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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로 17세기 유럽철학의
중요한 합리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불후의 저작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에서
데카르트의 이론을 비판했다.
네덜란드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생활해,
유대 문화에 대해 정통하였으나 비판적인 사상 때문에
유대인 랍비들은 그를 제명 조치하고 유대 사회에서 추방했다.
그는 렌즈를 만드는 기술자로서 안경이나 망원경 등의
렌즈를 갈고 닦는 일을 통해 생계를 꾸리거나 틈틈이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상세히 연구했다.
특히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견해를 달리 했는데 신의 초월성,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
자유의지를 신과 인간 모두에게
부여한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익명으로 출간한 <신학 정치론>(1670)에서
성서 문헌 해석에 역사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옹호하여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포르투갈인이었으며,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탄압 때문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도 비밀리에 유대교를 믿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에 대한 저항에 성공하여
종교의 자유를 되찾자 이들은 암스테르담에 피난했다.
어머니도 포르투갈 이주민이었는데,
스피노자가 겨우 6세였을 때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 집안은 장사로 번창했으며
유대인 사회에서도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1638년경 암스테르담에 설립된
유대인 소년학교에 다닌 것으로 보인다.
소년들은 학교수업을 마친 뒤
세속적 주제에 대한 개인교습을 따로 받았다.
스피노자는 독일인 학자에게 라틴어와
독일어를 배웠으며
그밖에 중요한 유럽 언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1654년 3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의 유일한 혈육인
이복 누이가 유산을 모두 상속받겠다고
요구하는 바람에 법정다툼이 있었다.
스피노자는 승소했지만 거의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물려주었다.
당시까지 스피노자의 학습내용은
주로 유대교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워낙 독창적인 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학습과정에서 정통교리와
성서해석을 뛰어넘는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17세기 당시에는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분위기가 상당히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아직 유대인을
공식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암스테르담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모두에 반대하는
이단종교들이 자신들을 탄압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곧 유대 교회 당국의 비난에 부딪혔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신이 육체가 없다는 점,
천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
영혼이 불멸한다는 점 등을
뒷받침할 근거가 성서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 〈펜타테우크〉(모세5경)를 쓴 이는 물리학,
심지어 신학 지식에서
조차 학생인 자신들보다 나을 게 없다고 말했다.
유대 교회 당국자는 매수와
협박을 통해 스피노자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자 1656년 7월 그를 파문했다.
암스테르담 시 당국도 짧은 기간 그를 추방했다.
그가 자발적으로 유대 사회를
떠날 마음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며
오히려 얼마 안 되는 자료를
볼 때 그 반대였던 것 같다.
예컨대 그는 1655년 12월 5일
유대인 집회에 참석하여 헌금을 낸 기록이 있는데
그의 가난한 처지에 비추어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 파문당할 때 유대 교회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변호하기도 했다.
스피노자가 친교를 맺은
그리스도교인 중에는
프란키스쿠스 반 덴 엔덴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한때 예수회 회원이었던
그는 정력적인 고전학자였을 뿐 아니라
시인·희곡작가 기질도 다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스피노자는 한동안 여기서 그의 조교 일을 하면서
자신의 공부에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라틴어 실력을 늘리고
그리스어도 조금 배웠으며
신(新)스콜라 철학도 접하게 되었다.
또 나중에 근세철학의 아버지라 불린 데카르트의
'새로운 철학'을 알게 된 곳도 반 덴 엔덴의 학교였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친교를 맺은 또다른 그리스도교인은
주로 콜레기안파(派)였는데,
이 집단은 뒤에 메노파와 병합되었다.
그들은 데카르트주의,
즉 데카르트와 그 후계자들의
이원론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또 그동안 스피노자는 렌즈를 만드는 기술자가 되었으며
안경·망원경·현미경 등의
렌즈를 갈고 닦는 일을 통해
부분적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고 틈틈이 가정교사 노릇도 했다.
한때 종교·철학 문제를
연구하는 독서토론회를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체계화할 목적으로
1660년 레이덴 근처에 있는 라인 강변의
조용한 마을 레인스뷔르흐로 거처를 옮겨 칩거에 들어갔다.
레인스뷔르흐는 콜레기안파의 본거지였으며
스피노자가 하숙한 곳은
헤르만 호만이라는 외과의사 집이었다.
호만의 시골집에서 그는 1662년 4월부터
〈신, 인간,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관한 소고
Korte Verhandeling van God,
de Mensch en deszelfs Welstand〉(1662경, 초판 1852)·
〈지성 정화론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1677)의 저술을 준비했다.
또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에 대한
기하학적 해석서의 많은 부분과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1662~75, 출판 1677) 제1권을 완성했다.
이미 이때부터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사상과는
다른 독자적 견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편 머지않아 영국왕립학회의
두 간사직 가운데 하나를 맡게 될 하인리히
올덴부르크를 만난 것도 바로 이곳에 머물 때였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에 대한
해석서를 준비한 것은 가정교사를 하면서
데카르트 철학을 가르칠 때였다.
이 해석서는 데카르트주의를 신봉하는 친구들에 의해
〈기하학적 방식에 근거한 데카르트의
철학 원리 Renati des Cartes Principiorum Philosophiae Pars I et II,
More Geometrico Demonstratae,
per Benedictum de Spinoza〉
(1663)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는데,
서문에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책에 나타난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저서는 생전에 그의 이름이 표지에 실려 나온 유일한 책이었다.
이렇게 볼 때 스피노자 철학은 같은 시대의
데카르트(1596~1650) 철학의 발전이자
또 그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중세 철학,
특히 유대 철학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있지만,
그 자신은 데카르트주의의
영향을 훨씬 더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가장 독창적인 견해들은 대부분 데카르트 철학의
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 철학을
상세히 연구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말년에 이르러 다소 불만을 토로했지만
데카르트 물리학을 대체로 받아들였다.
데카르트 형이상학에 관해서는
3가지 점에서 견해를 달리 했는데,
신의 초월성,
심신의 실체적 이원론,
자유의지를 신과 인간 모두에게 부여한 점 등이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데카르트의
이 이론들은 세계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과 세계의 관계, 마음과 몸의 관계,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난 사건 등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에 대한 해석서를 출판한 의도는
자신의 독자적 철학을
발표할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영향력 있는 인사의 후원도 확보해야 했고,
철학적 식견이 있는 사람에게
데카르트주의에 대한 자신의
거부가 결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했다.
스피노자는
〈신, 인간,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관한 소고〉·
〈지성 정화론〉에서 자신이 채택한 무정형적
서술방법에 불만을 느끼고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원본〉에 나타난 기하학적 방법에 눈을 돌렸다.
그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형이상학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철저히 믿었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연역적으로 서술될 수 있다.
즉 형이상학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거나
의심의 여지없이 정확하게 정의된
용어로 표현된 자명한 전제로부터
필연적 단계를 거쳐 나온 일련의
정리(定理)로 서술될 수 있다.
불후의 저작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은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바로 그 양식으로 서술되었다.
제1부 〈신에 관하여 De Deo〉는
이미 탈고가 끝나 1663년초에는
친구들 손에 들어가 있었다.
원래 이 책은 3부로 계획되었지만
1677년 5부로 구성되어 나왔다.
스피노자는 원래 비인칭 문체를 고집했는데
이러한 동기에서 기하학적 방법을 채택한 듯하며,
기하학적 방법은 공리(公理)가 참이고
정의(定義)가 정확하기만 하면
반드시 참된 결론을 보장해준다고 평가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스피노자도 정의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며,
정의가 정확한가 정확하지 않은가를
알 수 있는 직감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미완의 저서
〈지성 정화론〉에서 자세히 논의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믿을만한 정의는 정의되는
대상이 가능한 존재인지
필연적 존재인지를 명시해야 한다.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은
필연적 존재인 '실체'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고 있다(언어).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설령 후속 추론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그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체체계가 비판받기 쉽다.
실제로 합리론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체계가 정교한 짜임새를 갖고 있지만
그 논증이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비판했다.
1663년 6월 스피노자는
헤이그 근처 보르뷔르흐로 이주하여
1665년 6월경 3부로 계획된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을 거의 완성했다.
그러나 그뒤 몇 해 동안은
〈신학 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집필에 전념했는데,
이 책은 1670년 암스테르담에서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5년에 걸쳐 5쇄를 거듭할 정도였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철학할 자유는 독실한 신앙심과
국가 평화와 양립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유의 박탈은 공공의 안녕과
심지어 신앙심을 파괴하는 짓과
다름없음을 입증하는" 데 있었다.
이 책에서 보여주듯이,
스피노자는 시대를 훨씬 앞질러
성서 문헌 해석에
역사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옹호했다(성서 해석학).
〈구약성서〉 예언자들의 영감은 오직 도덕적·
실천적 교리에 한정된 의미만을 가지며,
실제의 믿음은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이었을 뿐
이제는 철학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과학적·형이상학적 사변의
자유를 완벽하게 허용하는 일은
성서의 모든 주요교리들과 일치한다.
기적은 도덕적 효과를 위해 잘못 해석되고
강조된 자연적 사건일 뿐이다.
1670년 5월 스피노자는 헤이그로
거처를 옮긴 뒤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히브리어 문법 개요 Compendium
Grammatices Linguae Hebraeae〉를
쓰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대신 언제 출판될지 아무 기약도 없는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
집필에 다시 몰두했다.
그의 〈신학 정치론〉에 대해서는
'지옥에서 배신자 유대인과 악마가 만들어낸'
협잡물에 불과하다는 등 많은 경고가 있었다.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은
1675년 마침내 완성되었지만
스피노자는 이 책의 출판을 포기했다.
다만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는 필사본이 돌았다.
스피노자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정치론 Tractatus Politicus〉을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다.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
이후 시절에는 과학자 겸 철학자 에렌프리트 발터 폰 취른하우스(1675),
스피노자 못지 않은 당대 합리론의
주요이론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76) 등의 방문을 받았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광학에
일가견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광학에
관한 짧은 글을 써보냈으며,
이때 스피노자에게 〈신학 정치론〉의
필사본을 전해받아 읽고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라이프니츠 자신의 말에 따르면 "
그와 여러 번에 걸쳐 오래도록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폐병이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으며
작업장에서 렌즈를 갈 때 생긴
유리가루를 들이마시면서 병이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그는 1677년 죽었으며,
법정 상속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재산은 경매 처분되었다.
그중에는 약 160여 권의
책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목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스피노자 생전의 지시에 따라 친구 몇몇이
그의 수고들을 비밀리에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암스테르담의 한 출판사에 보냈다.
1677년 말에 출판된 유고집
〈사후의 오페라 Opera Posthuma〉에는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정치론〉·
〈지성 정화론〉과 그밖의 여러 서한과
히브리어 문법서들이 모두 실렸다.
〈무지개에 관하여 Stelkonstige reeckening van den regenboog〉·
〈확률 계산에 관하여 Reeckening van kanssen〉 등은
1687년에 함께 출판되었다.
〈신, 인간,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관한 소고〉는
1852년 E. 뵈머가 출판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비록 전문 철학분야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서양 지성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세기 내내 그는 거의 예외없이 무신론자로 비난받기도 했고
때로는 무신론 사상을 감추는 은폐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조는 회의주의 철학자이자
백과전서 편찬자인 피에르 벨이 확립했는데,
그는 자신이 편찬한
〈역사적·비판적 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에서
스피노자 사상을 "이 세상에서
가장 괴상하고 터무니없는 이론"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스코틀랜드의 회의론자이자
역사가인 데이비드 흄도 스피노자의
'무시무시한 가설'에 관해
한마디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를 사상적으로 존경할 만한
인물로 만든 사람은 문예비평가,
특히 독일의 레싱과 괴테,
영국 시인 콜리지 등이었다.
이들은 스피노자를 매우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저작들을 독단적 교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강렬한 종교적 심성의 산물로 보았으며
그 속에서 경건한 도취감을 맛보았다.
19세기에 이르러 많은 전문 철학자들도
스피노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절대적 관념론자와 마르크스주의자는
모두 자신들의 이론과 흡사한 내용을
스피노자 저작에서 발견했으며,
경험론 철학자들도 비록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접근법은 거부했지만
그의 인식론과 심리학에서
몇 가지 전문적 주장을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