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전진(前秦)의 순도 스님이 고구려에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들어온 소수림왕 2년(372년)이라는 게 통설이자 정사(正史)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정사에 끊임없이 ‘반기’를 드는 것이 바로 불교 남방전래설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락국기』를 근거로 가야국 시조인 김수로왕 7년(AD 48년) 허황옥이 오빠 장유 스님과 함께 인도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과 불경 등을 가지고 왔으며, 이때를 불교초전 시기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불교 기원은 기존의 통설보다 무려 324년이나 앞서게 된다. 실제 김해 허황후릉 앞에 있는 파사석탑이 인도 특유의 돌로 확인됐고, 이곳 허황후릉의 쌍어문이나 가야 유물에 새겨진 코브라 문양 등도 인도 아유타국(아요디아)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문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유사, 장유암, 장유계곡, 칠불암 등 장유화상과 관련된 오래된 지명을 감안하면 가야불교 남방전래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게 남방전래를 주장하는 이들의 주된 논리다.
이런 가운데 외국인 학자가 가야불교 전래시기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할 예정이어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 시드니대 한국학 교수이자 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인 판카즈 모한(Pankaj Mohan) 교수가 그 주인공. 그는 고령군과 계명대 한국학연구원이 7월 9일 고령군 대가야박물관에서 ‘대가야의 정신세계’란 주제로 여는 국제학술회의에서 「대가야의 불교 전래와 수용」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남방불교 전래설’은 가야출신으로 삼국통일을 이끌었던 김유신 측이 가야왕실의 권위를 부각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만든 조작된 역사이며, 허황옥도 공주가 아니라 사실은 2~3세기경 표류해 가야에 도착한 인도 여인임을 주장할 예정이다.
판카즈 교수는 특히 이날 가야의 불교 전래 시기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한다. 요컨대 기존의 반복된 논쟁과 시각에서 벗어나 당시 가야가 불교사상과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인 요건을 갖췄는지를 밝힘으로써 11세기말 편찬된 「가락국기」 내용의 진실여부 및 그 의도를 규명하겠다는 것이다.
미리 배포된 논문에 따르면 ‘불교가 인도에서 급격히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집권적 정치형태의 발전과 경제적 잉여물에 따른 도시화의 발전과정 덕분’이라는 저명한 인도역사가 코삼비(D.D.Kosambi)의 학설을 먼저 소개한 판카즈 교수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불교를 수용할 당시 이들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발전의 정도는 기원전 6~5세기 북인도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밝혔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후반에, 신라는 6세기에 이르러 농업 기술의 발전과 직업의 분화와 같은 도시적 특징이 두드러졌고, 이러한 여건이 불교 수용을 가능케 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불교에는 국가종교로서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관과 윤리덕목을 비롯해 전우주의 통치자라는 전륜성왕 개념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인도뿐 아니라 삼국 초기의 통치자들도 불교를 적극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가야는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인 여건이 형성되지 못한 부족국가였던 탓에 이념적․정치적 시스템으로서의 불교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며, 수용되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종교형태였다는 게 판카즈 교수의 입장이다.
그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로 3세기 중국 자료인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금관가야와 다른 소왕국으로 이뤄졌던 가야연맹의 통치자들이 3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독자성을 갖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여전히 외부 세계와 외교적 관계를 유지할 만한 조직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내용을 제시했다. 여기에 5세기 중반 이전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에서 불교 관련 요소를 찾기 힘들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5세기까지 존속하고 있는 가야의 순장풍습도 생명을 중시하는 불교와는 괴리된 문화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럼 가야에 불교가 확산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판카즈 교수는 가야의 질지왕이 452년 수로왕과 허황후가 결혼한 자리에 황후사를 세웠다는 『가락국기』의 기록에 주목해 이때를 가야왕실이 불교를 공식적으로 후원했던 시기로 추정했다. 이는 가야가 5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군주제 및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됐다는 점과도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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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후 48년 허황후가 가야에 올때 싣고왔다는 파사석탑 |
판즈카 교수는 또 당시 가야지역에 확산된 불교가 인도불교가 아니라 철저히 중국불교였다는 점을 가야국 왕자인 ‘월광(月光)’태자의 이름 분석을 통해 밝혀냈다. 즉 ‘월광’은 『인왕경』이나 『수라비구월광동자경』 등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출현한 민중의 미륵이 곧 ‘월광’으로, 이러한 중국 특유의 불교사상이 고구려에 의해 가야에 전달되고 그 영향이 다시 6세기 초 월광태자라는 이름에 반영됐다는 것이 판카즈 교수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인도의 허황옥이 탑과 경전을 싣고 가야에 왔다는 기록이나 파사석탑을 비롯한 쌍어문 등 북방불교와는 분명 다른 남방불교의 영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10세기 편찬된 『가락국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누가, 무엇 때문에 가야의 남방불교 전래설을 의도적으로 조작했던 것일까.
판카즈 교수는 인도불교나 자이나교 자료, 동남아시아 금석문, 로마제국에 관한 문헌 및 고고학적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2세기 무렵 인도인들은 바닷길을 통해 중국의 비단을 로마까지 대량으로 팔았을 정도로 활발한 무역을 전개했음을 밝혔으며, 『일본서기』에 654년 폭풍우로 인해 인도여인이 탄 배가 큐슈 지방에 표류했었다는 기록도 소개했다. 이어 그는 가야지역에도 인도의 상인이 표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며, 특히 자이나교의 한 텍스트(『Nayadhammakahao』)에 2~3세기 무역을 하던 사람들이 ‘가륵(kalik)’이라는 나라에 표류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가락(Karak)국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나라의 이름이 유사할 뿐 아니라 이 나라에 금과 보석이 풍부하다고 기록돼 있는 등 가야의 특성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또 당시 상인들이 안전 항해를 기원하며 작은 탑을 싣고 다녔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남아 있는 파사석탑 등 여러 인도 문화적인 요소들은 이 때 가야에 왔던 인도인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판카즈 교수는 이러한 상인 계통의 인도 여인 표류 사건이 허황후 신화와 불교전래설로 탈바꿈된 것은 가야출신이었던 김유신이 자신의 가계에 권위를 싣기 위한 것으로 분석했다. 즉 가야왕실 후손으로 막강한 권력자였던 김유신과 그의 부친 김서현이 자신들의 왕실역사를 재구성하고, 현재의 위상을 과거에 투영해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김수로의 배우자인 허황옥의 신격화는 『승만경』의 주인공으로 ‘아요다왕국’의 현명한 여왕이었던 ‘승만부인’을 본 따 만들어졌다는 것. 요컨대 어릴 때 이름이 ‘승만’이었던 신라 진덕여왕(647~654)보다 가야왕실이 더 우월하거나 정통이라고 주장하려는 김유신 일가의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판카즈 교수는 “수로왕의 배우자가 인도출신이라는 것이 7세기 가야왕실 후손들의 막강한 힘과 영광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증거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며 “허황후나 가야불교 남방전래설을 역사적인 사실로 볼 것이 아니라 7세기 신라의 정치상황으로 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대가야사 국제학술회의에서는 조영현 대동문화재연구원장의 고령 지산동 72~73호군 조사보고를 시작으로 △고령 암각화가 보여주는 정신세계(이상목) △대가야의 신화와 의례(나희라) △대가야인의 미의식(이송란) △대가야의 음악과 사상적 배경(권주현) △한반도 고대사회에서 순장의 사상적 배경과 그 성격(이성준) △은주시기 순장과 사상(高崇文) △대가야의 상장의례(김용성) △일본 고대의 상장의례(土生田純之) 등 논문이 발표된다. 또 ‘대가야인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란 주제로 종합토론도 열릴 예정이다. 054)950-6071~3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006호 [2009년 07월 10일 11:25]
첫댓글 진실은 밝혀져야 겠지만 많이 서운하네요 정치적 상황에서 현재가 아닌 그전날의 역사도 뒤바뀌기 한다니 섭섭합니다 가야불교 남방전래설이 바르게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진실은 밝혀야 하지만 그냥 아름다운 전설로도 그냥 남았어 가야하면 불교로 시작되는 시각도 좋을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이것은 하나의 가정일 뿐 입니다.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보면,
한나라에서는 왕망의 신과 후한 광무제의 왕권교체기 입니다.
한무제가 흉노왕의 아들인 김일제에게 '투후'벼슬을 내리고 이후 김씨들이 한나라에서 막강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왕망은 이들 김씨의 당고모부이며 당시 '허'씨는 한말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자인 김.허 양가문입니다.
그래서 허황후설은 재상가인 허씨가에서 가야를 창업한 김씨가로 시집을 보낸것이라는 설이 있지요.
허목선생의 '보주태후 묘비'명에 의하면 아마 이들 허씨의 선대가 인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