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해결할 수 없다
혜국스님
스님은 “참된 불자의 길은 실천에 있다.
절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참선하라”고 설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어디서 왔으며
갈 곳은 어딘지도 모르며 살고 있다.
무엇이 참된 불자인가?
옛날 임제스님은 공부를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아
그만 둘까 하는데 그 당시 입승인 목주스님이
“임제스님, 조실스님께 물어나 보소”라고 하자
“저는 공부한 것이 없어 물어 볼 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다시 목주스님은
“‘어떠한 것이 우주의 대진리요’라고 물어나 보소”라고 해서
조실 황벽스님께 가서 여쭈니
황벽스님은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짜 20대를 때렸다.
잠시후 임제스님은 또 다시 찾아가
“스님 어떠한 것이 우주의 대진리요”라고 물으니
또 다짜고짜 20대를 때렸다.
기도를 하다가
어려움이 오면 맞는 것과 똑 같은 것인데
우리는 늘 그것을 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때야말로 진정으로
큰 선물을 받은 것으로 알아야 한다.
임제스님이 두 번이나 맞자
그만 둘려고 하는데 목주스님이 다시와서
“그래도 3번은 가봐야 할 것 아니냐”고 하면서
“그 어른이 얼마나 중생을 위하고 얼
마나 도인 하나 만들려고
밤낮으로 애쓰는 분인데 한번만 더 가보소”라고 해서
가보니 마찬가지로 또 맞았다.
그러자 임제스님은 ‘아, 나는 자격이 없나 보구나,
이제 떠나자’는 마음을 먹고 떠나려고 하는데 입승스님이
“그럴리가 없다 그럼 인사라도 드리고 떠나라”고
하도 당부를 해서 인사를 드리러 갔다.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스님 저는 여기를 떠납니다.
하지만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황벽스님은
“그러면 고현의 대우스님을 찾아가 보아라”라고 일렀다.
그렇게 해서 대우스님을 찾아가니
“너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느냐”라고 묻기에
임제스님은 공부와 수행 과정을 이야기하며
밤새 청운의 뜻을 펼쳐나가는데 대우스님은 꾸벅꾸벅 졸면서
“가서 자거라”라는 말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이리와봐 너 그 지저분한 방귀 냄새 때문에 잠을 못잤다.
황벽스님은 너를 어떻게 가르치더냐”고 묻는 것이다.
이에 임제스님은 “가르치기는 커녕 물으니까
다짜고짜
20대씩 3번이나 패서 멍이 다 들었습니다”라고 답하자
대우스님은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그렇게 자비심이 있어야 대중을 가르치지”라고 하자
그 말에 임제스님은 확 깨쳐서
“황벽의 불법 별 것 아니네”라고 말을 하였다.
이에 대우스님은
“너를 깨치게 한 것은 황벽스님이니 너의 스승에게 가거라”했다.
이처럼 ‘참된 불자의 길’이라는 것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참불자의 길을 가려면 기도하는 순간만큼이라도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나 질투하는 마음을 접어두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는 소리를 내고 귀로는 들을 뿐이다.
어떤 스님 두 분이 공부를 하다가
한 스님이 빙그레 웃기만 해서
다른 스님이 “스님 깨쳤는지요” “깨친 것 같다”
“그 깨친 소식을 나에게도 가르쳐주세요”하니 빙그레 웃기만해서
“스님이 먼저 깨치면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았냐”고 해도 웃기만 해서
“스님 내 말 안 들리세요”하니까 “다 들린다”
“그러면 한마디 해줘야 될 것 아니냐”라고 하니
“스님 말 듣는 자체가 내가 대답한 겁니다”라고 답했다.
이와 같이 깨친 것도 말로는 해 줄수가 없다.
기도법이나 인생도 마찬가지로 말로 해줄 수 없다.
말로 해결이 된다면 도서관에 그 많은 책들이 있지만
왜 인생 문제 해결을 못하는가
인생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된다.
참된 불자의 길로 가고 싶거든 열번 강의를 듣는 것 보다
강의 들은것을 행동으로 옮겨서 시간만 나면
절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불러보고
시간만 나면 화두를 잡고 참선을 하라.
그리고 불법을 만난 것을 이 세상에 와서
제일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부디 부처님 세상에서 참된 불자가 되길 바란다
모셔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