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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그대 힘겨워 하지 마세요...
시인 도 종환 (진길 아우구스티노)
문화체육부 장관
그대의 모습이 다른 이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다.
힘겨움을 이기지 않고 아름답게 거듭나는 것은 없습니다.
작은 꽃 한 송이도 땡볕과 어두움과 비바람을 똑같이 견딥니다. 
마을 어귀의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견디는 비와 바람을
채송화와 분꽃도 똑같이 견딥니다.
그대 거기 있다고 외로워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것 중에 외롭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노루는 노루대로 제 동굴에서 외롭게 밤을 지새우고,
다람쥐는 다람쥐대로 외롭게 잠을 청합니다.
여럿이 어울려 흔들리는 들풀도 다 저 혼자씩은 외롭습니다.
제 목숨과 함께 외롭습니다.
모두들 세상에 나와 혼자 먼 길을 갑니다.
가장 힘들 때에도 혼자스스로를 다독이고 혼자 결정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외로운 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외롭습니다.
지금 그대 곁에 있는 사람도 그대만큼 외롭습니다.
그대가 거기 있어 외로운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대가 거기 있는 것처럼 소박한 모습으로 서서 자기들이 있는 곳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이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꽃밭으로 가꾸는 것처럼 그대로 그렇게 꽃으로 있습니다.
그대 힘겨워 마세요. 그대의 모습이 다른 이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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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서로를 위한 기도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지고 말해지는 아름다운 전통가운데 하나가 ‘서로를 위한 기도’의 말씀들일 것입니다.
“기도해주십시오... 기도해드리겠습니다... 기도합니다... 기도를 부탁합니다... 기도 안에서 뵙겠습니다... ”
이렇듯 기도의 말씀들은 우리 그리스도인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우리는 첫 번째 성서말씀인 야고보서에서 기도에 관한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고통 겪는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은 찬양하십시오... 앓는 사람은 원로들이 기도하고 기름을 바르십시오...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야고 5,13-16 참조)
사도 야고보는 기도의 아름다움을, 기도의 효과를, 기도의 은총을, 기도의 신학을 잘 알고 계셨던 분으로 생각됩니다. 서로를 위한 기도와 기도의 기쁨에 대하여 참으로 아름답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 기도하고, 즐거움에는 찬양하며, 앓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어느 절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느 날 서로 내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기도를 하느님은 더 잘 들어주시는가에 것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들을 하느님은 거의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한편 다른 친구의 기도를 하느님은 들어주시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자신의 인생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거의 실패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번째 친구는 자신의 역경과 고난에서도 항상 행복한 얼굴을 간직했습니다.
마침내 두 친구는 인생이 다 끝난 다음 하느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애를 하느님께 평가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평가가 세상에서의 기준과는 다른 듯 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기도를 다 들어주신 첫 번째 친구가 아니고, 당신이 거의 기도를 안 들어주신 듯 했던 두 번째 친구에게 하느님은 최고의 평점을 주셨습니다. 의아하게 여기는 첫 번째 친구에게 하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의 기도만으로 내가 너에게 너의 꿈들이 이루어지게 했던 것은 아니란다. 네 친구의 기도가 너의 꿈을 돕곤 했었단다. 너의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기도하곤 했지.”
”하느님, 저의 기도는 제 친구의 기도를 들어주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오늘의 복음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 같은 이들의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르 10,14-16)
어린이의 특징은 단순, 순수, 신뢰, 겸손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 인간자신들이 어떤 위치, 신원, 부유함, 연령, 인종, 학식, 소유를 가졌다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 인간자신의 어떠한 것들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것이니...”
우리 모두는 피조물이고 하느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들입니다. 하느님은 어린이와 같은 마음과 영혼으로 당신께 의탁하고 청하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는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시련과 고난의 때에 기도하고, 기쁨과 감사의 때에는 찬송하며, 더욱이나 병고에 지치고 힘든 이들을 찾아가고 기도해 주어야 함을 오늘의 말씀이 더욱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 서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주고 기도의 말씀을 건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것을 오늘도 감사하며 이처럼 새로운 하루를 힘 있게 시작합니다.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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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4주일
2019. 2. 3
루카 4, 21 ~ 30
♠ 복음 공부 : 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 실패
☞ 개요 : 루카는14-15에서 예수님이 갈릴레아 회당에서 칭송을 받는데 비해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을 받으셨다고 한다. 루카는 마르6.1-6과 자기가 수집한 특수사료를 참조하여 엮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했으나 죽임을 당한 사실과, 초대교회가 유다인들에게 예수님 부활 복음을 전 했으나 배척당하고 이방인들에게 가셨다는 두 가지 사실을 전한다. 그래서 나자렛 배척 사건은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운명을 미리 보여준 사건임을 알 수 있다.
* 21~28절 : 20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설교를 하실지 주시한다. 예수님의 설교는 의외로 “오늘 이 성경의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라는 말 한 마디뿐이다. 이는 이사야가 예언한 구원이 (인간을 억누르는 온갖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유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성취되고 있다는 뜻이다. 루카는 ‘오늘, 이날, 때’ 등의 표현을 통해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들은 청중은 언뜻 보기에는 흡족했던 것 같고, 놀랍고 좋기는 했지만,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예수님을 두고 고향사람들은 술렁거린다. 저 사람이 대관절 누구인가? 무슨 일을 했던 사람인가? 도대체 하느님의 희년을 감히 어떤 인간이 선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분을 놓고 수군거리며, 예수가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보증이 되는 기적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분위기가 적대적으로 변함을 느끼시고, “필경 너희들은 나에게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가파르나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우리가 들었소. 그 일을 여기 당신 고향에서 해보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이 속담은 당시 그리스 세계와 유다사회에서 의사의 능력을 믿지 못할 때 흔히 비꼬아서 하던 말이었다. 한마디 덧붙여 당신의 말씀이 권위 있는 표현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로 시작하여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만은 환영받지 못한다.” 라는 표현을 통해서 당신이 ‘예언자’ 이심을 강조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베풀지 못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방인 엘리아(1열왕 17.8-24)와 엘리사(2열왕 5.1-4)에게 베푼 기적의 사례를 드시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의 감정이 극도에 이른다.
* 29~30절 :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믿음을 촉구하신 것이지만,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예수님은 밖으로 쫓겨 맞아 죽을 지경이 되었고, 하루 만에 만사가 결단 나고 그분의 첫 공생활은 실패한 듯 보이나,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그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신다. 이는 유다교로부터 박해를 받고 이방인 선교에로 발길을 돌리게 된 초대교회의 상황을 반영한 기록이다.(사도행전 참조)
♠ 복음 요약 : 나자렛 회당 설교는 예수님의 회당 방문,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 부모에 대한 언급, 예언자가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는 이야기, 나자렛에서는 어떤 표징도 행하지 않으셨다는 내용들이 이루어진 장면으로 심각한 요소를 지닌 몇 구절을 살펴보겠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었다.”(20)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23) 라는 구절.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합니다. 엘리아와 엘리사 예언자는 이스라엘 밖에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27절 참조)라는 대목들이다. 첫 장면은 흔한 사회 현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께 많은 기대를 하고 붙잡아 두려는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들으려고 거기 와 있다. 나자렛이라는 취약한 마을에 그들의 기대가 예수님에게로 현실주의적인 생각을 하면서 “예언자는 우리네 사람이다!” 사람들이 언짢아 한 것은 먼저 자기 마을에서 일을 하지 않고 가파르나움에 갔다는 것과 그곳에서의 행적(표징)을 여기서도 해 보여야 하지 않을까? 너는 우리 고장 사람이다. 너를 돕고 키워준 것이 우리인데, 이제는 무엇인가 보답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바라는 위협, 당신이 하시려는 말씀을 사람들의 기대와 필요와 사정에 맞추셔야 한다는 위협이었다. 그래야만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자유로움이 부상한다. 성공이나 무슨 일이 닥칠 것인가에 개의치 않고 첫 등장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 주변의 악평에 개의치 않고 말씀하신다. 어느 모로는 그들을 충동질하여 화를 만드는 듯하다. 믿음이 있는 이방인들이 고향보다 훨씬 가치 있음을 주지시킨다. 여기서 예수님은 절대적인 정신의 자유를 누리시는 분, 하느님의 신비를 들여다보시고 온 세상의 신비를 바라보시는 심원한 자유를 누리시는 복음선포자로 등장하신다.
♠ 대화 방향 : 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말씀이 현 생활 가운데서 이루어진 예를 들어 보시고,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②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게 생각하면서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이고, 이유는 무엇인지요.
③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십니다. 살아가면서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하는지요? (수원교구 소공동체를 위한 성경공부에서 발췌함)
♠ 참고 문헌 : ▪ 신약성경 주해 루카복음 ( 유충희 지음 / 바오로딸 한남성서연구소 공동기획 )
▪ 루카복음 성서묵상 ( C.M 마르띠니 지음. 성염 옮김 / 바오로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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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5주일
2019. 2. 10
루카 5, 1 ~ 11
♠ 복음 공부
* 1절 :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서서 걸으시고 계신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군중은 예수님께 몰려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총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 2~3절 : 그런데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들 중에서 예수님은 시몬의 배에 오르신다. 이것은 벌써 예수님께서 시몬을 제자로 삼으시려고 정하신 것을 보여 주신다.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의 모습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군중과는 대조적이다. 이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군중과 거기에는 아예 관심이 없고, 생업에 몰두하는 시몬의 모습이다. 마치 프란치스코 교황님 미사에 참석하려고 광화문에 몰려든 군중과, 미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광화문 옆 김밥집에서 김밥을 팔기 위해 김밥을 말고 있는 사람의 모습과 같다.
* 4~7절 : 예수님은 오직 생업에 열중하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는 시몬에게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은 마음속으로 ‘아니 이 선생님은 물고기 한 번도 잡아 보지도 않은 분 같은데, 이곳에서 오랫동안 어부생활을 한 나에게 깊은 데로 나가라고, 고기 있는 자리를 알려주는데...’ 라고 생각 중에 말한다. 저희는 밤새동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군중이 있기에 선생님 체면을 생각해서 선생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 8절 : 그물이 찢어 질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시몬은 그제서야 ‘이분이 보통 분이 아니구나.’ 를 알고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하소연한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바로 옆에는 같이 고기를 잡았던 야고보와 요한도 같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옆에 서있던 군중들도 놀랐을 것이다.
* 9~11절 :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긴다.
♠ 복음 요약 : 부르심은 다양하다. 하지만 부르심은 우리의 생활현장에서 일어난다. 밤새 동안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허탈감과 상실에 빠져 있는 시몬 일행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신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들을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것처럼 쏟아 부어 주신다.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히브리서 6, 14)
물론 하느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만이다.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고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진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날과 그 시간을 기억하면서 항상 찬미와 감사로 기억하자.
② 그분의 말씀으로 새해 서로를 축복해 주자. 살레시오 수도회의 새해 달력을 보면 수사님들이 서로 머리에 안수를 해주며 축복기도를 하는 사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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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6주일
2019. 2. 17
루카 6, 17. 20 ~ 26
♠ 복음 공부 : 카나의 혼인 잔치
☞ 들어가면서 : 마태오복음서는 행복한사람을 말하는 산상설교를 기록하지만 반면에 루카복음은 여기에 불행한사람을 덧붙이는 평지설교를 기록한다.
마태오사가는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도이지만 루카는 다분히 예수님의 지상생활을
함께 겪지 못한 사도 바오로의 동력자로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으신 분이시다.
마태오복음서가 정경에서 가장 첫 부분을 차지한 것은 사도로서 그 당시에 가장
많이 읽혔다는 것을 반영했다고 알려져 있다
* 17~23절 : 행복하여라 이 귀절들은 지금과 미래의 관계를 밝힌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을
위하여 지금에 어려운 생활을 하는 자들은 미래에 축복을 받는다고 한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 아닌 자들도 이 세상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면 미래의 축복 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인 된 자가 자기 종에게는 그날그날이 품삯을 주나 그의 자녀에게는 장래의 기업을 예비하여 두면서 현재에는
그것을 주지 않는다. 가장 귀한 보물을 감춰져 있는 법이다. 신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에서 잘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 24~26절 : 불행하여라 이 말씀은 현세에서 어려움에 처해있는 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한일을 그때마다 대가를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이미 마련해 두셨다는 것이다. 복음서가 기록된 때가 70년 즉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로마네로황제에 의한 박해시절을 겪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보다는 내 이웃을 위해
뭔가를 해주는 일이 더 쉬운 일이 될 것이다.
♠ 복음 요약 : 축복은 인간적으로 어렵고, 버림받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런 처지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리는 상황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이 아닌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선언은 인간들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차릴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세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의 능력과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루카
복음의 중심사상입니다. 가난은 더 이상 단순한 빈곤 자체가 아니라, 은총에 대한 인간들의 수용력이며
개방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행위와 법에 의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부유한 자들로 여겨지듯이 물질적 재화의 풍요를 자신들의 생활의 기반과 보증으로 삼는 사람들은 부유한 자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간청하는 사람입니다. 가난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는 것,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 가난한 이들과 삶을, 소유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 대화 방향 :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에 대해서 정리해 보시고, 나는 지금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 참고 문헌 : ▪ 루카복음 주해서 ▪ 보득솔 (가톨릭 청년성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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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7주일
2019. 2. 24
루카 6, 27 ~ 38
♠ 복음 공부 : 자비로운 자 되어라
* 27~38절 : 예수님은 제자들이 평지설교를 들려준 후 그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고 가르치신다. 원수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 ‘저주하는 자들’. ‘학대받는 자들’ 세 가지를 제시하며, 이들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축복해 주고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런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황금률” 때문에(31절) 신앙인은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주어야 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순환을 차단하여 친구로 만들려고 해야 한다고 세 가지 말씀을 하시며, 빰을 맞으면 다른 빰을 내밀고, 겉옷을 빼앗으면 속옷마저 내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 다 내어 주라고 하나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어리석게만 보이는 자기포기를 가르치신다. 세상을 뛰어넘는 신앙인들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되기 위한(마태5.45) 종말론적 보상도 되지만,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심과 사랑을 본받아 거룩하게 되어 완전한 자 되기 위함이다.
♠ 복음 요약 : 루카복음의 평지설교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완전한 자비에 있다. 그러나 신앙인의 부분적이고 부족한 자비심은 하느님의 절대 자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을 따르기에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부족한 인간끼리 서로 부족함을 내세워 비판하는 못된 짓을 말라고 경고(37-38절)하시는데, 누구나 인간은 크거나 작은 허물을 지니고 있음으로 서로의 모자람을 지적해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먼저 배울 진리는 하느님의 자비심이다(36절). 즉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주님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에게 그가 베푼 것 보다 훨씬 더 갚아 줄 하느님의 인정(35절의 상을 말함)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남에게 해주라고 하십니다. 동료나 가정, FB회원, 코이노니아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② 말씀을 실행하는 이는 강물이 들이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집과 같습니다. 내 삶이나 회원들 사이에 들어 닥친 어려움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극복하실까요?
♠ 참고 문헌 : ▪ 소공동체를위한 루카복음 맛들이기 ( 수원 가톨릭대학교출판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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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수원지구 봉사자 월례회합 스케치 >
2019 서울․수원지구 팀봉사자 신년 모임
FㆍB 서기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아직 어둠 짙게 드리울 때 성서형제회 여명을 찾으러 첫차에 몸을 실은 필자는 생각보다 이른 시각에 목적지에 도착.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팜필로 형제님께서 반기신다.
오늘 주일인지라 혹시 미사시각 이후 도착될까 염려되어서 토요일 본당에서 미리 미사봉헌 했다.
다들 미사참례하는 동안 휴게실에서 오늘 할 일을 정리한다.
사 후 반가운 사람들이 나오자, 근처 식당으로 이동 좋아하는 식사, 그리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시각 새벽에 자욱한 안개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식사 후에 평소와 다른 방에서 시작.
늘 하던 순서이지만, 오늘은 신년인지라 자기 소원이 든 기도를 돌아가면서 한사람씩 바친다.
서울지구 모임인지라 전주지구 형제들 없이 하는지라 다소 어색해 보인다.
코이노니아 후 주요한 묵상회 일정 조율이 있었고,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늘상 그래왔듯이 우리 모임도 한국천주교회의 단면이고, 성장해가면서 겪게 되는 일종의 성장통을 우리 대화 속에서 느꼈다.
우리가 간과하는 일은 신앙이 늘 좋은 면만 보여주는 기대감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주님이 부활의 영광을 위해 수난의 시기를 겪었듯이 지금 우리가 겪는 대립과 갈등구조도 주님의 은총이라 느껴본다...
그리고 회의 중이나 돌아가는 길에 다들 공감하는 말들...
그 중에서 우리의 주장만 낼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자는 것이다.
조율한 일정은 따로 이 보나벤뚜라 형제님이 준비해서 배포한다고 하니, 여기서는 약하고 우리의 일꾼인 한 베드로 형제님의 안사람(처)이 삼월 따뜻한 봄이 오면 세례를 받는다는 기분 좋은 소식을 식사 중에 듣게 된다.
여기에 기분 좋은 필자는 회의 중에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남에게 강요나 설득하지 않기로 어려운 다짐을 해본다.
어수선하고 정리 안 되는 듯 한 우리의 모습이지만, 봄이 되면 만물이 기지개를 펴듯 우리의 신앙도 아픈 만큼 성장하리라...
주님의 사랑을 기대해본다. 아마도 이는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나벤뚜라의 서툰 운전 덕분에 거의 다 간 터미널 반대편에 내려서 한참 헤매다 두 시간 기다렸다.
버스를 타고 끝자리의 불편함도 별로 피곤을 모를 지경이라 11시경에 집으로 들어와서, 다음날 아침 일찍 원고도 보지 않은 채 우리들의 분위기를 소박하게 남긴다.
여기에 적지 못한 여러 가지 대화는 참석한 각자의 몫으로 지니기로 하고, 새로 출발하는 2019년 수도 서울지구에도 주님의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주님 저희의 애틋한 소원을 들어주소서...
성모마리아 그리고 한국의 모든 성인성녀들이시어,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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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복음 주제발표 기고 >
예수님의 세례 축일 < 루카복음 3. 15-16, 21-22 >
임 젤뚜르다 (성자)
서울 이문동 일반팀 FB
♣ 내용 : 오늘은 ‘주제 발표 ’보다는 묵상을 택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까?
어느 자매의 신앙 수기에 있는 평화 방송에서 들었다는 다음이 이야기를 통해 그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시래기죽을 먹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식사 시간만 되면 상을 차려놓고 슬그머니 배가 아프다며 나가시고 우리 여섯 남매는 시래기죽을 서로 차지하려고 얼굴도 들지 않은 채 숟가락을 부산히 움직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늘 배가 아프다며 나가시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이시려고 상이 나올 때까지 부엌에서 애꿎은 아궁이마 휘졌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식이 굶어도, 병들어도, 월사금을 못 내고 풀이 죽어도 어머니는 모두가 당신의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따지고 보면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된 지금 되돌아보면, 어머니는 사랑이 많으셔서 죄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습니다. 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은 법이라는 말은 법률적 논리나 윤리적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논리 안에서는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당신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요약해보면 루카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며 (루카1,4)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고, 요한은 주님이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전하면서, 세례자 요한도 위대한 사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전하고 있다고 요약합니다.
*** 송 모세(영진) 신부님 묵상자료 인용 <루카3장> ***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마음속에 깊은 골짜기 하나 있습니다.
미움과 원한의 골짜기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골짜기입니다. 너무 깊어서 바닥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골짜기가 너무 깊어서 / 메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찬바람이 부는 골짜기만 들여다봅니다.
마음속에 높은 산이 하나 있습니다. / 교만과 허영의 산입니다.
스스로 잘난 체 하는 마음의 바벨탑입니다.
너무 높아서 바닥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너무 높아서 언젠가는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기만 합니다.
울려다 보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너무 높아서 깎아낼 생각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합니다.
마음이 꼬부라져서 남의 말을 늘 비틀어서 듣습니다.
마음이 거칠어져서 남에게 상처만 줍니다.
메우라는 골짜기는 메우지 않고 탑만 쌓았습니다.
깎으라는 산과 언덕은 깎지 않고 골짜기만 팠습니다.
닦으라는 마음은 닦지 않고 남의 마음만 할퀴었습니다.
회개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세례자 요한은 올해도 어김없이 광야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산과 언덕 하나만 깎아도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일도 아닐 것 같은데
자기 합리화, 변명, 핑계, 게으름 등이 발목을 잡습니다.
해마다 광야에서 들려오는 그의 외침이
올해에도 들판의 바람소리처럼 그냥 흘러갈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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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
복음의 새로운 통로
대구 지역 회원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신앙인을 만나야만 했는데, 오늘날 여러 매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를 홍수처럼 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를 통해서 생활과 경험 이상으로 많은 지식을 갖고 있기에 이를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서울교구는 특히 신도시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교육을 받고, 이를 통한 활동은 절제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지켜왔지만, 천주교회는 젊은이들을 위한 훈련, 특히 예비자들을 위한 교육 등이 오랫동안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천주교신자들의 극히 일부분만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어렵게도 세례를 받은 자들 중에서는 일 년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반 이상이 교회를 떠나간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무런 체험조차 하기 힘든 세례 이후 일 년 동안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 어려움이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는 것이다.
주일학교와 이들의 자모회는 여전히 시스템에 너무 의존해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현 교종인 프란치스코께서는 몇 년 전에 반포한 복음의 기쁨에서 봉사자들이 너무 교회 내에서만 활동한다는 것이다. 교회 밖에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제들 주위에 머무르면서 현실에만 안주한다는 얘기를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저는 무엇이 이런 얘기를 내어놓는지, 책을 그리고 이를 통해서 몇 분의 사제와 수도자를 통해 강의를 수없이 되돌려 보곤 하면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려고 합니다.
저는 1990년대에 청년성서모임에서 봉사를 하면서 여러 본당을 다녔다.
거기에서 주로 주일학교교사들과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 때와는 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다녀본 본당은 강남권의 여러 본당과 서울 외곽인 길음동성당과 아마도 당산동과 이문동도 다녔던 것 같다.
그때 무엇을 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저에게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지난 목동성당에서 보좌주교님을 모시고 한 말씀봉사자의 잔치는 여러 의미를 저에게 주었다. 그때에 지금은 제주도로 가신 강우일 주교님이 참석하셨다.
저는 아마도 그때 마르코봉사자로 파견되기 위해서 파견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치동성당에서 쟁쟁한 선배들을 모시고, 마르코복음 말씀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제가 혜화동에서 마르코소모임에 참여할 때에는 서울에는 여러 대학 내에서 성서모임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의도 직장을 중심으로 직장인 팀이 만들어나가고 있었을 때이다.
안타까운 일들은 주로 미혼 여성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 그들이 자연스레이 결혼적령기가 되고, 결혼함으로서 그 뒷장으로 넘겨주지 못한 채 사라졌다.
우리 본당 또는 교구의 새로운 공동체는 백년을 넘기기가 어려운 것 같다.
새로운 공동체가 몇 십 년을 하고 그 정신이 희박해지고 또 새로운 공동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
오랫동안의 레지오공동체도 그러하고, 성령기도회 그리고 한동안 서울에서 유행했던 소공동체도 지금은 왠지 시들어가는 듯해 보인다.
교구 단위로 맞이하는 시노드도 그 열의가 점차로 시들어져가는 듯해 보인다.
우리나라가 조선 때에 활발히 신앙의 불길이 일어날 때가 있었다.
주로 여인네들을 중심으로 이끌어나갈 때가 있었다.
조선에 오랫동안 사제가 오지 않았을 때가 있었고 나라에는 법으로 금하고 있었지만, 조선의 신앙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희얀하게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고통을 통해서 그 열의를 키워주시는 것 같다.
우리가 지금 겪는 고통은 우리에게 주시는 어려움이기보다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임을 알게 해주시는 듯해 보인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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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많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8년 12월 입출금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