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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16년만에 집을 떠나다
<프롤로그: 와장창 유리멘탈 ‘김 율’>
‘유리멘탈’ 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요즘 10대들 사이에 쓰이는 단어다.
유리멘탈의 뜻은 외부자극에 의해 쉽게 꺠지고 무너지는 유리 같은 멘탈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내가 바로 이 ‘유리멘탈’이다.
맞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들에 정말 쉽게 상처를 받고 흔들렸다.
그러면서 좋지 않은 단점들이 여러개 생겼다.
일단 첫째, 그 말들에서 내가 벗어나지 못해 내 할 일들을 집중하지 못했다.
그 상처로 오는 말들을 나는 꽤나 오래 마음에 두고 두면서 계속 신경을 썼다.
둘째, 자연스레 자신감이 낮아지고 더욱더 소극적이 되었다.
어떠한 행동을 했을 때, 그 상처가 되는 말들을 다시 들을지도 모른다는게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셋째, 내 의견을 잘 전달 못하고 깨질 수도 모른다는 불안함으로 계속 남의 기준에 나를 맞추게 됐다.
나는 남의 시선이 두려웠다.
그래서 내 기준이 없이 남이 정해준 기준에 끝없이 나를 맞추었다.
그러다 보니 ‘김 율’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 진정한 ‘김 율’을 찾아보고 싶었다.
남이 정해준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이 있는 견고한 내가 되고 싶었다.
딱 그러던 찰나에 ‘하반하 세계여행학교’를 가보지 않겠냐고 부모님께 제안 받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걱정이 많이 됐던 이유가, 나를 지켜주던 ‘부모님’이라는 품에서 떠나 스스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반하 세계여행학교’라는 길이 망설여지는 순간이었다.
유리가 강화유리가 되려면 700도가 넘는 고온을 견뎌야 한다고 한다.
그 후에는 열기를 다시 식히기 위한 바람까지도 견뎌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겨쳐야 비로소 일반 유리보다 6~8배 더 강한 강화유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고통과 바람, 그 고난들을 견뎌내는 힘이었다.
나도 이제 강화유리와 같이 모든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야만 ‘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꽤 오랜 시간 고민했었다.
결코 나에게 쉬운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알았다.
어느 특정한 시기가 되면 나는 부모님의 품속에서 떠나 그 난잡한 사회에서 내가 나를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약 15년간 부모님의 품속에서 보호받고,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자라왔다.
하지만 내 나이도 열여섯, 언제까지나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나를 딛고 일어나려면 진정한 ‘김 율’의 모습을 찾아내야 하는게 우선이었다.
그때 딱 떠오른게 ‘하반하세계여행학교’였다.
이거였다.
10개월 동안 세계 각각을 여행하면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
그렇게 나는 큰 결심을 하고 ‘진정한 나’도 찾고, ‘강화유리’도 되기 위해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로 여행을 시작하였다.
<내가 이렇게나 활발했다니!: 운동>
(1:눈 위의 엘사공주, 스키)
나는 정신력도 유리멘탈인줄 알았더니, ‘유리베짱’이기도 했다.
나는 베짱도 유리막처럼 얇았던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유리베짱인 모습을 스키 면에서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초급코스도 무서워서 혼자 내려가지 못했던 사람이다.
꼭대기에서 초급코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전에 수도 없이 넘어지고 굴렀던 기억으로 떨고 있었다.
당시의 내 불안함이 나를 이미 짓눌러 그 불안함이 나를 더 불안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 같다.
그렇게 난 불안함을 가득 지닌 채로 내 스키 선생님인 동군형님께 스키를 배웠다.
첫날부터 나는 굉장히 초심자의 상태로 0부터 차근차근 배웠다.
그때도 나는 겁이 났기에 스키 타는 시간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듯이 피할 수는 없었기에 이왕 슬로바키아 타트라 산까지 와서 배우는 건데 한번 즐겨보려고 했다.
초급부터 시작했다.
초급코스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중급을 도전했고, 중급도 재미를 붙이자 상급으로 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에는 최상급까지 갔던 ‘김 율’이 되어있었다.
물론 타는 과정 속에서 넘어지는 실수를 반복했지만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면서 내 ‘멘탈’을 게
임으로 비유하자면, 0.5레벨정도 나는 업그레이드 한 것이었다.
최상급까지 가면서 초급은 저 밑바닥에 붙어있던 껌처럼 느껴졌다.
그때 내가 두려워했던 초급은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겁낼 코스가 없었다.
최상급까지 갔다온 사람이 대체 어느 코스를 두려워하겠는가?
나는 발전한 것이었다.
예전의 ‘스키를 매우 두려워하는 김 율’에서 ‘자신감이 붙어 어느 코스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김 율’로 말이다.
만약 내가 하반하를 도전하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초급코스에서만 탔을 것이며, 스키의 매력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스키는 내게 ‘겨울에 해야 할 스포츠’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스키를 타면서 얻은 꺠달음이 있었다.
비록 나는 ‘유리베짱’이기도 했지만 주말도 제외 없이 한달 동안 매일 매일타서 초급에서 최상급까지 갔다는건 나는 생각보다 용기라는 것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짧은 한달이라는 기간만에 이만큼이나 발전한 것은 내 노력의 성과이다.
또한 초반의 나는 스키 타기를 싫어한채 시작을 했지만 2~3주동안 하면서 ‘스키가 타고 싶어!’ 하고 주로 떠올렸다.
실제로도 매일 스키타는게 즐거워서 금세 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내가 특히 최상급을 간다고 했을 때도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의지와 할 수 있다는 의지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바람이 나를 조종하는데?: 윈드서핑)
윈드서핑.... 나에게 매우 생소하게 다가왔던 스포츠이다.
나는 윈드서핑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던 사람으로써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배웠다.
윈드서핑은 말 그대로 바람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으면서 타는 서핑이다.
서핑보드의 가운데에는 자신의 키에 맞는 돛대를 꽂게 되어있다.
내가 윈드서핑을 배울 때 헷갈려 했던 것 중 하나가 방향을 돌리는 것이었다.
바람이 갑자기 확 불면 나는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것이다.
땅 위에서 하는 것이 아닌 물 위에서 하는 것이었기에 역시 균형 잡기는 더 까다로웠다.
나는 이 균형을 물 위에서 잡으면서 수차례 물속으로 빠지곤 했다.
물속으로 빠지면 내 몸보다 큰 보드 판에 다시 잡고 일어나야 했다.
그렇다, 나는 터키의 페티에에서 약 한 달간 윈드서핑을 배우면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법을 온몸으로 배웠다.
나는 이것을 거의 8개월에서의 하반하 생활에서 전혀 적용하지 못했다.
워커를 하다가 관계에서, 체력의 한계를 경험하다가 내 멘탈이 쉽게 깨지고 무너졌을 때, 나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있었고, 그러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다.
그렇게 좌절해버린 채로 그대로 주저앉았다.
예를 들어서 전체적으로 꾸중을 유난히 많이 받은 날에 내 모습은 한없이 작아져 있었고 다음 번에 또 똑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나를 다시 억눌렀다.
겨우겨우 힘겹게 일어난다고 한들, 금방 넘어질 텐데?
라고 알고 있었기에 좌절속에서 힘겹게 일어나기 싫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 오히려 나를 일어나게 했던 것은 내 뒤에 졸졸 따라오는 ‘유리멘탈’이라는 타이틀이었다.
또 좌절해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유리멘탈’이라는 단어를 들을게 뻔했기 때문에 최대로 빨리 좌절 속에서 일어나려고 했었다.
4월의 어느날에 배우기 시작했던 윈드서핑, 그것을 배우면서 역시나 스키처럼 윈드서핑을 타는 내 실력은 늘어있었다.
무언가를 꾸준히 오래 동안 한다면 웬만하게 늘게 되어있다.
내 몸이 잘 따라와 주지 않아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배웠지만, 깨달음이 많았던 한달이었다!
(3: 뛸 때마다 홍당무가 되게 한: 조깅)
조깅은 나와 깊은 에피소드가 있는 운동 중 하나이다.
나는 오래 동안 뛰는 것을 매우, 끔찍이 싫어한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오랜 시간 장거리를 뛰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기껏해야 학원이나 학교에 지각 했을 때, 뛰는 3~5분이었다.
사실 3~5분만 뛰었는데도 뛰고 나면 숨쉬기가 벅찼다.
학교에서도 이름만 ‘체육’이었지 사실 체육이 아니었다.
체육을 잘하지 않아 재미가 없는 여자애들은 주로 앉아서 수다를 떨기 마련이었다.
또 더운 날에는 애들이 체육선생님을 설득해서 시원한 반에서 운동 관련 영상만
주구장창 보기도 했다.
그래서 체육시간은 내게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 내게 매일 조깅을 하라니, 지옥과도 다름없었다.
난 합숙 날에 난생처음 ‘조깅’이라는 운동을 해보게 되었다.
한국에서 많이 뛰어보지 않은 나는 역시나 5분도 되지 않아 숨이 가빠졌다.
그렇게 쉽게 가빠지자 나는 어느새 8~10m 정도 뒤쳐져 있는 나를 마주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15~20분 정도 조깅을 했는데 내 얼굴은 이미 홍당무처럼 새빨게져 있었다.
또한 추운날씨 였음에도 불구하고 땀이 삐질삐질 났다.
그렇게 첫 번째로 뛰었던 조깅은 내 머릿속에 좋지 않은 이미지로 기억되었다.
물론 여행 초반인 체코, 그리스에서도 조깅을 하긴 했었지만 정말 매일, 하루도 빼 먹지 않고 꾸준히, 조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나라는 바로 터키였다.
아마 그때 기준으로 마라톤이 약 두 달이 남았던거라 터키에서부터 마라톤 준비를 시작했던 것도 있었다.
심지어 페티에에서는 잘 뛰는 팀과 못 뛰는 팀으로 나눠서 조깅을 하기도 했다.
잘 뛰는 형님들을 보면 종종 얘기를 하며 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숨을 헐떡이기 바빠서 여유롭게 뛰는 형님들이 정말이지 대단해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뛰면서 숨이 안 차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에 비해 호흡소리부터가 확연하게 달랐다.
매번 조깅이 끝난 뒤 내 얼굴은 기본적으로 홍당무에다가 몽크의 ‘절규’속 표정보다 훨씬 더 일그러졌다.
숨도 제대로 쉬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날 조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준우형님께 조깅을 잘 뛰는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바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조깅이 힘들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순간 솔깃해져서 한번 시도해 봤었다.
직접 해보니 신체적으로는 여전히 힘들긴 했지만, 생각을 비우나 정신적으로는 조금이나마 덜 힘들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마라톤을 위해 2개월 정도를 4~5km씩 1시간을 거르지 않고 조깅을 하였다.
6월 13일,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막상 당일이 됐을 때, ‘내가 그 긴 코스를 다 달릴 수나 있을까?’ 싶었다.
물론 약 2개월 동안 연습해 온게 있긴 했지만, 마라톤 코스는 11.8km였다.
4~5km를 뛰는데 이렇게나 힘들어 했는데, 두배 가까이 되는 거리는 대체 어떻게 뛰지?
싶었다.
산악 마라톤이어서 생각보다 체력은 더 소모되었다.
마라톤을 뛰면서 나는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걷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는 마라톤 코스를 계속 달려야 한다는게 나를 더 지치게 했다.
그리고 요날은 내 인생 중에서 가장 빠르게 달린 날이기도 하다.
내 앞에서 가고 계시는 수경형님을 따라가는 속도를 맞추려다 보니 나도 덩달아 빠르게 갔던 것 같다.
마라톤을 모두 완주하자, 그동안 2개월 내내 마라톤을 위해 준비했던 고난과 여정이 하나의 필름처럼 내 머리를 차례차례 스쳐지나갔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후련함도 경험했고, 가장 큰 관문을 지나간 기분이었다.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아쉽게도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나는 내 선에서 최대로 빨리 달리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그에 비해 마지막으로 도착해서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참가할까 말까한 마라톤을 그것도 캐나다의 퀘벡까지 와서 참가하게 되다니, 정말 흔치않은 경험이었다.
확실히 가장 큰 관문을 지나가서 인지 그 뒤로 하는 조깅은 그나마 조금 만만해진 것 같다.
나는 대략 조깅을 여태껏 해 오면서
항상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바로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뒤에서 걸어갈까?’와 ‘너무 힘든데 포기 할까?’ 이런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생각들과, ‘그래도 곧 있으면 끝날 것 같은데 조금만 버텨볼까?’이런 긍정적인 생각, 말이다.
나는 솔직히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때가 더욱더 있다.
끝내 이런 생각들이 나를 더 뛰지 못하게 한 것도 있다.
실제로 나는 못 뛸거 같다는 생각을 한날에 금방 뒤로 뒤쳐졌고, 조깅이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날에는 끝내 뒤처지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나를 뒤처지지 않도록 또 나를 조종하였다.
그래서 마음먹기에 따라 내 행동의 결과도 달라진다고 느꼈다.
태도를 바꾸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대략 8개월 동안 조깅을 하면서 이제는 조깅이 정말 조금은 쉬워졌고 익숙해졌다.
물론 아직까지 조깅을 잘 뛰는 편에 속하지는 않지만, 조깅에 대해 자신감이 약간은 붙은 것 같다.
(4: 수비수는 제가 담당할게요!: 축구)
축구는 조깅과 비슷하게 거의 매일 했던 것 중 하나이다.
우리는 상상 조깅이 끝나고 나면 축구를 하였다.
축구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지만 잘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앞에 조깅에서 조금 언급하긴 했지만, 학교 체육시간에 수다를 떠는 여자애들에 비해,
남자애들은 체육시간에 엄청 활발했다.
특히 축구를 가장 여러 번 했는데 그때마다 여자애들은 가만히 서 있거나 걷기 십상이었다.
축구를 하려해도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이 못한다고 생각하여 끼워주지 않았다.
사실 축구를 같이 참여하고 싶어도 남자애들이 하는 축구를 보면 꽤나 격렬했다.
달리기는 또 엄청나게 빠른데다가, 서로 몸싸움까지 하며 막 치고 받으면서 해서 ‘쟤네들 속을 내가 어떻게 들어가?!’이러며 못 낀 것 같다.
내가 괜히 들어갔다가 같은팀에게 도움을 못 줄 것 같기도 하고, 그 격렬한 남자애들 속에서 같이 할만한 실력도 되지 않았기에 더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하반하에서 축구를 할 때 나도 역시 예전에 축구를 하면서 생긴 습성이 그대로 드러나듯이 가만히 서 있다가 얼버무린 기억이 많은 것 같다.
또 어느 순간 자연스레 ‘여자애들은 못하고 안 뜀’이런 타이틀이 붙었다.
이런 말을 듣고도 기분 나빠지지 않을 사람은 진짜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 말이 싫었다.
그런 탓인지 축구를 할 때마다 그 말이 계속 떠올랐고 나는 내가 못한다고 생각을 하지 않는데 남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내가 그 말처럼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남들이 그렇게 말할 때, 누군가는 ‘아, 그래도 여자애들 수비수 하나는 잘하지 않아?’이렇게 말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공격수에서는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니, 수비수라고 확실하게 잘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 이후로 나는 더 적극적으로 수비수에 집중하고, 잘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이후로 축구가 많이 즐거워졌고, 만약 예전에 누군가 축구를 하자고 권유할 탄식을 했다면, 이제는 ‘축구를 할 시간이네?!’이러면서 기대가 된다.
나는 이제 학교 체육시간 공을 무서워해서 피했던 그 아이가 아니다.
이제 그래도 공이 내 쪽으로 오면 ‘정면 돌파’를 할 수 있는 힘이 많이 길러졌으니, 하반하에서 기른 이 힘을 한국에서 써먹을 일만 남은 것이다.
<이제는 조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 영어)
영어는 현대사회에 바쁘게 살아가는 문명인에게 꼭 해야 하는 필수가 되어버린 것 중 하나이다.
영어하나만 잘한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되고, 엄청나게 인정해주는 사회가 된게 현실이다.
영어를 못하면 외국에서 아예 말할 수 없다.
영어가 주 언어인 미국, 호주, 영국, 캐나다뿐만 아니라 영어는 국제 언어다.
다른 언어를 못해도 영어만 잘하면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외국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또한 영어 쪽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도 요즘 엄청 방대하다.
그래서 모든 부모님들이 자식을 조기교육하기 바쁘시다.
이제는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인 시기,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도록 한다.
심지어 영어유치원도 생겼으니 말이다.
나는 남들보다 영어를 일찍 배우기 시작한 편이다.
어찌보면 5살 때부터 영어를 시작한 셈이다.
남들은 ‘어? 미국보다 왔어? 그럼 영어 잘하겠네?’ 이렇게들 하나같이 말하지만, 나는 발음만 남았지 그 외에 것은 전혀 남지 않았다.
핑계를 대자면, 그때 내 나이는 너무나 어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도 영어를 배웠고, 중학생이 되자 그새 영어의 난이도는 꽤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내 주위 애들은 중등영어로 모자라서 선행학습을 하기 바빴다.
나는 그 현실 속에서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편에 속했다.
학교에서 영어를 너무 지루하게 가르쳐 주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해가 다 안됐는데 선생님들은 진도 나가기에도 바쁘시니 배우는 속도가 느린 나를 선생님들이 일일이 알려주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학원은 좀 좋을까? 싶어서 학원도 따로 다녀봤지만 반대로 학원에서는 학생들을 일일이 가르쳐주기 바빠서 선생님께 질문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들께 여쭤봤다.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어, 잠시만 얘 좀 봐주고!’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
학생은 5명 정도인데 학생들 개개인을 1:1로 봐주는 시간이 너무 많아 질문이 있을 때마다 그에 맞는 답을 얻지 못했다.
내가 영어를 공교육뿐만 아니라 사교육으로도 배우려고 했던 이유는 영어의 필요성을 알기 때문이다.
영어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영어가 안 되면 외국인들과 소통도 불가능하고, 외국에서도 소통이 불가능하다.
또 공부하기 싫어도 요즘은 수능을 보기 위해서라도 영어를 무조건 공부해야 한다.
하반하에 처음 왔을 때, 필수과목 4개 중에서 3개가 영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듣고 살짝 걱정하기도 했다.
그만큼 영어를 중심으로 공부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나는 그때 이미 영어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단어시험을 본다느니, 리딩시험을 본다는 것에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초반에는 NO PASS도 꽤 여러번 받았었다.
내가 내 단어시험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남미의 에콰도르, 키토였다.
나는 그 주에 주중시험을 4회 중에서 1회 NO PASS를, 총 시험을 PASS 받았다. 그 주에 나는 단어시허메 정말 조금만 신경썼을 뿐인데 결과가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은 반전이었다.
그렇게 나는 뿌듯함과 동시에 비로소 PASS의 진정한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이다.
키토에서는 맛보기 식이었다면 진정한 즐거움을 본격적으로 알게 된 나라는 바로 이곳, 인도네시아의 발리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사고 싶은게 많았기에 마이너스가 가장 많은 과목인 단어에서 메꾸자고 생각했다.
단어를 외우는데 그 전보다 살짝만 신경을 쓴건데, 나는 그 주에 주중시험, 총 시험을 모두 PASS했다.
여기서 그 노력이라는 것은 정말 시험을 보기 전에 살짝만 재확인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단어를 다 외웠다고 생각되어도 2~3번씩 다시 읽어 본다거나, 조금이라도 발음이 헷갈린다면 사전에 다시 찾아본다거나 그런 것들이었다.
사실 별게 아닌듯해도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PASS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영어를 잘 못했다.
난 ‘정산’이라고 하는 새로운 동기가 생김으로써 영어에 욕심을 차차 보이게 되었다.
내게 또 다른 목표였던 ‘정산’이라는 수단이 있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영어는 본인이 얼마나 시간을 묻고, 노력하냐에 따라서 느는 정도가 완전히 다르다.
다 본인이 딱 하는 만큼 늘게 되어있다.
물론 내가 한국에서 시간을 묻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계속 반복되는 제자리 걸음일 것이다.
초급자의 상태처럼 차근차근, 사소한 것부터 내가 스스로 해보는 힘을 기르면 되지 않을까?
<생활의 달인이 되어보자: 일하는 것>
(1:내 생활력을 높여주잖아?: 설거지워커)
하반하에서 워커는 필수이다.
끼니를 먹으면서 끼니에 대해서 최소한의 자신의 목을 하자라는 의미에서 생긴 것이다.
워커는 설거지 워커, 시장워커, 요리워커로 나뉜다.
나는 이 워커에서 설거지워커를 선택했고 슬로바키아에서 볼리비아 포토시까지 대략 6개월 동안 쭉 설거지 워커만 했다.
남들은 다른 워커로 바꾸고, 이동할 때, 나는 설거지 워커에 대해 자부심이 좀 있었기에 바꾸지 않았다.
내가 처음부처 이렇게 설거지 워커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던건 아니다.
이제부터 그 6개월간 설거지 워커를 했던 여정을 풀어보겠다.
내가 워커를 선택할 때 설거지워커를 선택했던 이유는 내가 한국에서 했던 설거지와 별 다를게 없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서 이래 뵈도 가끔씩 설거지를 했다.
그래서 설거지워커를 택한 것도 있다.
나는 슬로바키아에서 처음 설거지에 대해 호준형님께 배웠다.
확실히 3년차의 경험이 있으셔서 그런지 비교적 호준형님께 쉽게 배웠던 것 같다.
초반에는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심할 정도로 손이 느렸다.
아직도 기억한다.
설거지 워커로써 일한 첫째 날에 내가 속한 팀의 설거지가 약 1시간 30분 만에 끝날 것을 말이다.
그날 써니쌤께 설거지를 왜 이리 오래하냐고 야단을 맞았기에 설거지하는 시간을 차츰 줄여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설거지 워커’로써 제일 많이 배우고, 손이 좀 빨라질 수 있었던 나라는 에콰도르의 과란다였다.
이때 당시 난 써니쌤, 대장님과 방을 같이 썼다.
설거지 워커였던 나, 지윤형님 둘이서 아침, 저녁 설거지를 했다.
둘이서 설거지 하기란, 힘들었다.
왜냐하면 보통 써니쌤, 대장님 방에서 모든 요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통 기름에 찌든 후라이팬, 냄비가 꽤 많았다.
나는 이때만 해도 엄청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과란다 때 써니쌤, 대장님 방을 안 썼더라면 내가 대체 언제 그렇게 많은 양의 설거지를 할 수 있었을까?
특히 나를 꼼꼼이 알려주신 것은 지윤형님 이었다.
내가 설거지에 대해 막히는게 있을 때마다 친절히 알려주셨으니 말이다.
2명이서 설거지를 하던 그때 우리는 매번 시간을 정해서 ‘15분 됐다, 설거지 시작한지!’ 이런식으로 목표시간을 정해서 손이 이때 확 빨라졌던 것 같다.
과란다에서 설거지에 대해 잘 알려주셨던 지윤형님께 감사드린다.
약 6개월 동안 설거지 워커만 하며 내가 한국에서 한 것은 ‘설거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26인분의 설거지를 꾸준히 해왔으니 이제는 가족끼리 먹은 4인분의 설거지거리는 정말 누워서 떡 먹기일 정도로 쉬울 것이다.
6개월 동안 설거지 워커를 하면서 가장 인정을 받아 기뻐했던 날을 고르자면, 과란다에서의 하루였을 것 같다.
그날, 이동 날 이었고, 우리는 짐도 못 챙긴 채 밤 늦게 12시 가까이 돼서 설거지가 끝났었다.
써니쌤께서는 개인의 일보다 공동의 일을 책임지고 했다고, 빚의 반을 삭감해주시는 상을 주셨다.
아무튼, 이제 나는 설거지 하는게 많이 익숙해졌으니 부모님을 한국에서 도와드려야지!
(2: 율데렐라~~~ 얼른 일해야지!!!!: 신데렐라,요리경연대회)
하반하에서의 신데렐라란, 시장워커를 제외한 아침요리워커, 아침설거지워커, 저녁요리워커, 저녁설거지워커 이렇게 다 투입되서 일하는 것이다.
써니쌤께서는 볼리비아 수크레 때 나하고 지윤형님에게 시키셨다.
아마 내가 일을 다방면에서, 고루고루 배우길 바라시는 마음에서 시키신 것 같았다.
내가 하반하에서 밑도 끝도없이 깨진 부분이 신데렐라이다.
일단 내가 전 주제인 ‘설거지 워커’에서 한번 언급했듯이, 나는 그동안 설거지 워커만 해왔었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요리워커도 하라니, ‘처음해보는 일인데 내가 당황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이때 신데렐라를 하면서 요리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던 기회가 아닐까 싶다.
나는 항상 워커장인 준혁형님께 여러 번 물어봤다.
‘형님, 이거는요?,이렇게 하는거 맞죠?,또 해야할게 뭐가 있어요?’이런식으로 끊임없이 여쭤보면서 익혔다.
끼니준비부터 뒷정리까지 전부 하면서 그동안 부모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준비하고, 또 정리하는 일을 하루에 3번씩이나 그것도 매일 빠짐없이 하셨을까?
내가 부모님의 노고를 가장 많이 느꼈던 날은 칠레 산티아고였다.
나는 그때도 써니쌤, 대장님과 같은 방을 썼다.
갑자기 어느날 써니쌤께서 ‘요리경연대회’를 각방마다 하자고 하셨고 나도 하게 되었다.
난 뭐를 만들까 고민하다가 내가 그나마 한국에서 만들어 봤던 볶음밥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긴장이 많이 됐다.
학교의 가장 우두머리신 대장님, 써니쌤을 위해서 요리를 내가 해야한다니, 괜시리 맛 없게 하면 어쩌지 생각도 했다.
나는 그냥 집에서 만들어 봤던 방법으로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나는 요리의 ‘ㅇ’자도, 칼질의 ‘ㅋ’자도 몰랐다.
자르는 폼도 내가 봐도 엄청 엉성했고, 속도도 거북이보다 더 심각하게 느렸기 때문이다.
나는 써니쌤께 볶음밥을 만들 때는 각 재료마다 살짝의 간을 봐야하는 것까지 배웠다.
그렇게 침착하게 그동안 배웠던 것들로 결국 볶음밥을 완성했다.
그랬더니 써니쌤, 대장님을 포함한 여러 쌤들과 학생들이 맛있다고 해주셔서 엄마의 마음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그건 그동안 내가 요리에 대해 헛으로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신데렐라를 하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일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멀티가 가능한 능력’이다.
자세히 설명해 보자면, 신데렐라는 신데렐라 일뿐만 아니라 본인할일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할 일 중에 필수과목도 들어가는데 신데렐라를 하면 필수과목 챙기기가 좀 어렵다.
왜냐하면, 워커일만 한다고 해도, 조금 벅차기 때문이다.
필수과목을 챙기기 어려워서 인지 종종 놓아버리게 되었던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1달 반 정도를 신데렐라 일을 하면서 나는 그동안 부모님을 집에서 도와드리겠다고 하면서 제대로 도와드리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매번 도와드리겠다고 말하며 ‘도와주는 척’을 하면서 언제나 ‘시늉’만 했을 뿐이다.
한국에 가서 부모님을 도와드리는 시늉이 아닌 제대로 해드려 기쁘게 해드려야지!!
<에필로그: 강화유리가 되었는가?>
8개월이 지난 지금, 내게 다시 물어봐야 할게 있다.
‘나는 강화유리가 되었는가?’이다.
나는 예전에 대장님께서 ‘~가져와’ 이렇게 말씀하실 때 예전에는 어버버하며 눈치를 보다가 야단맞기 바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몇 개 가져올까요?’ 또는 ‘어느크기로 자를까요?’ 이렇게 여쭤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혼나는게 이제는 별로 두렵지 않다.
혼나다고 해도 일단 여쭤보자, 혼나면 혼나느거지 뭐!‘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럼 이제 다시 내게 물어보자, ‘나는 강화유리가 되었는가?’ 이다.
나는 어쩌면 완벽한 강화유리는 되지 못했을 지라도 아주 조금은 강화유리에 가까워진 것 같다.
그렇게 대장님께 혼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여쭤볼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 말이다.
나는 이것을 토대로 혼나는 것, 실패하는 것, 무너지는 것을 한국에 가서 그대로 직면할 것이다.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고,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무서워서 돌아서 가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깨지는, 무너지는 과정이 있어야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나는 더 이상 유리멘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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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율아.....엄마가 우연히 보고 정말 엄청 놀랬다. 율이 맞아...???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고. 이런 생각들을 조리있게 재밌는 글로 풀어냈을까...?율이가 손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글재주도 있는 것 같다. 광고 카피라이터처럼 제목도 잘 뽑아내네..율이 이름이 영어로는 'Yuri'라 발음이 '유리'인데. '강화유리'라 비유한 것에서도 엄마는 빵 터졌다.^^
굳이 맞춤법 지적을 한다면 두 개가 눈에 띄는데 ^^
첫번째, 유리 '베짱'이 아니로 '배짱'이고..(베짱이는 곤충이름: 여치와 비슷하게 생긴),
두번째, 자신의 '목'이 아니고 '몫(역할같은)'. 이런 건 그냥 고치면 되는 거고..
엄마는...정말 SURPRISED!!
아.....이제서야 다는 답글이 너무 늦은 것 같긴 한데.... 생각한 것보다 문집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이번 글을 쓰면서 아쉬웠던 부분이 개인적으로 매우 많았는데......감사합니다~~!
-율이올림-
아주 작은 한 걸음이라도..엄마는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본다. 남들과 비교할 것 전혀 없고 율이 너 자신의 기준에서 조금씩 조금씩 성취하는 기쁨을 느꼈다는 것이...하반하에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인것 같구나.남은 기간 더 몸 조심하고.즐겁게.. 몸과 마음이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
앗, 여행 3일이 남았네요. 곧 찾아 뵙겠습니다. -율이올림-
율이가 글을 잘 쓰는구나.. 집안 어른들 생신 때 마다 율이의 카드 글이 솔직하고 재밌어서 히트를 치곤 했는데, 여전하네.
저는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본적이 한번도 없는데 이번에 문집 쓰면서 '어쩌면 내게 글 재주가 있을지도?!'라고생각했어요.
-율이올림-
아빠는 율이를 하반하에 보내기로 결정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자라온 환경에서 멀리 떨어져서 새로운 사람들과 한가족 처럼 살면서 작은 공동체의 역할과 인간관계에 대해 배우는 일, 운동을 통해서 몸을 건강하게 하고 몸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 지구의 여러문명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 대해 통시적인 시각을 갖는 일, 그리고 어려움에 직면할 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보기.. 등이 있었는데 율이가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장하다. 빨리 보고싶네..
답글을 쓰는 시점에서 3일 이라는 여행기간이 남았네요... 곧 찾아뵐게요. -율이올림-
율아. 이모가 이 글을 너에게 꼭 전해달라고 하셔서 전달~~
"율이 정말 마니 컸다..이모가 다 뿌듯하네..어쩜 이리 글을 잘 썼나..율이는 앞으로 점점 더 멋있어질꺼야.ㅎㅎ"
김강화유리야 안녕 나는 콘크리트멘탈을 갖고싶은 네 언니야. 일단.. 오늘 글을 엄마아빠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에 샤워 후 옷 입기도 전에 읽어봤는데 나 또한 대단히 놀랐다. 거의 대필 수준이더구나. 핵심을 앞에 놓으면서도 글이 술술 읽히는게 내가 자기소개서 쓴 것보다 잘 쓴듯한 생각도 들었단다...... (솔직히 너에게 글재주가 있을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사실 난 글쓰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는데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거든? 네 글은 솔직함이 묻어나서 좋은 것 같아. 너 한국 돌아오면 정말 너 본인이 쓴 글 맞는지 심문할 거야.. 그만큼 놀랐단 뜻이야. 흠.. 할 말이 떨어졌네. 그냥 뭐 엄마아빠는 널 정말
정말 사랑하고 (너도 알겠지만) 나는 너랑 참 많이도 싸웠지만 널 아끼니까 간섭한거란다 나는 좀 냉혈한인 면모도 있어서 관심 밖인 사람은 아예 고려조차 안하거든!
낼 모레 나는 내가 목표로 한 그 대학^^ 면접인데 네 글대로 강화유리를 뛰어넘는 콘크리트 멘탈을 기반으로 쓸데없이 떨지 않고. 내 자신을 가장 잘 어필하는. 있는 그대로를 뽐내고 올게 ㅋ 좋은 결과 기대할 수 있도록^.^ (LA 가야지..)
이게 아마 떨어져 있는 너에게 마지막으로 쓰는 장문편지가 되겠구나. 내가 엄마아빠보다 길고 성의있게 쓰다니,, 아파 죽겠는 손목으로 이만큼 쓰다니...
그에 걸맞는 답변 기대할게><
너의 엄청난 글재주를 선보이렴!
From. Demi Kim made of concrete!!
OMG
홀로서기를 제대로 하고 돌아오겠군요
축하해요
유리멘탈에서 강화유리로 가는 길은 도전의 연속이야~어렵고 힘들지만 도전하는 모습 정말 최고다~글도 참 재미있고 기발하네 다시봤어 율이^^
유리멘탈에서 강화유리로 다듬어지는 과정을 율이가 아주 잘 표현해 주었구나
요즘 율이의 밝고 생기 넘치는 표정이 나올수 있었던건 그러한 연습과 반복 수련으로 다듬어진 것이구나
애썼다 멋지다 율이~~!!
율이멘탈 마음에 드는 말이다 ㅎㅎ
1년 동안
열심히 운동하고 공부하고
성장했던것 같다
더 행복한 율이가 되어서
한국의 아름다운 청년으로
살아주길^^
멋진 타이틀에 율이만의 하반하 생활이 느껴지는 글이다. 운동도 영어도 생활 면까지 강화되었구나. 우물쭈물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는 모습이 좋다.
율이^^
하반하의 세계여행을 통해서,
가치있는 성장을 했구나^^
강화유리 멘탈은, 율이의, 꿈을 이루는,
가장 확실한 무기가 될거라생각한다.
글솜씨도 수준급이여서,
재밌게 잘 읽었어요.
앞으로도 율이 항상 응원할께요.
율이 화이팅♡
최근 율이 표정과 모습을 보면 자신감이 넘치고 활발해진거같아..많은 경험과 노력으로 아주 튼튼한 강화유리가 되어가는 율이 항상 응원할께~
네!! 그 응원받아 더더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율이올림-
폭풍성장한 율이 모습에 엄청 감동했어.
여행 초반에 자신감없고 무척 조심스럽던 율이가 부드럽고 능숙하게 자신을 표현해내는 것들이 아름답기까지...
이젠 스스로 성장싸이클을 돌릴 수 있게 성장한 율이 축하한다~~^^
아직도 그 성장싸이클을 돌리는 중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율이올림-
하반하의 생활은 마음도 정신도 몸도 성장시켰네요 돌아와 배움을 밑거름으로 더 성장하세요
성장할만한 길이 이제 창창하게 열린 기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율이올림-
율이 글 잘읽었어~그리고 수고많았어^^글을 쭉 읽으면서 많은 발전이있었구나 운동에서부터 설거지~마지막 더 이상 유리멘탈이 아니라고 자부하는 율이 참 보기좋다!한국에서도 이 멘탈놓치지않겠지?^^
당연합니다!! 한국에서도 멘탈 단단히 붙들어 잡겠습니다!! -율이올림-
중간에 엄마가 내 글 (김담 글) 고쳤는데 맞춤법 틀렸길래 다시 수정했어
내가 맞게 쓴 거였는데 말이야 ㅜㅜ
나는 맞춤법 전문가거든
너도 맞춤법을 살면서 꼭 지키길 바라 동생아
그려그려
혼나지 않는 것 보다. 혼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되는 것! 직면하고 헤쳐나가려고 노력하는 것! 이야~~ 율이, 진짜 중요한 것을 깨닫고, 강화유리 멘탈을 장착한 멋진 율이로 당당하게 서게되었구나!! 3월에 말이야.. 가늘가늘하고 어디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던 율이 모습을 기억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탱글탱글하고, 환하고, 통통튀고, 건강미까지 느껴지더라구. 자신감과 당당함이 율이를 이렇게 근사하게 바꿔준거겠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멋진 성장을 계속이어가길 응원한다. 화이팅! ^^
저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여기에 와서 아주 조금은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칭찬 감사합니다!!! -율이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