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 尹氏曰: “三代之禮至周大備, 夫子美其文而從之.” 윤씨가 말했다. “3대의 예는 주나라에 이르러 크게 갖추어졌으니, 공자께서 그 문을 아름답게 보시고 그것을 따른 것이다.”
問周監二代之制而損益之 其文大備 亦時使然也 聖人不能違時 烏爲不從周之文乎 然亦少有不從處 如行夏之時 乘商之輅 是也 朱子曰 周之文固可從 而聖人不得其位 無制作之時 亦不得不從也 使夫子而得邦家 則將損益四代以爲百王不易之法 不專於從周矣 누군가 묻기를, “주나라는 하·은 2대의 제도를 감안하여 그것을 덜고 더하였지만, 그 문이 크게 갖춰진 것은 역시 때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성인께서는 때를 거스를 수가 없었으니, 어찌 주나라의 문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약간은 따르지 않은 곳도 있었으니, 예컨대 하나라의 때를 행하고, 상나라의 마차를 탄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주나라의 文은 본래 따를 만한 것이나, 성인께서 그 지위를 얻지 못하여 제작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에, 또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공자께서 방가를 얻어서 장차 4대를 덜고 더하므로써 百王이 바꾸지 않는 법을 만들었다면, 오로지 주나라를 따르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聖人固當從時王之禮 周禮之盛 又非有不可從 設使夫子得位有作 意其從二代者 不能多於從周也 蓋法令旣詳 豈可更略 略則姦宄愈滋矣 성인께서 본래 당시 천자의 예를 따라야 마땅한 데다가, 주나라의 예가 성대하였으므로, 또한 따를 수 없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사 공자께서 지위를 얻어 제작하는 바가 있었다 할지라도, 생각하건대, 2대를 따르는 것이 주나라를 따르는 것보다 많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체로 법령이 이미 상세한 상태라면, 어찌 다시 소략하게 할 수 있겠는가? 소략하다면 간교함과 부정함이 더욱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問前輩多以夫子損益四代之制 以告顔子 而又曰 吾從周 其說似相牴啎 然中庸吾學周禮 今用之 吾從周 若答爲邦之問 乃其素志耳 曰得之 누군가 묻기를, “선배들은 대부분 공자께서 4대의 제도를 손익하는 것을 안회에게 알려주었으면서, 또다시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그 말씀이 서로 저촉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중용에서 나는 주나라의 예를 배웠고, 지금 사용하고 있으니,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한 것은, 나라 다스리는 일을 물은 것에 답하는 것처럼, 오히려 그 평소의 뜻일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잘 터득하였다.”라고 하였다.
南軒張氏曰 禮至周盛且備 不可有加 故夫子欲從周 使居制作之位 大體 則從周 其間損益之宜 如夏時殷輅韶舞 則有之矣 남헌장씨가 말하길, “예는 주나라에 이르러 흥성하였고 또한 잘 정비되었기에, 더할 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공자께서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하신 것이다. 만약 예를 만드는 지위에 계셨더라면, 대체는 주나라를 따랐을 것이고, 그 사이는 덜고 더하는 합당함이니, 예컨대 하나라의 시간, 은나라의 수레, 순임금의 음악과 춤 같은 것은 남겨두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先王之制與氣數相爲始終而前後相爲損益 固非一人一日之所能致也 三代之禮至周大備 則以氣數至此極盛 而前後相承互爲損益 至此始集其大成也 夫子美其文而從之 豈苟云乎哉 경원보씨가 말하길, “선왕의 제도는 기운과 운수와 더불어 서로 처음과 끝이 되면서도, 앞뒤로는 서로 덜고 더함이 되는 것이니, 본래부터 한 사람이 하루에 능히 완성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다. 삼대의 예는 주나라에 이르러 크게 갖추어졌으니, 기운과 운수 로 보자면, 여기에 이르러 지극히 흥성하였고, 또한 앞뒤로 서로 계승하여 서로 손익이 되는 것은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집대성이 되었던 것이다. 공자께서는 그 문을 아름답다 여기시고 그것을 따르신 것이니, 어찌 구차하게 말씀하셨겠는가?”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周之文亦承夏忠商質之後 風氣漸開人文漸著 不得不然者 況武王周公制作之初 參酌損益 良不苟矣 夫子得不從之 蓋從周盛時文質得宜之文 非從周末文勝質之文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주나라의 문은 역시 하나라의 충과 상나라의 질을 계승한 다음이라 풍기가 점점 열리고 인문이 점차 드러나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무왕과 주공이 그것을 만드는 초창기에는 참작하고 손익하기가 정말이지 소홀하지 않았던 것임에랴! 공자께서 어찌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주나라가 흥성할 때 문과 질이 합당했던 것의 문을 따른다는 것이지, 주나라 말기에 문이 질을 이긴 것의 문을 따른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