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
오랜만에 꽤 먼 거리를 탔지요. 총 122Km.
돌아오는 10월 3일에 자전거 순례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 답사 차원으로 인천에서 서울 잠실체육관까지 다녀왔습니다. 도시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아서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면서 문득 사람들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보게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지요. 지나가는 사람 얼굴 하나하나…….
저도 남자라고 미인인 여성만을 쳐다본 것이 아닐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고 저를 바라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성만 쳐다 본 것이 아니라, 걷기도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꼬마아이들의 얼굴까지……. 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표정이 다 다르고, 얼굴이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본 사람의 얼굴을 지나치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기억하려해도 도저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너무나도 귀여운 꼬마아이라 할지라도 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그 순간뿐입니다. 지나가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머리 나쁜 탓도 있겠지요. 그런데 아마도 여러분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고 계시면서 너무도 다른 우리들 각자를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세요.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그래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 지나가면서 얼핏 본 사람을 기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 각자를 기억하시는 것이고, 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이 보다 더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지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복음을 통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이 좋은 땅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나를 사랑하시기에 계속해서 기억을 멈추지 않으시는 분. 조금이라도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시기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시면서 당신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분.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
이러한 분이시기에 주님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절로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빠다킹신부
희망 뿌리기
-김인한 신부-
신학교 뒷동산에 텃밭을 일군 적이 있습니다. 산 아래쯤에 있는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었는데 물도 잘 빠지지 않는 좋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기껏 해놔봐야
고라니나 멧돼지들이 내려와서 채소들을 먹을 때는 허탈하기도 하고,
그만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들인 땀에
대견하게도 뭔가 피워내는 것을 보고 마음 흐뭇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지대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기보다 양이나 염소를
키우는 일을 합니다. 기름진 땅이 있긴 하지만 그건 아주 일부여서 좋은 땅이든
자갈밭과 풀이 난 곳이든 일단 씨를 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처럼 씨를 뿌린다는 것은 농부가 게으르고
무능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소출을 얻기 위해 척박한 땅이지만 희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에게도 복음의 씨앗, 사랑의 씨앗,
화해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우리가 씨앗을 싹틔우기 힘든 척박한 땅인데도,
주님께서는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묵묵히 우리 가운데 씨앗을 뿌리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희망하시는 주님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풍부히 받아들이고 열려 있다면 열매 맺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데
희망을 지닌 농부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쇠귀에 경 읽기
-변진흥-
우리 속담에 ‘쇠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지요.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이처럼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은 오히려 예수께서 일부러 이런 혼란을 조장하시는 듯한 상황이어서 알아듣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다시 곱씹어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시지만 그분의 선택과 은총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일러주어도 ‘쇠귀에 경 읽기’일 수밖에 없으니 그저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어라 하는 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기는 힘듭니다. 마치 햇빛이 사물을 구분하게 하듯이 그분 은총의 빛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 은총의 빛으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수월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요. 성경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해 주어도 ‘쇠귀에 경 읽기’이기 십상이라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이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알아서 하라.’는 식의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우리로 치면 자기 자식 챙기는 모습처럼 그분만의 독특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내가 많은 열매를 맺는 영혼이 될 수 있을까?
-강성덕 목사 -
작년에 봉사하던 공동체에서 여러 가지 작물을 심었다. 필요한 먹을거리의 상당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검은콩과 메주콩이다. 처음 밭에 심었을 때는 새들이 와서 모두 먹어치웠다. 결국 몇 곱의 노동량을 투입하여 모종을 해 옮겨 심었다. 자라는 콩에 흙을 북돋워주고, 웃자란 콩은 잘라주었다. 가을 추수 때 과연 얼마나 달렸는지 궁금해서 한 포기를 잡고 열매를 헤아려 보았다. 무려 430개나 달린 것도 있었다. 물론 가장 무성하게 달린 것은 메주콩이었다. 반면 검은콩은 잎은 무성하고 키도 컸지만 열매가 없는 것이 많았다.
올해도 스무 가지가 넘는 작물을 심었다. 무농약·무비료를 고집하고 있다. 이미 많이 거두어 먹고 남는 것은 나누어주고 있다. 그렇지만 다 잘된 것만은 아니다. 토마토는 병이 들어 실패하였고, 옥수수는 큰 수확을 거두지 못할 것 같다. 고구마는 반 이상이 말랐다. 하지만 20포기 안팎으로 심었던 오이와 애호박은 매일 수확하는 기쁨이 넘친다. 씨를 뿌려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은 생명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예수님의 비유는 늘 현장감이 있어 좋다. 예수님도 농사일을 잘하시지 않았을까? 하지만 말씀을 읽으며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내가 많은 열매, 백배의 열매를 맺는 영혼이 될 수 있을까? 만일 맺지 못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분명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맺는다면 그것은 부지런한 농부이신 하느님과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의지한 우리가 하나 될 때일 것이다.
기름진 마음의 밭을 가꾸자.
-최현욱 신부-
어떤 유명한 성자(현자)에게 가르침을 받던 제자가 하루는 스승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삶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삶은 진리를 깨달아 가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란 깨달은 사람이 말하는 것은 다 진리이다. 진리란 눈 뜬 사람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고, 눈 뜬 사람입니까?”
“깨닫고 눈 뜬 사람이란 자신의 삶의 중요성을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에 두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 에 두는 사람이다.”
그러자 제자가 또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인가?’ 라는 것은 자신의 가슴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인가? 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자신의 가슴속에 악을 품고 있으면 악이 나오고, 슬픔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슬픈 얼굴이 나오고, 기쁨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기쁜 삶의 모습이 나온다.”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가슴속에 무엇을 품고 살아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이 이제는 아주 근엄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 가슴속이 하나의 토양이 되게 하라. 그대 가슴속에 담긴 것이 밖으로 싹트게 된다. 그대 가슴속에 담긴 진리가 드러나서 그대의 삶을 결정하게 된다. 만일 그대의 마음속이 좋은 토양이라면 그대로부터 싹터 나오는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속이 나쁜 토양이라면 결코 좋은 것들이 싹터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마음은 그 씨가 뿌려지는 밭, 토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토양은 씨앗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네 부류의 사람으로 나뉘어 진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길바닥으로 표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 한쪽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돌밭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머리로, 지식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가시밭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기는 하지만 세상의 온갖 걱정이나 유혹이 있을 때마다 쉽게 흔들리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 삶과 연결이 되지 않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좋은 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온갖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지는 내 마음의 밭이 길바닥인지, 돌밭인지, 가시덤불인지, 비옥한 땅인지, 우리 각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리고 과연 나는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이 누구는 좋은 땅이고, 누구는 길바닥이고, 누구는 돌밭이고, 누구는 가시덤불이라고 구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누군가에 대해서 “저 사람은 가시밭이다, 저 사람은 길바닥이고 돌밭이다”라고 함부로 구분하고 그렇게 사람을 평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은 이렇게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비옥한 땅, 좋은 땅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마음의 밭이 도저히 씨앗이 뿌리내릴 수 없는 밭이라면 거름을 주고 잘 가꾸어서 좋은 토양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밭이 가시덤불이라면 삽과 곡괭이를 들고 그 가시나무를 뽑아버릴 수 있습니다. 또 내 마음의 밭이 돌밭이라면 그 돌들을 골라내면 되고, 길바닥이라면 쟁기로 갈아엎으면 다시 좋은 토양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기름진 마음의 밭을 가꾸라고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을 잘 받아들이고, 또 잘 가꾸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은 우리 마음의 밭이 좋은 밭이 될 수 있도록 어떻게 가꾸고 있는지 오늘 하루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살다
-최혜영 수녀-
날이 갈수록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유의지가 있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할 수도 있고 응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신앙이 나에게 또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준다는 깨침을 누구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황 진(라파엘) 선배님은 척수 공동증이란 희귀병으로 30년 넘게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제가 수도회에 입회할 무렵부터는 아예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라잉맨(누워 있는 사람)이라 부르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의 불꽃을 태우셨습니다. 제 수도생활의 햇수만큼 그의 투병생활이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하느님, 왜?”라는 질문과 함께 연말이면 그분이 만드신 달력을 파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그에게는 달력을 보내는 일이 자신이 아직도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그가 병만 나지 않았더라면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그림도 그리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을 텐데 하느님께서는 “왜?” 그토록 무거운 십자가를 주셨을까요? 그는 묵묵히 고통 받는 욥처럼 인내롭게 살아냄으로써 “살아 있는 존재는 누구나 존귀하며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몸으로 살아준 라파엘님께 경의를 표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가시덤불 사이로 자리는 싹
-김덕진-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덤불에 둘러싸여 있다. 물질이나 명예, 더 편하고 나은 삶을 원하는 우리의 욕심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도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거나 금세 시들어 버리게 하는 가시덤불을 만들어 낸다. 치열한 경쟁 시대, 돈이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세상을 살면서 욕심을 가지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욕심을 채워 나가는 과정이 어떠한가는 매우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내가 행복해지려 하는 것은 아닌가, 더 많은 다수에게 득이 되는 길이 있는데도 오직 나만, 내 가족만을 위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는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돌아보지 않는 순간 가시덤불이 나를 둘러싸고, 비옥하던 땅에는 바위들이 굴러오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은 불의를 보면 참지 않으셨고 가난한 이들, 억압받는 이들 편이셨다. 적극적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싸워주셨고,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셨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그러한 일들을 마주칠 때마다 번번이 그렇게 자신의 일처럼 나서셨다. 이렇게 살아야 좋은 땅에서 가시덤불도 돌덩이도 없이 싹을 틔우고 잘 자랄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애초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기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포기하기는 이르다. 그분께서는 당신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에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가시덤불을 다 잘라내지 못하더라도 잘라낸 몇 개의 가지 사이로 안간힘을 쓰며 자라나는 줄기를 기뻐하실 것이고, 돌덩이를 힘껏 밀어내고 자리잡은 뿌리에 박수를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땅과 씨앗
-이회진신부-
수도원에 들어올 때는 세상을 위해 훌륭한 봉사를 하고자 했습니다.
더 많은 사랑을 나누고, 더 많은 땀을 흘리며 사람들 가까이에 다가가 도울 수 있는
그런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수도회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더 열심히 살면서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더 많이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그때 양성 담당 신부님은 제게 자꾸 이것에 대해서 묵상을 반복해서 시켰습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자 한다는 생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며
반복해서 묵상을 시키는 양성 담당 신부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혈기 왕성한 제가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끝끝내 버티자
신부님은 제게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지향을 두기보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는 지향을 두고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제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던 어린 시절부터 성당에 대해 제 무의식 속에 잠긴 것은
무엇인가 열심히 착한 일을 하는 곳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마음에 받았습니다.
각자 받은 그 말씀의 씨앗은 무한한 사랑의 잠재력으로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그 말씀의 씨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고, 내가 성장하는 것이고, 내가 열매를 맺는 것이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사랑을 베풀고 열매를 맺어서 하늘에 복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늘에 복을 쌓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하늘에 (나의) 복을 쌓기 위한 것”이 되는 것이죠.
많은 경우 우리는 봉사하지 못해서, 기도하지 못해서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돌아보아야 하고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봉사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 안에 하느님을 향한 내적 충만함이
자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움직이는 데
실제로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힘은 다른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의 근본은 자신의 힘과 의지, 용기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은총과 내적 충만함이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의지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씨앗의 성장하는 힘은 자신의 작은 몸이 아닙니다.
씨앗의 성장하는 힘은 그 안에 담긴 생명에 대한 잠재력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생명의 씨앗으로, 사랑과 희망의 잠재력으로 받은 우리기에,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님께 더 해드려야 하는가?” 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은 먼저 우리에게 당신 안에 머무르라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의 좋은 땅에 머무르며 당신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연히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루가 10,42 참조).
아래 글은 하느님 안에 먼저 머무르려 했던 오상의 비오 신부님의 묵상 기도입니다.
좋은 땅에 머무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제게 늘 머물러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더욱 더 많이 사랑하고
주님과 함께 길동무가 되고자 합니다.
예수님, 제게 늘 머물러 주십시오.
이 삶의 어두운 밤과 저 많은 위험 속에
꼭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제게 늘 머물러 주십시오.
굳센 사랑만을 제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주님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주님, 제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제게 뿌려진 은총의 말씀들>
-양승국신부-
며칠간 세미나를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형제들을 위해 보다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겠는가?’하는 주제로 진행된 세미나를 위해 훌륭한 강사께서 물 건너 오셨습니다.
제대로 된 형제적 봉사를 위해 리더십, 조직력, 친화력, 참신한 아이디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등등 여러 덕목들이 요구되지만, 보다 우선적이고 중요한 덕목은 ‘영적생활에 우선권을 두는 삶’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봉사를 하기 원한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복잡한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심산유곡에 위치한 봉쇄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하루 온종일 기도 속에 보내는 사람일까요? 하루 10시간 이상 감실 앞에 앉아 성체조배에 전념하는 사람일까요?
그보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 무얼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운동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기도, 미사, 영적 독서, 피정뿐만 아니라 공부 휴식, 운동, 취미활동, 잠을 잘 때에도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은 바로 영적인 사람이며 제대로 된 영성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보다는 성령의 활동에 많은 부분을 내어맡기는 사람, 밤이슬 내리듯, 미풍이 불어오듯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영적인 사람이야말로 보다 효과적인 형제적 봉사를 위해 적합한 사람입니다.
좋은 말씀들을, 핵심을 찌르는 말씀들에 다들 많이 반성을 했고, 형제들과의 공동체 생활에 새로운 전망을 지니게 되어 다들 기뻐했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주신 뜻밖의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들은 그 말씀들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는 일입니다. 피부로 와 닿는 만만치 않는 현실 앞에서 가르침을 떠올리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인내를 통해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론과는 너무나 다르더군요. 집으로 돌아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인내심이 흔들립니다. 갑자기 다가온 잡다한 걱정거리들로 인해 숨이 막힙니다. 밀린 숙제들이 압박합니다. 그 주옥같은 말씀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뿌려진 은총의 말씀들이 바람에 흩어지지 말고 제 마음의 밭 안에 뿌리내려지길 기대합니다. 지속적인 자기 비움과 낮춤으로 말씀의 씨앗들이 숨 막히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작고 초라하나마 싹을 틔우고, 작은 열매나마 맺히기를 소망합니다.
마음 땅 가꾸기
-조성풍 신부-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 한 해의 결실을 나누는 시기입니다. 자연이 제공한
결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마련한 신앙의 열매를 하느님 안에서 나눈다면 더없이
좋을 시간입니다. 한 해의 풍요로운 결실을 위해 농부는 기름진 땅을 만들고,
곡식을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의 땅을
잘 가꾸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종종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항상 좋은 땅과
같은 마음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에는 길바닥인 때도, 바위투성인
때도, 그리고 가시덤불 같은 때도 있습니다. 새가 쪼아 먹거나 발에 짓밟혀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게만
느껴지는 길바닥의 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 안에서 그 관계가 깨져버린 바위투성이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었다고 여겼으나, 나를 옭아매 숨이 막혀버리게 하는 가시덤불
같은 만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는 이런 길바닥이나 바위투성이,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의 체험들이 있습니다. 서로 그런 체험들을 나누며
위로를 주고받으면서 한 가족으로서의 깊은 정을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캐나다의 리코크라는 문학가가 「오늘」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경고의 글을 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은 이상하다. 어린 아이는 「내가 큰 아이가 되면……」이라고 말한다. 큰 아이는 「내가 성인이 되면……」이라고 말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내가 결혼을 하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는 그는 또 「내가 은퇴하면……」이라고 말한다. 마침내 은퇴하였다. 그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거기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을 뿐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 늦게 깨달았다. 현재 살고 있는 그 가운데에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미래만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현재라는 이 순간을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들의 우둔한 모습들을 꾸짖고 있는 글이 아닐까 싶네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값진 선물을 주셨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소중한 선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우리 각자의 모습입니다. 혹시 더 큰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 때문일까요? 그래서 ‘오늘’이라는 또한 ‘지금’이라는 이 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내가 .... 이 되면’이라는 조건이 담긴 미래의 시간만을 바라보면서 정작 현재를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다 보니, 이제까지 예수님께서는 어떤 결과를 직접 주시지는 않았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열매를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씨만을 주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는 그 씨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만을 원하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들의 마음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어떤 결과를 뜻하는 열매를 나눠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 시작을 의미하는 ‘씨’를 나눠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딱 하나의 씨로 딱 한 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의 자그마한 씨로도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딱 하나의 열매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지요. 딱 한 개의 열매만을 원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대신 씨를 주심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이 순간에 주님으로부터 받은 ‘씨’를 가지고 풍성한 열매들을 만드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금이라는 이 순간에 당장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밭을 잘 갈아야 할 것이고, 거름도 주어야 할 것이며, 말라 죽지 않도록 물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언제 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지금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열매를 주시지 않습니다. 씨만 주십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 씨를 키워나가는 것은 바로 나의 몫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오늘을 만드는 멋진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열매를 주시지 않는다고 주님을 탓하지 맙시다. 더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씨를 주셨으니까요…….
빠다킹신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