월 암 투병 소식을 알리며 기고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육체의 고통보다 더 힘든 건 끊임없는 걱정과 두려움이었다."라는 고백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그는 2008년 침샘암 발병 후 줄곧 투병생활을 이어왔다.
그는 자신의 투병기를 '고통의 축제'라고 부르며 "고통의 피정 기간 동안 느꼈던 기쁨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주보의 지붕 위로 올라가 외치려고 합니다"라고 밝혔다.
1월29일 글에서는 "지금 이 순간 병상에 누워계신 환자 여러분, 바로 이곳에서 온갖 고통과 어려움으로 신음을 하고 있는 내 다정한 이웃 여러분.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죽일 병은 없습니다. 감히 바이러스가, 암세포가 사람을 죽이지는 못합니다"라면서 종교적 신념을 갖고 투병 중임을 알렸다.
이어 최인호는 "우리를 죽이는 것은 육체를 강한 무기로 삼고 있는 악입니다. 절망, 쾌락, 폭력, 중독, 부패, 전쟁, 탐욕, 거짓과 같은 어둠이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한꺼번에 죽이는 것입니다"라고 썼다.
2월5일 기고문에서 최인호는 "피하고 잊는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라며 고통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는 "우리가 겪는 이 들판에서 밤을 새우는 추위는, 이 병은, 이 슬픔과 고통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쁜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듣기 위한 특별한 은총이니, 지금 여기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일어섭시다"라고 했다.
2월12일 주보에서는 "5년에 걸친 투병생활 중에 제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글을 쓸 수 없는 허기였습니다"라며 "항암치료로 지칠 대로 지친 육체와 황폐한 정신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불가능한 희망이었습니다"라고 창작을 그리워했다.
그는 "저는 제가 작가가 아니라 환자라는 것이 제일 슬펐습니다. 저는 작가로 죽고 싶지, 환자로 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문학을 향한 꺼지지 않는 열망을 드러냈다.
2월19일 주보에서는 2011년 동리문학상을 수상한 장편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의 집필 배경을 공개하기도 했다. "2010년 10월 27일, 마침내 저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라며 "항암치료로 빠진 손톱에는 약방에서 고무 골무를 사다 끼우고, 빠진 발톱에는 테이프를 칭칭 감고 구역질이 날 때마다 얼음 조각을 씹으면서 미친 듯이 하루에 20에서 30매씩 하루도 빠지지 않고 원고를 썼습니다"라고 설명했다.
7월부터 재개한 연재에서는암 투병의 아픔을 신앙심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렸다.
29일자 주보에는 “3년 전 한참 고통스러웠을 때 성모병원 휴게실에 비치된 성경책을 들고 위로가 될 수 있는 한 구절을 발견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며 “기도 후 성경책을 펼쳤는데 ‘보라,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순간 시금치를 먹은 뽀빠이처럼 힘이 솟구쳤다”고 회상했다.
9월30일 마지막 기고문인 '말과 생각과 행위의 삼위일체'라는 제목의 글에서 중세 유럽의 대표적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한 삼위일체를 언급했다.
이 글에서는 "렌즈로 햇볕을 모아 초점을 맞추면 불꽃이 일어나 종이를 태울 수 있듯이 분열된 제 생각과 말과 행위를 오직 '사랑'의 초점으로 집중되어 불타오르게 하소서"라면서 "저의 말이 곧 저의 생각이며, 저의 생각이 곧 저의 행동이며, 저의 행동이 저의 말임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달려갈 수 있도록 주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종교적 바람을 밝혔다.
그러나 때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해 놓아 그의 종교적 성찰과 작가적 양심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했다.
1987년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가톨릭에 귀의한 그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가졌다. '말씀의 이삭'과는 인연이 깊다. 1993년 1월3일부터 1995년 12월31일까지 기고하고 작가 고 박완서에게 펜을 넘겼었다. 그리고 1996년 11월24일 서울주보 1000호 특집에 글을 발표한 뒤 1998년1월4일부터 다시 정기 기고를 시작했다. 이 기고는 1999년 12월26일까지 계속됐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2012년 1월1일 주보에 게재했으며 2월26일 잠시 중단된 뒤 7월1일부터 9월30일까지 계속된 것이다.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가 가작으로 입선, 1967년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미개인'(1971) '타인의 방'(1971) 등 단편 위주 소설을 통해 도시화 과정이 지닌 문제점 등을 다루며 한국문단에 소설붐을 이끌었다. '별들의 고향' '불새' '고래사냥' '겨울 나그네' 등 신문연재 소설로도 각광받았다.
1987년 가톨릭에 귀의, '잃어버린 왕국' '왕도의 비밀' 등의 역사소설과 종교소설 등을 펴내며 영역을 확장했다.
불교에도 관심을 기울여 구한말 선승인 경허와 만공선사의 일생을 다룬 '길 없는 길'로 1986년 불교출판문화상을 받았다.
한편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와 전임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최인호 작가의 선종 소식을 듣고 유족들에게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염 대주교는 “최인호 베드로 작가는 자신의 아픔까지도 주님께 내어드리고 글로써 이를 고백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며 “우리나라의 대표적 작가이자 모범적인 가톨릭 신자였던 최 작가의 선종소식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평소 최 작가와 깊은 친분을 맺어온 정진석 추기경도 "거친 삶 속에서도 위로와 희망을 건네던 선생님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을 감출 수가 없다"고 애도했다.
정 추기경은 "암 투병 중에도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서울주보’에 옥고를 연재하며 신앙인들에게 묵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누고자 노력했다"며 "최 작가의 글은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쉼이자 힘이었고 깊은 감동이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