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평생 모선사업에 헌신한 덕운(德雲)
덕운은 아버지 인재공(忍齋公)과 어머니 창녕(昌寧) 조사요(曺士要)여사 사이의 차남으로 1927년(丁卯) 장흥군 관산읍 성산리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해 주경야독하며 향학열을 불태웠다. 남이 학교 다닐 때 일하며, 밤에 공부했다. 그 결과 21세 때 국가에서 시행한 약종상시험에 합격, 평생의 직업이 됐다.
그는 일찍 사회와 모선사업에 투신한다. 어릴 때 의재(毅齋) 종조부는 모선사업의 중요성과 존재공의 위대함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 주셨다. 그래서 26세 때 덕암(德庵)할아버지의 독립운동실적을 밝혀내고 유공비를 세웠다. 그때 너무 감회가 깊어 3년 전에 구입한 논 8두락을 문중에 제위답으로 봉정했다.
덕운의 모선정신은 몸에 배어있다. 그의 집은 ‘위씨 사랑방’이다. 종씨는 물론 교수와 학생, 언론매체 심지어 외국인까지 관산‧위씨‧천관산을 답사하려면 그 사랑방을 찾아온다. 그는 찾아온 손님들을 안내하고 대접해서 보내는 세월이 반세기다. 그래서 그는 그 옛날 ‘복덕방 아저씨’같은 위씨의 안내자로 더 유명하다.
그동안 그가 이룬 사업은 부지기수다.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허다한 일을 했던 것이다. 모선사업도 돈과 정성을 함께 쏟아 문중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하도 일을 많이 해서 일부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위선정신은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렵다. 여기서는 몇 가지만 소개한다.
1) 딸 혼수비용을 신실 신축금으로 희사하다
시조공은 도예지사(道藝之士)를 파견해달라는 신라왕의 요청에 따라 당나라로부터 동래해서 아찬(阿湌)까지 한 인물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1925년(乙丑) 즉 공이 입국한지 꼭 1287년 만에 제사를 올렸다. 그것도 사우를 지어 위패를 모신 것도 아니고 충렬공 묘각인 하산재 동록에 설단해서 지냈다.
시조공과 판사공의 설단 제향을 드린 지 반세기가 흘렀다. 어른들은 1970년대 초부터 연하동이 교통의 사각지대라 후손이 오지 않아 제관분정도 어렵다며 이단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재원이 없어 결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974년 음력 9월 8일 충렬공 묘제일 전날 평화로의 이단을 이듬해 하기로 결의했다.
해가 바뀌었다. 1975년(乙卯) 1월 28일 문중대표들이 백산재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서 설단이 아니고 아예 사우를 짓기로 방침을 세웠다. 필요한 자금은 모금을 통해 마련하기로 결의했다. 덕운은 그 날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결의내용을 전해 들었다. 그는 시조공의 사우신축비용을 자신이 부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막상 마음의 결정을 내렸지만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둘째 딸의 혼례를 위해 혼수비용을 준비해놓은 것밖에 없었다. 가족회의를 했다. 그는 ‘혼수는 나중에라도 해주면 되지만 시조공 사우는 기회가 한번밖에 없다.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당부했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간곡히 부탁하자 이해했다.
그는 다음 날 자신의 뜻을 문중에 알렸다. 그런 후 혼수를 장만하기 위해 마련해둔 240만원을 희사했다. 지금 하산사는 덕운의 희사금으로 그해 2월 8일 착공해서 3월 16일 상량식을 거쳐 4월 25일 공사를 마치고, 이틀 뒤인 27일 예성식까지 마친 후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따라준 가족이 더 고마웠다.
덕운은 사우신축비를 내느라 딸을 빈손으로 시집보냈다. 혼수 하나 없이 시집을 보내는 마음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조상을 위해 희사한 돈이 아깝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기뻤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딸과 가족 그리고 사위와 사돈네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그 때 해주지 못한 혼수는 몇 년이 지나서 마련해 줬다.
2) 존재공의 지제지 국역판을 발행하다
관산 사람들은 어려서 천관산과 존재공의 얘기를 들으며 성장한다. 더구나 위씨의 경우는 그 도가 심하다. 천관산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는 존재공의 지제지는 그래서 더 보고 싶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원본도 필사본도 여러 번의 난리와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 1975년 봄 평소 존경했던 완도 목헌(黙軒) 송희석(宋希錫)선생이 방문했다. 그는 관산과는 인연이 깊은 분이다. 방촌의 다초(茶樵) 위복량씨와 본인과도 각별한 관계였다. 묵헌은 오랜만에 왔으니 천관산 탑산암(塔山庵)을 가보고 싶다며 동행을 제의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걸으니 어느 덧 탑산암에 당도했다. 박원혁(朴圓赫)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대화를 하다 박스님이 한서 한권을 내놓았다. 바로 지제지 필사본인 것이다. 그는 이 책이 원래 와룡 위용량씨(魏龍良)가 소장한 것을 천관사 주지 장한택스님이 필사해서 보관했던 것이라고 내력을 설명했다.
덕운은 책을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박스님은 묵헌에게 번역해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제의를 받은 묵헌은 기꺼이 승낙했다. 출판하고 싶은 욕심이 났다. 덕운은 그 자리에서 “묵헌선생께서 번역을 해주시면 본인이 출판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약속은 했지만 뭔가 서운한 여운이 계속됐다.
기왕에 지제지를 국역으로 출판하는데 빠진 게 있었다. 즉 사진 등을 곁들이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기니 혼자의 힘으로는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하다 문화원 김삼중(金三中)·위훤(魏烜) 두 이사를 만나 전후사정을 털어 놓았다. 그들은 얘기를 듣고 문화원차원의 일로 추진하자고 했다.
얼마 후 이사회를 열어 군비로 출판하기로 결의했다. 이현호(李炫鎬)를 만나 존재공이 지은 지제지의 국역과 출판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도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동의했다. 군은 어려운 살림이지만 500만원을 지원해 줬다. 3개월 만에 번역이 완료돼 1976년 후반 유림(酉林)문화사에 출판을 의뢰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러 가지 여건으로 사진을 게재하지 못하고 출판한 것이다. 2개월이 지난 후 책이 나왔다. 1500부를 발행, 전국의 문화원과 산악회 등 책을 필요로 할 만한 관련단체에 책을 보냈다. 그 때가 1976년이 저무는 12월 하순이었다. 자비출판을 계획했다가 군과 문화원 사업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덕운 어르신의 공덕이 지대합니다. 타인에게 대접을 잘 하시는 베푸는 삶을 사셨네요. 복덕방 아저씨라는 닉네임을 가지셨습니다.
위문중 종친들을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덕운 어르신을 본받고 싶습니다.
덕운 형님이 그저 고맙고 감사 드립니다.존경합니다.
덕운아제는누가무엇이라고
해도우리우문의얼굴이시고위선사업역시
타의추종을불어하시
지요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