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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의 죽음을 통한 교훈
35: 16-21
○ 라헬의 죽음
16.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창30:24
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눅1:59-60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미5:2, 마2:6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삼상10:2
21.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마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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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과 장사를 지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주는데 과연 그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1. 인생에 있어서 삶과 죽음은 늘 상존합니다.
본문 16-20절을 보면 야곱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난산 끝에 베노니 곧 베냐민을 낳고 죽은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일찍이 라헬은 요셉을 낳은 후 또 하나의 아들을 낳고자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그 소망을 이룬 것입니다.
이러한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탄생은 우리에게 인생에 관한 깊은 진리를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늘 상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게는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습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가 하면 또 다른 생명은 유명을 달리합니다. 또 개인적으로도 삶을 시작하는 순간 죽음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그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한편 곧 삶만을 인정하고 죽음은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부정한다고 죽음이 오지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소리 없이 다가와서 갑자기 임하게 됩니다. 사실 인생은 죽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살면서 죽음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늘 죽음을 대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죽음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정녕 우리는 죽음을 잘 대비하는 삶을 삶으로서 죽음이 우리에게 임할 때 당황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 가시리이다(욥 30:23)
"저가 보리로다 지혜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시 49:10)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무르게 할 사람도 얼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전 8:8)
2. 성도는 세상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6-20절을 보면 라헬은 난산 끝에 야곱의 열두 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고 죽었습니다. 즉 라헬은 그토록 염원하던 둘째 아들을 낳았지만 정작 그 아들을 품에 안아보는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 것입니다. 그녀가 둘째 아들을 낳고 죽어가면서 그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란 의미의 '베노니' 라고 부른 사실(18절)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죽음을 슬퍼했는지 가히 짐작할만 합니다.
그러나 라헬은 비록 슬픔 가운데 죽었지만 그녀는 새 생명을 낳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기쁘게 했습니다. 라헬이 죽으면서 지은 '베노니'의 이름이 야곱에 의해 '기쁨의 아들'이란 의미의 '베냐민'으로 개칭된 사실은 이를 잘 반영해 줍니다. 특별히 그녀가 베냐민을 낳음으로써 완전한 이스라엘 12공동체가 형성되는 근간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고 인류 구속, 곧 많은 사람으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그것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특별한 것이 될 수도 있고 평범한 것이 될 수도 있으며 치욕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평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치욕적인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평범하거나 치욕적인 죽음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는 죽음을 라헬의 경우와 같이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은 물론 더 많은 생명을 있게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죽음과 생명의 비밀이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입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홀로 십자가상에서 세상의 모든 죄악과 고통을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수많은 새 생명을 탄생시키사 하나님의 자녀로 드렸던 것입니다(롬 5:18).
우리 또한 이처럼 이 세상에서 썩어져 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고(고전 10:33)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비록 죽으나 참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풍성히 얻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멀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륵 보존하리라(요 12:24, 25)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3.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라헬이 죽는 순간을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비록 육신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그대로 남아 그가 온 곳으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을 떠난 인간의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전도자는 전도서 3장 21절에서 인생의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또한 전도서 12장 7절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육신이 죽으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2:7)께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죽은 후에 하나님께로 가서 그가 세상에 있을 때 행한 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죽으면 그만인데 살아 생전 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사는게 최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죄를 짓고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 후에 그들 앞에 닥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보지 못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그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어라고 말할 것이며 견딜 수 없는 지옥의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죽음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 인생을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자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짧은 이 땅에서 마음껏 쾌락을 누리다가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육체의 정욕과 죄의 유혹을 이기고 인내함으로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받는 자가 되시겠습니까?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뜨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내가 보니 죽은 자가 무론 대소하고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19절을 보면 라헬이 죽자 야곱이 그녀를 베들레헴 길에 장사지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당시의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야곱은 가솔을 이끌고 최후의 목적지인 이삭이 살고 있던 본향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라헬이 베들레헴 근처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직도 본향을 향해 가는 도중이기에 라헬을 베들레헴 길에 장사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을 영원한 장막을 위해 투자해야 합니다.
라헬의 무덤을 뒤로하고 또 다시 순례와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20절).
여러분은 여기서 무엇을 보십니까? 아마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본향을 향하여 쉼 없이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의 처소(요 14:2)를 향하여 순례 길을 떠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우리 성도들이 영원히 머무를 영원한 거처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단지 우리가 하늘 본향을 향해 순례 길을 가다가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야곱이 그의 사랑하는 아내의 무덤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그 아비가 있는 기럇아르바로 향해 나아갔듯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버리고 하늘 본향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잠시 머물 이 땅에서의 생활을 위해 많은 돈을 사용하지 않고 돈을 모아 고향으로 송금을 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잠시 머무를 이 세상의 삶을 위해 모든 정열과 재물과 시간을 바쳐서는 안됩니다. 대신에 교회와 복음 사업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우리의 재물과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영원히 거할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거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19, 20)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세상에 살고(딛 2:12)
4.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20절에 보면 야곱은 죽은 라헬을 베들레헴 길에 장사지내고 묘에 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라헬의 무덤과 묘비가 눈에 잘 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참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라헬이 어떤 여인입니까? 그녀는 언니인 레아에 이어 야곱의 아내가 되었지만 아름다웠던 까닭에 레아에 비해 야곱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도 많아서 하란에서 도망칠 때 장차 유산을 분배할 때 상속권의 증거가 되는 드라빔을 훔쳐 나오기까지 하였습니다(31:32). 뿐만 아니라 투기심이 많아 아들 낳는 것에서도 언니를 이기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30:1-8).
그러나 결국 그녀는 드라빔을 가지고도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아 보지 못하였고 그렇게 얻고 싶었던 막내아들을 낳고도 안아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비록 언약의 땅에 묻히기는 하였지만 열조의 무덤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길가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길가에 있는 라헬의 무덤과 묘비는 '공수래 공수거, 곧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허무한 인생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로 인생은 죽을 때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죽으면서까지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할진대 남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가지겠다고 서로 미워하고 속이고 분노하고 해를 가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헛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것을 위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아니라 명예
로운 이름으로 기억되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 책에 그 이름이 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업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5.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21절에 보면 이스라엘 곧 야곱이 라헬을 장사 지낸 후 다시 그 아비 집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야곱이 라헬을 잃은 실의를 극복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라헬이 누구입니까?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었습니까? 야곱은 그녀를 얻기 위해 무려 14년 동안을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하였습니다. 그런 라헬을 잃은 야곱의 마음은 아마 하늘이 무너진 듯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실의에 빠져 주저앉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야곱은 어디에서 이런 힘과 용기를 얻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자신의 수십 년 역경 속에서 지켜 주신 하나님이 또한 지금도 그와 함께 하셔서 상처받은 그의 심령을 위로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져 평소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떠날 때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마저 떠나 버려 아무 의지할 데가 없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련과 절망적인 상황이 닥쳐도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힘과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절망 속에서 독수리가 하늘로 날개 치고 오름과 같은 힘과 희망을 주실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 4)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