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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9:16-30절) 부자 청년의 고민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에는 좋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일단 지식(知識)도 좋고, 권력(權力)도 너무나 좋고, 재물(財物)은 너무나도 좋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가지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유리한 인생을 살 수 있고, 여유가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는 것이 영생(永生)을 얻는데, 과연 도움이 될까? 성경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는 것이 결코 영생(永生)을 소유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 세상이 끝이 아니고, 우리가 죽은 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삶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고, 영생(永生)을 소유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많이 선택하겠습니까? 이런 질문이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데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첫째, 우리는 평생에 단 한 번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거나, 몇 번씩 인생을 돌아가면서 살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잘 살든, 못 살든, 단 한 번만 살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둘째,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만. 영생(永生)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가 다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인간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많은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한다면, 그는 영생(永生)을 누리고, 말할 수 없는 복(福)과 상급(賞給)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에게 중요한 결단의 숙제(宿題)가 남아 있습니다.
그 첫째가 내게 영생(永生)의 소망(所望)이 있느냐? 없느냐? 는 것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영생(永生)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실컷 잘 사는 것이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영생(永生)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즉 영생(永生)을 가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영생(永生)이 있느냐? 없느냐? 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요5:24절)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래서 이 사실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세상에서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요즘으로 생각하면, 고시(考試)에 합격하거나, 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博士)학위를 받고, 우리 사회에서 직책도 높고, 돈도 많은 사람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청년은 젊은데도 불구하고, 사회적 직책도 있고, 돈도 아주 많은 부자(富者)였습니다. 아마 이 젊은이라고 하면, 그 당시 사회의 사람들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처럼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람이라면, 부족하거나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사람이 겸손하게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가 무슨 선(善)한 일을 하면,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겠느냐? 고 질문을 했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런 사람이 자기를 찾아왔을 때, 굉장히 기뻐하면서 정중하게 대해 주고‘당신 같은 사람이 무슨 부족한 것이 있겠습니까? 좋은 일이나 더 많이 하십시오.’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유명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별로 반기지도 않으시고, 아주 쌀쌀맞게 대하시면서‘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부자 청년은‘근심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Ⅰ.부자 청년의 방문
19:16절)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부자(富者)청년이었는데, 여러 가지 점에서 많은 장점(長點)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젊은 나이에 유대 사회에서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사람은 유다의 눅18:18절 관리(官吏)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돈이 아주 많은 부자(富者)였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단히 집약적(集約的)으로 살았다는 점입니다.
즉 이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의 몇 배, 내지는 몇 십 배의 집중력(集中力)으로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부(富)와 명예(名譽)와 권력(權力)을 모두 손에 넣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단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남들보다 몇 배의 집중력(集中力)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회만 잘 잡는다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재능(才能)과 능력(能力)을 모두 동원해서 마치 기름을 짜듯 모든 힘을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이렇게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 젊은이가 성공하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남들에 비교할 수 없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이런 식으로 해서 젊은 나이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둘째로 이 부자 청년은 그런 성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생(永生)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더 부자(富者)가 되고, 더 성공할 수 있겠느냐? 는 것을 물으러 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으러 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이 젊은이가 돈이 많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우쭐거리는 가벼운 성격의 사람이 아니라, 대단히 진지한 성격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永生)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진지한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부자 청년은 자기가 갖고 있는 부(富)를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번 돈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흥청망청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식(子息)이 많아서 자식들에게 물려주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재물(財物)을 선(善)한 일을 위해 사용하고 싶은데,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선(善)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는지, 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이 정도로 실력이 있으면서도 진지하고, 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찾아볼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가 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의 훌륭한 능력과 성품을 가진 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그는 자신이 이룬 성공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루어 놓은 부(富)와 명성(名聲)에서부터 무슨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즉 부(富)와 성공(成功)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절대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매사에 전제(前提)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신의 성공(成功)이나 부(富)가 없어지면, 자기 자신 조차도 없어져버릴 정도로 그렇게 열심히 돈을 모았고, 성공(成功)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부(富)와 명성(名聲)은 이 사람 자체와 분리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둘째, 이 사람은 구원(救援)을 양적(量的)으로 선(善)을 많이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가진 것으로 얼마나 많은 선(善)을 행하느냐? 에 따라서 영생(永生)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내가 무슨 선(善)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공적사상’과 비슷한 것입니다. 즉 공(公)을 많이 쌓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思想)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宗敎)에 들어 있는 이런 사상(思想)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자기 혼자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공적(功績)을 쌓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우리의 공적(功績)은 구원에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셋째, 이 사람은 종교적(宗敎的)인 생활을 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이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았고, 그래서‘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등의 계명(誡命)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신앙(信仰)의 문제점이 무엇일까? 신앙생활은 잘하는데, 거기에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로 잰 것처럼 기계적으로 틀림없이 신앙생활 하는데, 거기에 따뜻함이나, 풍성함이나,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기계적으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는데 다행히도 이 사람은 이렇게 해서는 구원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무엇인가 좀 더 열심을 내야겠고, 무엇인가 좀 더 기도도 해야겠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것이며, 제대로 찾아온 것입니다.
Ⅱ.계명과 영생의 관계
17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은‘선한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 눅18:18절을 보면, 이 청년이 예수님을“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눅18:19절)....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17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면서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과연 예수님은 선하시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선(善)하십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선(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부자 청년에게‘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고 하신 것은‘도대체 네가 무엇을 안다고 나를 선하다 않다 말하느냐? 는 뜻입니다.
즉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善)의 개념(槪念)은 하나님의 선(善)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선하다’는 개념은 우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자기가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선(善)한 것입니다. 즉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기가 손해를 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남을 돕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선(善)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사나운 사자(獅子)도 자기 새끼들에게는 얼마든지 선(善)할 수 있습니다. 또 사냥한 것을 물고 와서 새끼들을 열심히 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을 보고 사자(獅子)에게‘선한 짐승’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종족(種族)을 보존하기 위한 본능적인 선(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사자(獅子)라는 생물은 이 세상에서 멸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선(善)에 대한 개념(槪念)은 인간의 종족(種族)을 보존하기 위한 본능적인 선(善)에 속하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선(善)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청년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재물(財物)로 예수님의 하시는 선(善)한 일을 도우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시는 선(善)한 일에 대하여 물질적(物質的)인 후원자(後援者)가 되고 싶은 생각까지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 청년에게‘너는 어찌하여 네가 갖고 있는 선의 개념을 가지고 나를 평가하려느냐?'는 강한 불만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선(善)에 대한 개념(槪念)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선(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善)의 개념(槪念)과는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善)의 개념이 수평적(水平的)인 것이라면,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선(善)의 개념(槪念)은 수직적(垂直的)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 선(善)입니다.
그 후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善)의 개념(槪念)은 사람들을 돕고, 잘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順從)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선(善)한 기준을 하나님의 뜻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생명(生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順從)해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17절)...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계명(誡命)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받는 조건이 될 수 있을까? 계명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기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성경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生命)의 양식(糧食)이기 때문입니다.
구원(救援)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물(膳物)로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선물(膳物)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마치 계명을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계명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구원받은 백성인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백성들은 계명(誡命)을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계명(誡命)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받은 백성들이 죄(罪)를 짓지 못하는 것은 그 죄(罪)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誡命)을 생각하면, 늘 고개가 숙여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으로는 계명을 다 지키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라는 말씀처럼 늘 언제나 완전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합니다.
즉 이 계명(誡命)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이렇게 묻습니다.
“어느 계명이오니이까”즉 하나님의 계명(誡命)을 전체(全體)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하나를 나누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18-19절)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내가 지켜야 할 계명은 어느 계명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아직까지 내가 지키지 못하고 있는 계명이 어느 것이냐? 는 뜻입니다. 즉 자기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많이 써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이 청년은 자신감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0절)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청년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계명을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다고 자신감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 청년이 얼마나 훌륭한 청년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이 정도로 세상 적으로 성공해서 부자(富者)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면, 거짓말도 많이 하고, 간음도 하고, 심지어는 경쟁자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제거(除去)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이런 계명들을 하나도 깨트리지 않고, 잘 지켰다고 자신감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감히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까? 이 청년은 정말 경건한 청년이요,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친 사람이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복(福)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린데 이 청년에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자기 말대로 크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즉 이 청년은 지금까지 자기 힘으로 계명을 지키며,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온갖 몸부림을 친 상태라는 뜻입니다. 즉 이 청년은 지금까지 지옥(地獄)에 가지 않기 위하여 계명(誡命)을 지키고, 심판(審判)을 받지 않으려고, 신앙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죄 용서의 확신이 없었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아들 됨의 자유(自由)가 없다는 점입니다. 마치 노예가 주인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포괄적(包括的)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고 판단해서 아버지의 뜻을 스스로 행합니다. 즉 아들은 지옥(地獄)가지 앓으려고, 아버지께 혼나지 않으려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은 주인의 명령을 소화해서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에게는 그런 자유(自由)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주인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라도 어기면, 책망을 받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유스러움이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합니다. 내가 내 자신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도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편 한 가지 죄(罪)를 지었을 때, 그동안 열심히 신앙생활 했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무너지게 되고 맙니다. 즉 ‘십년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모두 무너지고 만다.’는 말처럼, 한번 죄(罪)를 지으면, 그동안 열심히 믿었던 신앙이 한순간에 모두 무너져버리고,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즉 대학생 때나, 청년부 때, 회장도 하고, 선교사로 나간다고 했던 사람이 군대에 가거나, 시집을 가거나, 환경이 달라졌을 때, 아예 교회도 다니지 않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나의 열심만으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 시작이 되느냐? 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 앞에 두 손을 들고, 항복(降伏)을 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生命)이 들어와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Ⅱ.인격적으로 항복하라
예수님은 이 청년의 상태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 청년은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迎接)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모습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보습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적(僞善的) 교만(驕慢)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항복(降伏)하라고 하셨습니다.
21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영생(永生)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구원(救援)을 얻으려는 방법을 포기하고, 지금 이 순간이라도 나는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 앞에 시인(是認)하고, 항복(降伏)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가진 모든 것들이 구원받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삶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적장(敵將)에서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에 있는 사람이 남한에 오려면, 북한에서 누리던 모든 지위와 재산을 모두 다 포기해야만 한국에 올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자기가 누리고 있는 지위(地位)와 재산(財産)을 모두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삶을 예수님께 맡겨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소유(所有)를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의 삶이 세상 적으로는 성공적 삶이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한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제는 살든 죽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옛날 프란시스 교단(敎團)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財産)을 다 포기해아 했습니다.즉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財産)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오직 옷 한 벌만 가지고 가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가 그토록 수고해서 번 재산(財産)과 명성(名聲)을 모두 다 버리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즉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였습니다.
요즘 기독교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자기가 세상에서 가진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영생(永生)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을까?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해서 재산(財産)을 모두 다 포기하거나, 직장(直腸)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순간부터 나의 것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는 나의 것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것이며, 예수님이 포기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6:21절)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22절)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 이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재산(財産)을 포기한다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보화(寶貨)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젊은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종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에게 돈은 없지만, 영혼(靈魂)들을 살리는 능력이 있게 되고 말할 수 없는 성령의 능력과 기도의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돈으로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부자 청년은 돈이 많았기 때문에 돈이 없어지는 것을 크게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못한 것입니다.
즉 남들은 아무도 자기 재산(財産)을 버리지 않는 데, 왜 내가 버려야 하며 이 재산(財産)을 내가 얼마나 피땀 흘리면서 모은 것인데, 왜 남에게 주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복(福)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긁어모으는 것이 축복(祝福)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축복(祝福)은 하나님 앞에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이 세상에 끌고 오는 것이 진짜 축복입니다.
즉 하늘의 복(福)주머니를 터트려서 이 땅에 하나님의 축복(祝福)이 쏟아지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福)인 것입니다. 이 복(福)을 오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이 세상의 재물(財物)을 아주 큰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은 예수님이 그에게 주실 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가 성령의 강같이 흐르는 복(福)을 알았더라면,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의 능력을 주시며, 기도 응답의 복을 주시며, 영혼들을 살리는 능력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財物)의 욕심을 포기하지 못해서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지 못하고,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에게는 재물이 우상(偶像)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우상(偶像)을 버리지 않는 한 그에게는 진정한 신앙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24절)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단도 직업 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부자(富者)는 천국(天國)에 들어가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어려운가 하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히 과장(誇張)된 비유입니다.
어떻게 낙타가 그 작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것은 부자(富者)는 실제적으로 천국(天國)에 들어가기가 거의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재물(財物)을 모아서 부자(富者)가 되는 과정에서 정직(正直)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남에게 줄 것을 다 주어가면서 부자(富者)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즉 줄 것은 할 수 있는 대로 안 주고, 남의 것도 토지공사처럼 챙겨 넣고 해야 돈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부(富)가 싸이고 나면, 이것을 지키는 것이 돈을 모으는 것보다 더욱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좀 있다는 소문만 나면, 여기저기 손을 벌리는 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달라고 하는데마다 돈을 다 주다가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돈이 없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이 좀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자기의 돈을 의지하기 때문에 기도를 잘하지 않습니다. 행여 기도를 하더라도 돈을 더 잘 벌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지, 어려운 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도보다는 돈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과시(誇示)하는데 돈을 쓰려고 하지, 실제로 선(善)을 행하는 데는 아주 인색(吝嗇)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내는 데, 돈을 많이 쓰지, 남들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곳에 돈을 쓰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구원받는 부자(富者)가 되려면, 자기의 돈이 자기의 것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것을 받아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청지지 정신이 분명해야 합니다.
즉 자기가 갖고 있는 돈이 얼마인지도 잘 모르겠고, 오직 하나님께서 매 순간 주시는 것으로 살겠다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돈이나 자기 직책(職責)을 믿지 않으려면, 부자(富者)가 되고, 직책(職責)이 올라갈수록 더욱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아무래도 돈이 많아지거나, 사람들의 인정(認定)을 받게 되면, 교만(驕慢)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교만(驕慢)해지지 않으려면, 부자(富者)가 되는 이상으로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시간이 더욱 많아져야 합니다.
진정한 성도들은 너무 유명해 지거나, 너무 돈이 잘 벌려서 바빠지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쓸데없는 돈만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일을 더 많이 벌임으로 유명해지려고 하고, 더 바빠지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富者)가 천국(天國)가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25-26절)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심히 놀랐다는 것은 그들도 속으로 모두 다 부자(富者)가 되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혹은 모두 다 이 부자 청년을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이 아직 천국인인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고, 그의 재산(財産)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천국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자기들 생각이 모두 틀렸다면서 놀랐던 것입니다. 즉 이 당시에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신앙도 좋고, 이 세상에서도 성공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델이 어떤 사람일까? 신앙도 좋고, 세상 적으로도 성공하여 고시(考試)에 합격하거나,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돈도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옛날에는 복음(福音)이 가난한 자들에게 증거 된다고 했는데, 지금은 복음이 압구정동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적으로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과 천국을 둘 다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그 사람을‘옥상에 데려고 올라가 땅에 떨어뜨려서 떨어진 메주’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성공하기는 했는데, 어느 한 곳을 부족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것을 절대로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움켜쥐고서는 절대로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혹 가지고 있더라도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주님의 청지기가 되려면, 옥상에서 한번 떨어진 장애인이 되어야 합니다. 즉 자기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날뛰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겨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Ⅲ.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겨우 용기를 내어 자기들은 주님을 위하며, 모든 것을 버렸다고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27절)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이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이 부자 청년처럼 버릴 것이 많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쉽게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 적으로 이미 성공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욱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많은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버리기 전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유명해지기 전, 그리고 세상 적으로 성공하기 전에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예수를 제대로 믿기가 쉬운 것입니다. 즉 성공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과의 안면(顔面)때문에 아무것도 결단을 내릴 수 없게 됩니다.
제자들은 가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배(船)와 그물을 버리는 것이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부자 청년보다는 쉬웠습니다.
28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천국은 많은 것을 가진 순(順)이 아니라, 버린 순(順)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돈을 버린 사람은 버린 돈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을 위하여 명예(名譽)를 버린 사람은 버린 명예(名譽)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을 위하여 학벌(學罰)을 버린 사람은 버린 학벌(學罰)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버린 것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상이 바뀌게 된다는 것은 굳이 영원한 천국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 신약 시대도 주님을 위하여 버린 것이 있는 자들이 주인(主人)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더 많은 믿음을 주시고, 더 많은 말씀을 주시고, 더 많은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29-30절)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주님으로 인하여 손해(損害)보는 것은 결코 손해(損害)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만큼 능력으로 채움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충성하고, 봉사를 했다 하더라도 뒤에 다른 사람이 더 충성하면, 나는 순서에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올림픽에서 체조(體操)선수들이 아무리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하더라도 뒤에 선수가 더 잘해서 더 높은 점수를 받으면, 결국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금(金)메달을 확실히 받으려면,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신(獻身)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진 것이 천국(天國)에서도 활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천국에서도 유리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믿음을 갖는데, 불리한 경우가 많고,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되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아-멘
찬송가 246장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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