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9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영을 분별하라! 》
요일 4:1~6
〈 모두에게 좋은 말을 듣고자 함은 욕심입니다! 〉
“야, 나는 네가 싫어!”
어린 시절, 이 한마디는, 코피 터지게 쌈박질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누가 나를 싫어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교실 60명의 급우들로부터 좋은 소리만 듣겠다는 것이 욕심인 줄 모르던 때입니다.
물론 개인 차가 있을 겁니다.
남이 싫다 해도, 좋다 해도 별 감흥을 못 느끼는 녀석들도 꽤 있습니다.
남이 뭐라든 상관없이 자기 할 일만 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모든 친구들로부터 ‘좋다’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욕심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이는 분명히 욕심입니다.
① 남이 하는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음도 썩 좋은 태도는 아닙니다.
② 지나치게 남의 말에 일희일비하는 태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오늘 설교 들으시는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요?
저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사는 인물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어찌 보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바보처럼, 바보처럼~”
이렇게 살아오는 중에 성경적 ‘거리 두기’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 거리 두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목사로서 주일 설교를 하고 나서 가끔 좀 더 보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수요 설교에서 〈 거리 두기 〉의 연속적인 설교를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거리두기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가장 멀리 ‘거리 두기’를 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믿는 자는 사탄을 가장 멀리 두고 살아야 합니다.
사탄이 나에게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탄을 멀리하면서 신앙 생활하려면, 사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영을 분별하라!》입니다.
〈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야 할 사람은 누구? 〉
☞ 가장 멀리해야 할 사탄을 얘기하기 전에,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을 알아봅니다.
한국에는 ‘촌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촌수가 어찌 보면 ‘거리 두기’의 산물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는 1촌입니다. 1만큼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일지라도 1만큼의 거리는 필요합니다. 그렇지요?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 간에는 2촌입니다. 2만큼의 거리가 필요합니다.
저희 부부가 끔찍이도 애지중지하는 손녀, 손자, 몇 촌일까요?
따져보니 2촌입니다. 녀석들과 2만큼의 거리가 필요합니다.
〈거리 두기〉 설교를 하고나서 보니, 한국의 촌수, 새롭게 보입니다.
부부간에는 촌수가 ‘0촌’ 촌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부라고 해서 거리두기를 전혀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자칫 부부간에,
“나는 최소한 이 사람으로부터는 ‘좋다’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거리 두기〉 설교이후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촌수가 없은 ‘무촌’ 부부이지만, 상대에게 ‘좋아요’를 ‘누르는?’는 것은 별개입니다.
요즘 깨달았습니다. 참 빨리도 깨달았습니다. 제가요~
아무리 부부라지만, 싫은 것은 싫은 것입니다.
부부라고 해서 싫은 것이 좋아질 리 없습니다.
부부지간에 싫은 것을 존치 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지혜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부부간 〈거리 두기〉입니다.
아내가 싫다는 것을 억지로 “당신은 나의 아내니까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살면요?
참 피곤할 것입니다. 견디다 견디다 나중에는 깨질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싫은 것’을 존중해야 함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도 ‘배우자의 싫은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왜냐면요, 고쳐지지 않거든요! 살아보니 그렇습니다.
☞ 〈거리 두기〉 제가 설교하고 제가 가장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 사탄은 누구인가? 〉
사람과 사람 사이, 〈거리 두기〉
특히 가족과 같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물리적 거리 두기, 심리적 거리 두기를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때 지혜로운 거리 두기는 상대방으로부터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좋은 배우자’ ‘좋은 부모’ ‘좋은 할아버지’라는 평가받기에 연연하면 안 됩니다.
서로간에 ‘좋아요’도 있고, ‘싫어요’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손주들이 “할아버지 싫어요!” “할머니 싫어요!”라는 소리에 흔들리면 안 될 줄 믿습니다.
녀석들이 싫어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어른으로서 어른답게 처신하여야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감정의 동물인지라, 잘 해주다가도 멈추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리 두기〉를 잘 못하는 것입니다.
암튼 〈거리 두기〉 잘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크리스천으로 살면서 가장 멀리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대상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시험하는 영’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합니다. 뭐라고 시험합니까?
“너,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지금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 거야?”
“너, 그렇게 하는 것이 참다운 기독교인의 자세 맞아?”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고 믿어?”
이렇게 충동질하여 의심하게 만듭니다.
자칫, 기독교인들이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으로 오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욥기에 보면, 사탄은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을 합니다.
“욥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그만큼 많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회의에 참석한 사탄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 창조 때, 천사와 함께 사탄도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은 천사도 사탄도 창조하시어 각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알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는 ‘사람’이 유일합니다.
사람이 선악과 원죄를 가지고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 하나님에 맞서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존재는 사탄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 사람을 통하여 드러나는 영 〉
사탄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을 이용합니다.
그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를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1절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영을 다 믿지 말라” 한 다음에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다”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영”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입니다.
영이 “거짓 선지자”를 준동하니 “영을 다 믿지 말라”는 다소 복잡한 문장입니다.
(2~3절)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2절, 3절에서 “영”은 곧 사람을 일컫습니다.
“ ~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 ~”
“~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 ~”
이 “영”은 곧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이 들어가서 말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셨다”고 시인하고 선포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는 그저 사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거짓 된 영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합니다.
요한일서의 저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와서 예수님을 말하는데, 성육신을 시인하면 참된 영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말하는데,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면 그는 거짓된 영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영을 분별하라》입니다. 영에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 있습니다.(6절)
☞ 진리의 영은 성령입니다. 미혹의 영은 악령입니다. 영분별은 성령이냐 악령이냐입니다.
〈 영 분별의 두 차원 〉
이렇게 기억하시면 됩니다.
“세상에는 딱 2가지의 영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 하나는 악령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악령은 세상풍조를 좌지우지하는 사탄의 영입니다.
여기서 또 사탄을 하나님께 대적하는 영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사탄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부인하는 자들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들이 “~ 공중의 권세 잡은 자~”입니다.
영은 이렇게 우리에게 사람으로서 다가옵니다.
사람들이 다가와 속삭입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때 우리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영분별”입니다.
나에게 와서 말하는
그들이 어떤 영에 휘둘리고 있는지 분별하는 것, 이것이 ‘1차적 영 분별’입니다.
1차적 영 분별에서 분별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말하는 자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느냐?” 여기서 판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시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 거룩한 성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악령’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믿는 자는 가까이 하고,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자와는 ‘거리 두기’를 확실히 하라는 선포의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 보면, 1차적 영분별만으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사람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임하는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다녀 온 간증을 합니다. 유럽으로 건너가라는 간증도 합니다.
베드로도 환상을 통하여, 부정한 음식, 정한 음식을 가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2차적 영 분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도 영 분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히려 더욱 신중하게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 지금 나에게 들려오는 소리가 성령의 음성인지, 악령의 음성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 시험 없는 삶은 없습니다 〉
주기도문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① “하나님, 저를 시험하지 마세요!”
② “하나님, 시험은 하시되, 제가 빵점 맞지 않게 해 주세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1차적 영분별에서 실족할 수 있습니다.
2차적 영분별에서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는 이러한 실수를 줄여달라는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빵점 맞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하고,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1차적 영 분별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람, 거리 두기를 확실히 해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시인하는 사람, 그가 나에게 하는 말은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2차적 영 분별에서 실족하지 않으려면,
평소 1차적 영 분별 훈련을 잘 해두어야 합니다.
예배 열심히 드리고, 성도간 교제를 잘 하고, 기도를 쉬지 않음이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 들으시고, 그동안의 1차적 영 분별 경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2차적 영 분별에서 성공한 경우, 실패한 경우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조용히 묵상하면서 반추하는 일, 참 중요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안목을 버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를 우선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내가 우선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선입니다.
희생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거리 두기에서 꼭 필요한 거리두기가 한 가지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거리 두기”입니다.
이것은 “내 생각과의 거리 두기”이며 “내 주장과의 거리 두기”입니다.
자칫 우리는 교만하여 항상 나는 옳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리두기를 할 줄 알아야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