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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12일 수요일
[(녹)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은 환시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닥칠 재앙을 본다. 주님께서는 징벌하는 이들을 보내시어 가차 없이 도성의 사람들을 치게 하시지만 이마에 표가 있는 이들은 죽음의 징벌을 면케 하신다. 그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거슬러 행한 역겨운 짓에 괴로워하고 탄식했던 이들이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회개하라는 교회의 권고를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대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에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마음 모아 간절히 청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복음).
제1독서
<예루살렘의 역거운 짓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9,1-7; 10,18-22
주님께서는 1 내가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도성의 징벌이 다가왔다. 저마다 파멸의 무기를 손에 들고 나와라.”
2 그러자 북쪽으로 난 윗대문 쪽에서 여섯 사람이 오는데,
저마다 파괴의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 필갑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와서 구리 제단 곁에 섰다.
3 그러자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때까지 자리 잡고 있던 커룹들 위에서 떠올라 주님의 집 문지방으로 옮겨 갔다.
주님께서는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 필갑을 찬 사람을 부르셨다.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5 그분께서는 또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6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주님의 집 앞에 있는 원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7 그분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집을 부정하게 만들어라.
그 뜰들을 살해된 자들로 채워라. 가거라.”
그러자 그들은 도성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쳐 죽였다.
10,18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 커룹들 위에 멈추었다.
19 그러자 커룹들은 날개를 펴고, 내가 보는 앞에서 땅에서 치솟았다.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들도 옆에서 함께 나갔다.
그들이 주님의 집 동쪽 대문 어귀에 멈추는데,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 나는 크바르 강 가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떠받들고 있는 생물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커룹임을 알 수 있었다.
21 그들은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넷인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같은 형상이 있었다.
22 또 그들의 얼굴 형상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보았던 모습,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본당에서 좋은 뜻으로 함께 일하다가도 때로는 서로 의견이 다르거나 오해가 생겨 불화를 겪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도들의 열정이 강하였던 때에도 의견 차이와 다툼을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었을 때, 단둘이 만나 이야기하라고 이르십니다. 그 일을 사람들에게 먼저 알려 내 편을 만들거나 편을 가르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두 사람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며 문제를 깊이 바라보면 뜻밖에도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해가 깊으면 아무리 솔직하게 대화해도 좀처럼 화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혹시라도 있을 상대에 대한 편견을 고쳐 나가거나, 더 좋은 방법을 찾아가는 대화의 여정이 필요합니다.
두세 사람이 문제를 깨닫고 대화를 하였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는 교회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공동체 전체가 그 사람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기도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대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는 공동체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마음을 모아 일치를 이루는 일이 교회 공동체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분쟁과 갈등을 이겨 내려는 초대 교회의 노력은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하느님을 향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마다의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공동체와 함께하는 기도, 주님께서 필요한 은총을 주시도록 공동체를 위하는 기도도 꼭 바쳐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기도이면 좋겠습니다.(유청 안셀모 신부)
때로 홀로, 때로 함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창세기를 봉독하다 보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등 구약의 성조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들의 신앙 여정에 친밀하고도 직접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그들과 개별적으로 통교하시고 인생길에 늘 함께 하시며 보호해주십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로 넘어오면 상황은 조금 변화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인간 한 명 한명 각자와 각별하고 애틋한 관계를 지속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세와 아론을 대표하는 출애굽 공동체, 다시 말해서 당신 백성의 무리와 접촉하시고 대화를 나누시며 사랑을 베푸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개별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고 그분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함께 기도하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따지고 보니 공동체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통교를 나누고 친교를 나누는 사다리요, 매개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항상 현존하시며, 말씀을 건네시고, 당신 사랑을 건네시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분의 복음 말씀을 사는 개별 그리스도인 각자가 새로운 개별 교회입니다.
천명, 만명의 신자들이 모인 곳만 교회가 아니라, 세명이나 두명,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단 한명이라도 올바른 지향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그곳이 곧 교회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간절히 기도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예배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께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교회로 만드십시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하면서 신부님의 지난 5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작부터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원래 미국에 오기로 했던 신부님이 사정이 생겨 올 수 없었고,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에 주교님께서 신부님에게 미국에 갈 수 있는지 물으셨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주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공항에는 교우들이 환영을 나왔고, 그렇게 교포 사목이 시작되었습니다. 다행히 신부님은 일본에서도 5년간 교포 사목을 하였고, 독일에서도 3년간 지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국 생활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비교적 적었다고 합니다.
저는 5년간의 사목을 마치면서 어떤 마음이 드는지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세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공동체에 큰 분란이 없어서 감사했고, 신자들도 조금 늘어서 기뻤고, 재정도 조금 여유가 생겨서 안심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후임 신부님을 위해서 성당의 제대와 독서대를 새롭게 만들었고, 소성당도 깨끗하게 단장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습니다. 시골 마을 어귀에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저는 신부님의 사목 안에서 따뜻함과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5년 동안 지내면서 아쉬움과 서운함은 없었습니까?”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감정의 바람이 불면 마음도 흔들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바람은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저도 뉴욕에서 5년간 ‘가톨릭 평화 신문사’에 있었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가장 큰 바람은 코로나 팬데믹이었습니다. 많은 것이 멈추었지만 신문 제작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이동이 제한되어 신문 홍보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 큰바람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직원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에 또 하나의 은총도 있었습니다. 동료 사제들과의 친교와 우정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사제들과 함께 캠핑하러 다닐 수 있었습니다. 사제는 사제와 함께 있을 때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또 브루클린 한인 성당 주일미사를 4년 가까이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신문 홍보를 다닐 수 없던 때에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있을 때 행복한 것처럼, 사제는 교우들과 함께할 때 행복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인호’를 이야기합니다.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호와 같은 표징을 전했습니다. 이집트에 재앙이 내릴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재앙은 양의 피를 바른 집을 건너갔습니다. 구약의 인호는 재앙을 피하는 표시였습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시였습니다. 신약에도 인호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의 인호를 받습니다. 구약의 인호가 재앙을 피하는 표시였다면, 신약의 인호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받았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이 인호는 단순한 특권이 아닙니다. 이 인호는 사명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용서하고, 섬기고, 사랑하며,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호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잘못한 형제가 있으면 먼저 조용히 찾아가서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가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잘못한 사람을 벌주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얻는 데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누군가 잘못했을 때, 그 사람을 밀어내고, 낙인찍고, 격리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먼저 형제를 살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누구의 이름으로 모였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에는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작은 성당이어도, 작은 공동체이어도, 작은 모임이어도, 그 안에 용서와 사랑과 기도가 있으면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도 다시 품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길은 정죄의 길이 아니라 용서의 길이었습니다. 배척의 길이 아니라 포용의 길이었습니다. 힘으로 누르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로 품는 길이었습니다. 용서와 포용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의 길입니다. 5년의 사목을 마치고 돌아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사목의 결실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큰 업적만이 결실은 아닙니다. 공동체에 큰 분란이 없었던 것, 신자들이 조금 늘어난 것, 재정이 조금 안정된 것, 후임자를 위해 제대와 독서대를 새롭게 마련한 것, 소성당을 깨끗하게 단장한 것,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열매는 서로를 품고, 서로를 이해하며, 공동체를 평화롭게 지켜 온 사랑입니다.
우리도 모두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인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인호는 우리를 보호하는 은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세상으로 파견하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매듭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매듭을 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상처를 깊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감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갈등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믿음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희망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사랑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착함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고움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부드러움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깨끗함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품음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섬김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살림으로
우리 함께
땅을 하늘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시도록
오늘의 성인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ane Frences de Chantal)
신분: 설립자, 수녀
활동지역:
활동연도: 1572-1641년
같은이름: 방지가, 샹딸,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프란체스카, 후아나
1572년 1월 23일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디종(Dijon)에서 귀족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oanna Francisca de Chantal)은 18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엄격한 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폭 넓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20세 때에 크리스토프 드 샹탈(Christophe de Chantal) 남작과 결혼한 그녀는 충실한 아내이자 헌신적인 어머니요 검소하고 알뜰한 주부로서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성(城)에서 매일미사를 봉헌하는 관례를 만들었고, 다른 성의 신심활동을 도입하여 소개하면서 자선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그들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은 유아 때 사망하였다.
게다가 1601년 남편이 사냥을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그녀는 네 명의 자녀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시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몽틀롱(Monthelon)으로 오지 않으면 손자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할 수 없이 몽틀롱으로 가서 7년 동안 자녀교육에 힘쓰며 살았다.
1604년 사순시기 동안 친정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을 방문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마침 그곳을 방문한 제네바(Geneva)의 주교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설교를 듣고 대단한 감명을 받아 그의 영적 지도를 청하였다.
처음에 다소 망설이던 주교는 결국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였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서로 영성적인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결혼하지 않을 것과 주교에게 순종할 것을 서원하였다.
디종의 카르멜회 수녀들과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은 그녀는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하고자 원했으나 주교는 좀 더 인내를 갖고 기다리도록 했다.
1607년에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그녀에게 영성적으로는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에 드러내었던 덕들을 따르고, 활동적으로는 노인들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하는 수도 공동체를 세우려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 한 그녀는 주교의 도움으로 자녀들의 장래 문제와 집안의 대소사를 해결한 후 안시(Annecy)로 떠났는데, 그곳은 주교가 새로운 수도회를 세우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1610년 6월 6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안시 수도원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와 2명의 동료들이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해 주교로부터 정식으로 회칙을 받았으며 이듬 해 그들 모두 수도 서원을 하고 그녀가 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회의 이름과 회헌은 여러 번 바뀌어 오다가 마침내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공식 명칭으로 확정하였다.
이 수도회는 1612년 1월부터 병자방문을 시작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그녀는 시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후 더욱 영성적인 성숙에 힘쓰며 수도회의 새로운 분원 설립에 주력하였다.
1614년 리옹(Lyon)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많은 난관을 겪기도 했지만 그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의 도움을 받아 수도원을 급속히 확장해 나갔고 많은 여성들이 입회하였다.
이러한 성공적인 확장은 육체적인 고행보다는 겸손과 온화함을 강조한 주교의 가르침과 그녀의 신중함과 헌신 덕분이었다.
1619년에 그녀는 파리(Paris) 분원을 설립하면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us, 9월 27일)를 만나게 되었는데,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초기 정신과 활동 방향을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사망한 후에는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주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사망하던 1622년 당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분원은 13개였고, 프랑스 전역으로 확장되어 그녀가 사망할 당시 약 86개의 분원이 있었다.
그녀는 수도회 내적, 외적인 시련을 견디어 내면서 계속해서 분원을 설립하기 위해 거처를 옮겨 가며 생활하였다.
1628년 흑사병으로 많은 수도자들이 사망한 후 안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금 장상을 역임하다가 1641년 마지막으로 파리에 가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만나고 돌아온 후 느베르(Nevers)에서 병을 얻었다.
결국 물랭(Moulins)의 분원에서 몸져누운 그녀는 1641년 12월 13일에 그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안시로 옮겨져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의 무덤 곁에 묻혔다.
그녀는 1751년 11월 21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어 1769년부터 로마 전례력에 포함되었다.
그녀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쓴 “신심생활 입문”(The Introduction to the Devout Life)에 잘 나타나 있다.
2001년 12월 18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교령에 의해 성녀 축일의 전례적 기념일이 12월 12일에서 8월 12일로 변경되었다.
그 이유는 1999년 3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라틴아메리카의 수호자로 선포한 ‘과달루페(Guadalupe) 성모 축일’과 같은 날이어서 전례적인 기념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는 그녀의 축일을 8월 18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다.
상류 계급 출신의 여인으로서 부인이나 혹은 과부로 혹은 수녀로 각기 그 신분에 적합한 덕을 닦고 중인이 모범으로서 성녀가 된 예는 극히 드물지만, 요안나 프란치스카는 그런 드문 분 중의 한 분이다. 요안나는 세례명이고, 프란치스카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모하며 따르기 위한 그녀의 견진 본명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주 디종 시의 귀족 프레미오가의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주(州)의회 의장을 겸한 근면(勤勉)한 인사였으며, 생후 얼마 안되어 어머니를 여읜 요안나를 측은히 여겨 특별히 관심을 갖고 그녀의 양육에 힘을 기울였다.
요안나는 아직 나이 20세 미만이었을 때에, 어떤 부유한 귀족인 청년에게 구혼을 받았으나 그가 이단을 따르는 자란 것을 알자 즉시 거절해 버렸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그녀는 국왕의 충신이며 신앙심이 깊은 신자인 바롱크리스토퍼 드 샹탈 남작의 구혼을 받고 이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승낙을 해 연분을 맺게 되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는 이 새 가정에는 봄 날씨와 같은 온화함이 깃들었고 즐거움뿐이었다.
남편인 샹탈이 혼인 전에는 가사보다도 국사(國事)에 치중하여 분망했던 관계로, 집안에는 약간의 부채가 있었으나 그것도 주부인 요안나의 알뜰한 살림에 의해 얼마 후에는 깨끗이 청산을 했다. 그로부터 9년간 그들에게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 자녀들의 교육도 알뜰히 시켰다.
그러나 세상이란 것은 믿지 못할 일이어서 보름달같이 원만하던 그녀의 가정에도 우수가 깃들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와 더불어 사냥을 간 남편이 친구의 오발로 인해 불의의 큰 부상을 입고 신음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따뜻한 간호도 보람없이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에 정이 두터웠던 부부였던 만큼 프란치스카의 비통한 모습을 보는 사람은 저마다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도 만나기 싫어 방안에 들어앉아 있던가, 혹은 산속에 가서 외로이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이런 비통한 마음이 사라지고 동시에 하느님의 빛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물을 씻고 머리를 들어 앞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생을 독신으로 살며 그리운 그분의 유물인 아이들을 잘 길러내서 초토에 파묻힌 남편의 영전에 보답할 것을 굳게 결심했다.
상(喪)을 벗은 요안나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분배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마테본에 사는 시어머니 댁에 갔다.
시어머니는 본래 무뚝뚝한 성격에다가 그녀가 신임하는 여종까지 요안나를 눈에 티처럼 여겨 그 시어머니에게 여러 가지 나쁜 말을 했으므로 자연히 그녀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안나는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해 모든 것을 잘 참고 시어머니나 그 여종이나 또는 그 여종의 아이들에게까지 한결같이 친절로써 대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요안나는 33세가 되었다.
그 해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에 있는 친정에 갔었는데, 때마침 유명한 프란치스코 드 살이 그곳에 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성당에 가서 그의 설교를 들은 그녀는 이 분이야말로 자신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곧 그의 지도를 청했다.
이때부터 요안나는 성인의 지도를 받으며 성덕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녀는 프란치스코에게 육신의 고행보다도 영신적 극기에 대해서 지도를 받았고, 숨은 선덕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그녀는 실수로 인해 자기 남편을 죽인 사람을 물론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 사람을 만나서, 지금까지 맺혀있었던 모든 원한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뜻으로 그 사람의 딸의 세례 대모가 되어 주었다.
자녀들이 이제는 다 컸으므로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일도 적어졌다.
그래서 요안나는 소녀시절에 품었던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그녀는 지도 신부인 성 프란치스코에게 그뜻을 밝혔다. 그녀는 가르멜회 입회를 원했지만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전부터 있던 수녀원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과부들을 위한 새 수도원을 세우려고 했던 참이므로 그 계획은 즉시 실현되어 요안나는 그 계획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곧 ’방문회’의 시초이다. 수녀가 되려면 물론 사랑하는 자녀와 정든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정이 많았던 요안나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한결같이 수도원 입회를 반대했으므로 그녀의 고민은 더욱 커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줄 안 요안나의 신념은 동요됨이 없이 결국 사랑하는 자녀와 아버지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수도 서원을 발했다.
그 외에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선한 것이라 인정되는 것은 꼭 실행한다는 서원도 발했다.
그녀는 새로운 수도회의 총장으로서 그 자매들에게 될 수 있는 데까지 어머니다운 태도로써 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기회 있는대로 건축한 분원(分院)의 수는 그녀의 임종 직전만 해도 무려 75개소에 달했다.
그동안 그녀의 성덕을 시기해 고의로 그녀의 사업을 방해하는 이도 있었다.
또 유게노 전투에서 큰아들을 잃었고, 딸과도 사별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의 하나 하나가 다 그녀에게는 비애의 날카로운 칼이 되었다.
그 중에도 가장 비통한 일은 그녀의 영적 아버지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서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더욱 분발해 많은 자매들을 이끌고 덕행의 길로 매진하는 한편 수도회의 발전을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본부의 소재지인 아네시이에 무서운 페스트가 만연하자 사보아의 공작 부처는 요안나의 신변을 염려해 안전 지대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녀는 자매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다고 하며 도리어 시내에 나가 환자들을 돌봐 주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위안의 천사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1641년, 요안나는 파리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아네시이로 돌아오는 도중 폐렴에 걸려 위독하게 되어 물렝에서 12월 13일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성 프란치스코 드 살 곁에 묻혔다.
그녀는 클레멘스 1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Innocent XI)
활동년도 : 1611-1689년
신분 : 교황
지역
같은 이름 : 인노첸시우스, 인노켄티오, 인노켄티우스
복자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1611년 5월 19일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Milano) 공국의 코모(Como)에서 신심 깊은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베네데토 오데스칼치(Benedetto Odescalchi)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려서부터 사제성소를 느꼈던 그는 162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코모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인문학을 배웠다. 15살이 되었을 때 그는 제노바(Genova)로 가서 가문에서 운영하는 은행의 일을 도우며 도제교육을 받았다. 1630년 그는 페스트의 광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로마(Roma)와 나폴리(Napoli)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639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어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 때 교황청에 들어가서 다양한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1645년 부제 추기경이 된 후 다시 사제 추기경이 되었고, 이어 극심한 기근으로 고통 받고 있던 페라라(Ferrara)에 교황 사절로 방문하였다. 교황은 페라라의 시민들에게 그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라고 소개하였다. 1650년 노바라(Novara) 교구의 주교가 된 베네데토는 자신의 수입 전부를 교구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가 선종한 후 강력한 교황 후보였던 그는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결국 1676년 9월 21일 교황 클레멘스 10세의 후임으로 제240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에 선출된 후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 또는 인노첸시오)라는 이름을 택한 그는 교회에 대한 프랑스 왕 루이 14세(Louis XIV)의 간섭과 견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긴축 재정을 통해 교황청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힘썼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도 온건한 입장을 취해 루이 14세 왕의 정책과 배치되었다. 또한 교리교육과 매일 영성체를 장려하고, 신학교 교육의 수준을 높이며, 윤리신학이 해이해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1687년 신비주의와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에 물든 미겔 드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에 의해 야기된 이단과 싸우며 교회의 정통교리를 수호하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는 교황직에 오르기 전이나 후나 늘 단순하고 경건한 삶을 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회 내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배척하여 큰 존경을 받던 그는 1689년 8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제대 아래 묻혔다. 1956년 10월 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복자품에 올렸는데, 시복식을 위해 그의 유해를 발굴했을 때 죽은 지 26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부패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유해는 청동으로 장식된 석관에 모셔져 보존되다가 2011년 5월 1일 복자품에 오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를 모시기 위해 성당 안쪽의 다른 제대로 옮겨 안치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