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2024년 가을호 반경환 {사상의 꽃들} 특집 글
아기는 엄마라는 발음으로 운다
김 기 택
울음이 입을 열 때마다
엄마가 동그랗게 새겨지는 입술
엄에 닫혔다가 마에 열려서
울 때마다 저절로 나오는 말 엄마
아기가 태어날 때
아기 울음과 함께 태어난 말 엄마
첫울음에서 나온 첫말 엄마
입보다 먼저 울음이 배운 말 엄마
아무리 크게 울어도
발음이 뭉개지지 않는 말 엄마
울음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아기는 엄마가 있는 곳을 아는 것 같다
엄마 찾는 길을 아는 것 같다
지치지 않고 나오는 울음을 다 뒤져서
나기 전부터 제 몸에 새겨진
엄마를 찾아내는 것 같다
울음이 몸을 다 차지하면
아기는 노래하며 노는 것 같다
엄마 심장 소리를 타고 노는 것 같다
우는 동안은 신났다가도
울음이 그치면 아기는 시무룩해지고
엄마라는 말만 입술에 덩그러니 남는다
울음이 더 남아 있다고
딸꾹질이 자꾸 목구멍을 들이받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정겨운 말은 엄마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훌륭한 엄마를 둔 어린아기일 것이다. 아빠가 아기의 씨를 뿌리고 떠나간 사람이라면 엄마는 아기를 낳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그 아기를 길러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엄마는 아기의 존재의 기원이고, 엄마와 아기는 하나의 생명체였으며, 따라서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토록 처절하게 우는 것은 엄마의 몸에서 분리되는 두려움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들은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것을 좋아하며, 이 세상 그 어느 곳을 가더라도 늘, 항상, 자기 자신만을 떠메고 다닌다. 우리 인간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별불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이 태어난 정든 고향땅을 떠나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도 두렵고,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도 두렵다.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스승의 곁을 떠나 자기 자신의 삶을 연주하는 것도 두렵고, 자기 자신의 삶의 텃밭인 조국을 떠나 머나먼 이역나라로 이민을 가는 것도 두렵다. ‘이별불안’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 근거가 뿌리째 뽑히고, 새롭고 낯선 곳에다가 뿌리를 내려야 하는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심리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별불안’은 엄마의 뱃속을 떠날 때 생기는 것이고, 이 ‘이별의 상처’는 어린아기의 탯줄 속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어린아기의 울음은 엄마의 뱃속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그 엄마를 붙잡고 한사코 엄마의 뱃속에서 그 엄마와 함께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의 소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김기택 시인의 「아기는 엄마라는 발음으로 운다」는 ‘아기의 울음’에 대한 생리적이고도 심리적인 성찰의 결과이자 그 울음을 통한 ‘어린아기의 존재론’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엄마와 아기가 일심동체였을 때는 하나의 탯줄로 이어져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 탯줄이 끊어지고 아기의 울음, 즉, 그 말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말은 탯줄이자 핏줄이고, 말은 핏줄이자 젖줄이며, 모든 어린아기들은 이 말을 통해서 그 모든 가르침과 자양분을 얻게 된다. 울음은 말 이전의 말이며, 이 아기의 울음이 ‘엄마’라는 말로 이어진다는 것이 김기택 시인의 시적 전언이기도 한 것이다.
울음이 입을 열 때마다 아기의 입술에는 엄마가 동그랗게 새겨지고, 아기의 입술은 “엄에 닫혔다가 마에 열려서/ 울 때마다 저절로” “엄마”라는 말이 나온다. 표음문자인 우리 한국어의 특성상, “아기 울음과 함께 태어난 말이 엄마”이고, 엄마라는 말은 아기의 첫울음과 함께 탄생한 첫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입보다 먼저 울음이 배운 말이 엄마”이고, “아무리 크게 울어도/ 발음이 뭉개지지 않는 말이 엄마”이다. “울음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아기는 엄마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데, 왜냐하면 울음은 어린아기의 탯줄이자 젖줄이며 핏줄이기 때문이다. 이 울음, 즉, 이 탯줄과 젖줄과 핏줄이 있는 한 엄마와 아기는 서로 서로 떨어져 있어도, 아니, 이 세상을 다 살고 떠나갈 때조차도 이 일심동체의 끈은 끊어지지도 않는다. “울음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아기는 엄마가 있는 곳을 아는 것 같다/ 엄마 찾는 길을 아는 것 같다”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한, “지치지 않고 나오는 울음을 다 뒤져서/ 나기 전부터 제 몸에 새겨진/ 엄마를 찾아내는 것 같다”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울음이 몸을 다 차지하면”은 더 이상 엄마를 찾지 않고 엄마와 함께 노는 것을 뜻하고, “우는 동안은 신났다가도/ 울음이 그치면 아기는 시무룩해”진다는 것은 ‘엄마찾기’를 그치면 이 세상의 삶이 재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엄마 찾기를 그치자 “엄마라는 말만 입술에 덩그러니 남는다”라는 것은 어린아기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울음이 더 남아 있다고/ 딸꾹질이 자꾸 목구멍을 들이받는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렵고 힘들 때마다 엄마를 더 자꾸 찾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어린아기의 울음도 엄마찾기이고, 어른의 울음도 엄마찾기이다. 울음을 운다는 것은 장애를 만났다는 것을 뜻하고, 이 삶의 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들의 구세주, 즉, 전지전능한 ‘성모의 힘’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엄마와 아빠, 형제와 자매, 엄마와 아기는 우리 인간들의 인간 관계의 ‘삼대 축’이지만, 그러나 이 인간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와 아기의 관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는 존재의 텃밭이고, 아기는 엄마의 꽃이자 열매이다.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과 그 자식으로 평가를 받고, 아기는 엄마의 아들로서 그 고귀하고 위대한 업적으로써 평가를 받는다. 울음은 말 이전의 말이자 우리 인간들의 탯줄이자 젖줄이며, 핏줄이라고 할 수가 있다.
김기택 시인의 「아기는 엄마라는 발음으로 운다」는 ‘울음의 언어학’이자 이 ‘울음의 언어학’을 통해 ‘어린아기의 존재론’을 정립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엄마라는 말은 시원의 말이고, 이 최초의 말은 말 이전의 울음 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엄마, 엄마, 우리 인간들은 소위 입신출세를 하거나 늙어 죽을 때에도 영원히 ‘엄마의 젖’을 달라고 ‘생떼’를 쓰는 어린아기들에 지나지 않는다.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잘 질문할 줄을 알아야 한다.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시인만이 천하제일의 시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김기택 시인의 「아기는 엄마라는 발음으로 운다」는 참으로 탁월한 시이며, 천하제일의 명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