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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할 줄 아는 가정이 되십시오
20: 17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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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6-12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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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부호 록펠러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현재 소유하는 모든 재산으로 만족하십니까? 그는 "아니지요, 그럴 수 없지요"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다시 "그러면 얼마나 더 소유하시면 만족하시겠습니까?"물었습니다. 그는 미소지으며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조금만 더"(Just a little more)입니다.
중동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더 좋은 옷, 더 좋은 신발을 모으는 욕망을 그칠 수 없어 괴로워하던 페르샤 여왕이 자기 나라에서 가장 지혜로운 스승이라고 알려진 현자를 불러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더 좋은 옷, 더 좋은 신발을 갖고 싶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소?" 현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자신의 현재의 삶에 자족할 줄 아는 한 사람을 찾아 그의 옷과 신발을 하루만 입고 다녀 보시지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왕은 신하를 전국에 보내어 부지런히 그런 사람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매번 찾을 수 없다고 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왕은 포기하지 말고 찾으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드디어 어느날 그런 사람을 국경선 근처 산에서 찾았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보고하던 신하가 "왕이시여,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무슨 문제냐?고 묻는 여왕에게 신하는 "그 사람은 옷을 입지 않고 신을 신고 있지 않습니다"고 보고했다고 합니다.
탐심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문제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보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느낀 그 때 이미 탐심은 존재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탐심은 어쩌면 인간됨의 존재의 양식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탐심을 다스릴지 못할 때 탐심은 우리를 죄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우리에게 "탐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탐심의 미혹을 극복하고 건강한 인생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건강한 인생이라는 말 대신에 경건한 인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건강한 웰빙인생을 사는 열번째 법칙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 대답이 바로 자족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참된 자족의 삶을 위해서 먼저 우리는 탐심의 정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탐심을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한 세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려고 합니다.
1. 탐심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탐심의 미혹에서 승리하려면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탐심의 본질 혹은 그 정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1)우상숭배입니다.
골3:5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바울사도는 탐심의 정체를 규명해 놓았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그것을 극도로 탐하게 되면 우리가 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은 안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2)불법의 통로입니다.
탐심을 경계하는 계명은 십계명중 가장 마지막에 기록됩니다. 왜 그럴까요? 가장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어서 그럴까요? 오히려 저는 이 계명이 모든 계명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다른 모든 계명을 깨트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계명은 모든 불법의 통로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탐심을 가진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유일하신 신으로 인정하고 그만을 예배하며 그의 이름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탐심을 가진 자가 어떻게 그 마음에 진정한 안식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탐심을 가진자가 부모를 온전히 공경할수 있겠으며 이웃의 생명을 존중할수 있겠습니까? 간음은 바로 이웃에 속한 사람을 탐하는 죄를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도적질 역시 이웃의 것을 탐내는 마음을 행동에 옮긴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탐심은 모든 불법의 통로입니다. 본래 탐심이라는 단어의 원어 "하마드"(chamad)는 소유할 권리가 없는 남의 것을 탐내는 불법한 욕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비단 탐심은 물질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10계명에 명시된 것처럼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성욕, 그외에 권력욕, 명예욕등도 다 포함됩니다.
2. 탐심은 왜 위험할까요?
1)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탐심은 강력한 관심이요 이 관심이 우리를 지배하는 순간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한 것입니다. 우상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체의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우리와 하나님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묘사할 때 그것을 '경건'이라고 부릅니다. 경건이라는 희랍어는 본래 eusebeia로서 eu+sebomai(바르게, 잘+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godliness'라고 하는데 역시 '하나님을 닮아 가는 바른 자세'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딤전 6:6에서 탐심을 극복한 자족의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딤전6:6을 보십시오."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반대로 탐심은 결정적으로 경건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딤전6:10의 경고를 읽어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반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탐심이 우리를 참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탐심의 가장 큰 위험이 있습니다.
2)이웃과의 건강한 관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탐심은 우리로 이웃과의 건강한 관계도 위협합니다. 돈 문제가 끼어드는 순간 얼마나 많은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파괴되고 있는지요? 왜, 그렇습니까? 돈의 탐심이 작용하는 순간 우리는 이웃을 섬김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닌 것을 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군대간 그리스도인이 하루는 너무 너무 배고파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신자 친구가 빵을 혼자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열을 받아 "야, 이 친구야, 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모르냐?했더니 그 친구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야, 이 친구야, 너는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도 모르느냐"고 하더랍니다. 탐심이 작용하는 순간 우리의 인간 관계는 즉각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순수한 관계일수록 돈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이웃에게 주는 것은 성경적이지만, 꾸어주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돈의 이기심에서 자유할 수 없다면 동업도 조심해야 합니다. 탐심은 언제라도 우리의 관계를 위협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3)자신의 행복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의 관계를 위협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딤전6:9에서 탐심은 탐심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여러 가지 시험에 들어가게 한다고 경고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절에서는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욕심을 저항하지 못하고 욕심에 굴복하는 순간 욕심은 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자리잡기 시작한 이 탐심의 죄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서 여러 형태로 계속 자라납니다. 많은 경우 이 죄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파멸 시킨후 우리를 놓아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파멸의 순간이 오기 전에 미리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레슨이 있다면 자족의 레슨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예수 믿고 평생을 통해 배우고자 한 가장 중요한 삶의 레슨이 바로 이 자족의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빌4:11을 보십시오."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오늘 딤전 6장에서 바울은 동일한 진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특히 자족의 삶을 위해 무엇보다 우리가 인생의 출발점과 골인 지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지금의 우리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상황과 상관 없이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8절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는 것입니다.
3. 탐심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습관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좋은 습관만이 나쁜 습관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탐심의 습관을 대체하는 성경적인 경건의 습관 두 가지를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1)하나님께 드림을 습관화하십시오.
저는 목회생활을 하면서 종 종 사람도 좋으시고 교회도 비교적 열심히 나오시는데 정기적이고 규칙적인 헌금의 습관이 없으신 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신앙행태를 알아보면 거의 예외 없이 믿음의 고백이 불확실하고 신앙이 자라지 않고 계심을 봅니다. 그런데 그런 분중에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변화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개 이런 변화는 어떤 신앙의 체험을 수반함과 동시에 물질적인 헌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은밀한 욕심이 깨어짐과 동시에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첫 목회를 하던 시골 교회의 한 과부 아주머니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이분에게 두 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부자요, 노랭이 이셨습니다. 부자인데 인색한 분이셔서 좀처럼 남을 돕거나 동네 일에 돈을 내놓으시는 일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교회 부흥회에 나와 은혜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3개월 나오시던 어느 주일 이 분이 예배 시간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시는 시점이 설교 시간이 아니라 헌금시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때가 이분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내 놓는 순간이셨습니다. 욕심이 깨지면서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동안 탐심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다가 그 둑이 터지는 순간 은혜의 강이 그분의 영혼에 밀려온 것입니다. 아직도 헌금의 습관을 갖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지금 그렇게 해 보십시오.
고전16:2에 보면 바울 사도는 "매주 첫날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드리는 규칙적인 헌금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시간마다 드림을 생활화해 보십시오.
2)이웃과의 나눔을 습관화하십시오.
잠21:26에 보면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느니라"고 했습니다. 탐심은 베품으로만 나눔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의인의 모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인됨을 증명하는 것은 나눔의 삶입니다. 이제부터 얼마나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 가운데 부산에 한 자수성가하신 중소기업의 대표이사인 분이 있습니다. 교회 안수 집사님이십니다. 이 분은 거의 20년 가까이 매달 한번씩 정기적으로 주변 어려운 동리에 독고 노인 가정이나 소년 소녀 가정을 선정하여 선물을 가지고 가서 자기 자녀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집안일 도와 드리고 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중의 하나가 자식들에게 나눔의 중요성을 몸으로 배우게 하고 주변 이웃들의 가난을 잊지 않고 살게 하기 위해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제 목장 별로 적지 않은 목장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무디 신학교의 교장이었던 조지 스위팅 박사는 이런 말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최후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모았느냐, 벌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었느냐, 나누었느냐가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의 그 날 부끄럼없이 인생을 결산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러면 지금부터 나눔의 삶을 습관화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주신 것으로 자족할 줄 아는 인생을 사십시오.
<설교 적용 질문>
1. 탐심의 종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2. 탐심이 끼치는 영향들을 나누어 보십시오.
3. 나의 인생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탐심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4. 탐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나누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