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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8), 온유(갈5:22,23, 민12:1-3)
오늘은 성령의 열매 중에서 여덟 번째로 온유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온유라는 말은 한자어로는 따뜻할 온(溫)에 부드러울 유(柔)를 씁니다. 그러니까 그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온유를 잘못 이해하면 약하고 비겁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가령 사나운 개를 잘 훈련시켜서 유순하게 되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개가 유순하게 된 것은 결코 약하여진 것이 아니고 오직 주인에게 복종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던 인간이 변하여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에 갖는 마음의 자세가 바로 온유함입니다. ‘온유’가 성령의 열매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절제하지 못해서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결국 ‘온유’란 제멋대로 살던 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그 욕망을 조절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되며 낮아진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전과 비교하면 대단히 부드럽고 관대하며 잘 참아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나약함으로, 줏대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았기 때문에 강한 자이면서 부드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 따뜻하고 부드럽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하고 강할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밖에서는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온유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성품입니다. 누군가 나를 대적했을 때, 누군가 내게 불이익을 주었을 때, 공격을 받고 상처를 받았을 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때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것이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전히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마음, 온유입니다. 여러분,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로 온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 나를 공격하였을 때 그러면 우리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화가 납니다. 그래서 이는 이로 갚아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은 다릅니다. 오늘 읽은 모세의 경우를 보십시오. 미리암과 아론, 두 사람이 모세가 구스여인과 결혼한 것을 비방합니다. 자기생각과 다르다고 틀렸다고 단정하고 비난합니다. 또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2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런 비방에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유하게 참습니다. 마땅히 자신의 권위로 얼마든지 책망할 수 있는데도 책망하지 않습니다.
정당성을 변론할 수 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성경은 모세가 이 땅의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가 더 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대할 때 나타나는 성품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공격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얼마든지 온유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온유한 자에게 사람이 모입니다.
온유한 자가 존경도 받는 것이고 온유한 자가 인정도 받는 것이고 온유한 자가 지위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진정으로 감당하려면 무엇보다 온유가 필요합니다. 강한 자가 오래 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폭력과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려 했던 나폴레옹, 히틀러, 뭇솔리니는 땅을 차지한 듯했으나 다 빼앗기고 마지막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강한 동물의 상징인 사자나 호랑이는 다 멸종위기에 있고 동물원에나 가야볼 수 있지만 소나 양처럼 온유한 동물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큰 물고기가 물의 세계를 지배할 것 같지만 멸종되는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가 아니라 큰 물고기입니다. 온유한 동물이 오래 삽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는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라고 했습니까? 믿습니까? 이 성령의 열매 온유의 열매가 우리 양문교회 성도들 가운데 풍성히 맺히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온유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힐 수 있겠습니까?
1. 내가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의 모든 열매는 나의 힘으로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윤리적 도덕적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이 나를 지배했을 때 열리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보고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맺힌 성령의 열매를 통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느끼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온유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가를 말할 때는 모든 성령의 열매가 그렇듯이 반드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내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이미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십자가에서 내 죄의 몸이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정욕이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탐심이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자존심이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죽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를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 온유함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돌을 던질 때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큰 소리 나고, 다투고,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은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비난합니다. 조롱합니다. 돈에 욕심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글은 잘 쓰는데 설교를 못한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습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는 비판도 들었습니다.
질병에 걸려서 연약한 자라고, 그래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반응을 보십시오. 고전 4:12,13,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로 취급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고 참고 권면하고 그런 취급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당황하거나, 상처 입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들의 평가는 하나님의 절대평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결코 세상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인정하지 않으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를 뭘로 아는거야” 하니까 분노가 나고 상처가 생기고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는 자에게 도둑놈이라고 말했다고 상처받을 이유가 되겠습니까? 바울은 이미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온유함으로 대적하는 자들까지 품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부활하신 영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가운데 아주 선명한 성품이 바로 온유입니다. 자기 자존심이나 탐욕, 헛된 영광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상처입고, 그 상처를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고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이 온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고 그분이 나의 주님으로 통치하면 우리는 온유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힐 수 있습니다.
2. 대적을 받을 때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어떤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있다면 그를 바로 세워주고 거기서 멈추지 말고 네 자신도 살펴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도 그런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대적을 받으면 당연하게 시선이 상대에게 향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미워하고 욕하고 대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온유한 자는 먼저 시각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공개적으로 비난하였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침묵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께 온유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까? 처음부터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애굽의 왕자로 힘이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애굽사람을 쳐서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렇게 온유한 사람으로 변했겠습니까? 광야 40년을 지나면서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많은 과정을 통과하면서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훈련을 수없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 40년의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타인에게는 관용하고 자신에게는 인내하는 온유의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엄청난 시련을 통과하던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연단과 시련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모난 부분을 깍아서 결국 순금같이 온전함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처럼 훈련을 통해 온유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롬 5:3-5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약 1:2-4)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모든 열매가 그렇지만 성령의 열매 온유의 열매도 가만히 있는다고 저절로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성품이 아닙니다. 많은 과정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모난부분을 발견하고 깍이고 깍이면서 온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문제가 생기면 먼저 나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오늘의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본능을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본능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춘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힘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쓸수 있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고 그 뜻대로 사는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온유의 열매가 여러분의 삶에 풍성히 맺히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대적을 받을 때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 11:29-30)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할 권리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순간순간 우리의 잘못을 보시고 심판하신다면 하루에도 수없이 정죄를 받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악한 인간들에게 조롱을 받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왕 중의 왕이 종이 되셨습니다. 거룩하신 분이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탄생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며 예수님을 따라가면 예수님을 닮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바로 온유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온유하지 않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대적을 당할 때 함부로 말하고, 정죄하고, 분노하고, 보복한다면 내가 예수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요한은 보아너게(우뢰의 아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로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의 한 촌에서 예수님 일행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일을 거부하자 요한과 야고보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자신들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불을 내려 죽이자는 욱하는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런 저들이 예수님을 통해 배우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원수도 품을 수 있는 온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요일 4:7-8)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내게 분노를 일으킬만한 사람이 있고 나에게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비방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고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이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을 통해 배우면 그런 사람에게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얼마나 분노가 가득한 사람이었습니까?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고 예수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멀리까지 찾아다닌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온유의 열매는 풍성하게 맺힐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께 배우면 말이 온유해 집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온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내 노력으로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어떻게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십니다. 그 예수님은 겸손과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온유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대적받을 때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시라면 이러한 때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고 내 감정을 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말하고 행동할 때 거기 온유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온유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