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강서 두루두루 스탬프투어" 총 8개 코스를 완주하고
인증서와 기념품을 받았다.
좀 힘들었지만 즐겁고 새롭게 알게된 것들도 많아 보람되었으며 뿌듯하였다.
특히 정선의 그림들과 허준의 동의보감 등이 많은 감동을 주었다.
오늘은 개화산의 호국충혼위로비,봉수대(모형),마곡 문화관(현재는 전시 종료됨),양천향교 등을 돌아보았다.
사진을 통해 즐겁게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호국충혼비
❤️신선바위^^^
❤️개화산 봉수대 모형
❤️현재는 전시 종료됨
❤️양천향교
❤️완주증과 기념품
※호국충혼비
강서구 내촌마을길 19-8(개화동 산 81-3 미타사 옆)번지에는 6·25한국전쟁 때 김포비행장을 지키던 육군제1사단 12연대 3대대의 대대장김무중 소령을 비롯한 전사자 1,100여명의 영령을 추모하는 호국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38선 접경의 황해도 연백지역 서부전선을 지키던 1사단 병력은 김포공항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들은 이곳 개화산에 방어진을 치고 인민군 6사단과 대항하였는데,13연대와15연대 일부를 포함한 부대원 1,100여명이 전사하였다.
6·25전쟁때 조국을 지키다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무명용사들. 애국충정을 기리며 국민들의 애국정신을 함양하고,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3년 12월31일 충혼비를 세웠으며, 매년 6월이면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양천향교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
양천향교는 조선시대 양천현의 향교로 태종 11년(1411)에 건립하였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포향교에 통합하였다가 해방 후에 분리하였다.1963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인해 경기도 양동면 가양리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1980년에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공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향교는 제례 공간인 대성전 영역과 교육 공간의 명륜당 영역으로 나눠 짓는다. 양천향교도 뒤편 언덕에 대성전을, 앞쪽으로 강당인 명륜당을두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그리고 송나라 4현,우리나라 18현의 신위를 모셨다. 향교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워 경계를 표시했다. 외삼문으로 통하는 계단 좌측에는 양천현 관아 주변에 있던 역대 현감들과 현령들의 선정비를 옮겨 두었다.
※개화산 봉수대
강서구의 유구한 역사를 품고 있는 개화산 봉수대는 현재 여기로부터 약 250여미터 떨어진 육군 제9175부대 인근에 봉수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1994년 11월 설치)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에 강서구에서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임을 알리기 위해 이 곳에 원형 복원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2013년 11월 개화산 봉수대 모형을 설치(높이 2m, 둘레 4m)하였다.
개화산 봉수대는 서해로 빠지는 한강서부와 서울을 잇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조선시대의 봉수대로써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제10권(1530년)」에 따르면 "개화산봉수(開花山烽燧)는 동쪽으로 남산제 5봉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김포현 북성산(北城山)과 응한다."라 하여 봉수가 있었음을 전 한다. 더구나 한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이 있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만일 남해안에 왜구가 쳐들어 온다면 전남 순천에서 봉화가 시작되어 서해안과 강화도를 거쳐 김포에 봉화가 올라오면 이곳 개화산에서 남산(목멱산) 제5봉수대로 신호를 보내게 되며, 그 정보는 병조(兵曹)에 종합 보고되고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承政院)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봉수는 전쟁 상황에 따라 5번을 올리는데 이상이 없는 평상시에는 1홰(炬),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침범하면 4화, 접전 중이면 5화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불이나 연기로 신호를 보내어 국가의 긴급한 상황을 알리던 봉수제도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달하였다. 이후 전신, 전화 등의 근대적인 통신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