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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잠언 제14강
현숙한 여인
말씀 / 잠언 30,31장
요절 / 잠언 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동안 끝이 안 보일 것 같던 잠언을 마무리하는 주일입니다. 그동안 잠언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시고 은혜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동안 잠언에서 말씀한 지혜의 삶이 농축되어 있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시’ 한 편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살펴보면서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이 어떠한지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이 시간 현숙한 여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 배우므로 잠언이 말하는 지혜롭고 복된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나는 어떤 존재인가? (30:1-3)
30장은 아굴의 잠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해석하기 참 어려운 구절입니다. 아굴이라는 사람이 이디엘과 우갈이라는 사람에게 말한 것이라고 개역개정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 이렇게 ‘이디엘’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가 말하였다. ‘하나님, 저는 피곤합니다. 하나님, 저는 피곤합니다. 제가 어떻게 다시 힘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왜 이렇게 해석이 분분하냐면 히브리어 자음 본문을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3절과 문맥적으로 연결지어서 생각해 보면 좀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그동안 지혜와 총명을 얻고 배우기 위해서, 또 하나님을 알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지혜와 자신의 한계 앞에서 절망하여 피곤하고 지쳐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맥없이 탄식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면 좀 더 해석이 매끄럽습니다. 우리는 어릴 적 어린이집, 유치원을 비롯해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또는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많은 학문을 접하고 배우고 익히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우리는 배우면서 지혜와 지식의 지경을 넓혀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배우면 배울수록 정말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한계적인 사람인지, 내가 모르는 세계가 정말 많고 넓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자신을 자학하리만큼 자신의 한계를 철저히 깨닫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지혜가 해변의 모래 몇 알처럼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모습을 깊이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연륜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성경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많은 성경적 지식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동안 수년 동안 성경을 공부해 오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동안 성경 강의안을 쓰고 정리하고 자료들을 수집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책과 주석들을 살펴보면서 성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잘 공부하기 쉽지 않은 구약 몇 권을 제외하면 웬만한 성경은 다 강의안을 정리해 가지고 있어 그것을 보화처럼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무한하고 광대하심 앞에서, 한없는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 없고 한계적인지 깊이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 앞에서 아굴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잘 모른다고 지나친 자학으로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존재를 세상 피조물 그 무엇보다도 가장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교만을 버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주권을 신뢰해야 합니다. 제가 종종 틱톡 영상을 보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내 삶에 감사가 늘면 내가 겸손해지고 있다는 사인이고 불만이 늘면 내가 교만해지고 있다는 사인입니다.” 우리에게 다만 겸손한 마음 주셔서 하나님의 깊고 넓은 세계를 경험해 가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30:4,5)
4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아굴은 인간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다 하더라도 보지도 못한 하늘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바람을 모아 불게 하고 물을 한곳에 모으신 분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이런 모든 일들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우주의 질서를 하나님의 계획대로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와 생각을 초월하시는 전능한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어떠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여 티끌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저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순전하고 순결합니다. 오류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시편 12편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고 정제된 엑기스만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시편 19편 7-9절도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소성하게 하고 지혜롭게 하고 진리를 알게 하고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의롭고 영원합니다.
셋째,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30:6-9, 15-16, 18-20)
우리는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창조주이시고 지혜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6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지도 빼지도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4장 2절과 요한계시록 22장 18절, 이렇게 성경 처음 부분인 모세오경과 성경 제일 끝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급하지 않는 부분은 거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과 지식으로 재단하다 보면 자신의 수준에서밖에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기준에 맞추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겸손히 순종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겸손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욕망을 더하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겸손히 의지하여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우리의 산성이 되시고 성벽이 되어주십니다. 우리의 보호자요 피난처가 되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 또 나는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발견한 아굴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아굴은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거짓 없이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살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세상 욕심보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섬기는 것을 가장 제일로 생각하며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세상 욕망을 향하는 우리에게 있어 꼭 필요한 기도입니다. 또 아굴은 기도합니다. 가난하게도 말고 부하게도 말고 딱 필요한 양식만 채워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부해지면 교만해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까, 하나님을 외면하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너무 가난하면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도둑질할 수도 있고 남의 것을 탐낼 수도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욕되게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돈 걱정하면 안 되나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전 외환은행 부행장 출신으로 목회자가 된 이상철 목사님이 젊은 세대들과 돈을 주제로 나눈 대화록입니다. 목사님은 여기서 오늘 본문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이 아굴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달라고 솔직하게 구하는 아굴의 정신을 목사님은 높이 삽니다. 목사님은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핵심 키워드는 균형’이라며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은 겸손히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를 거둬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아굴의 기도를 좋아하고 암송합니다. 우리의 소유보다는 우리 존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환경적인 부분보다 우리 내면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치관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주는 짧고도 심오한 기도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유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나님께 불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유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허물고 파괴하는 그 어떤 것도 멀리해야 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거머리가 족한 줄 알지 못하는 대명사로 언급되고 있을까요? 어릴 적 모내기 시즌에 논에서 모를 심을 때 오랜 시간 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거머리가 다리에 찰싹 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리가 쓰라리고 가렵고 상처 입은 것같이 아파서 쳐다보면 거머리가 피를 빨아 먹고 있었습니다. 거머리는 자기 덩치의 5배 정도의 피를 빨아 먹으며 부풀어 오릅니다. 여기 ‘다오 다오’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먹고자 하는 욕망으로 절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달라고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네 가지로 나온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올은 죽음의 세계로, 사람이 죽어도 죽어도 그만 죽고 그만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는 족족 다 받아들입니다. 죽음의 세력은 만족함이 없습니다. 아이 배지 못하는 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를 가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이를 가지게 될 때까지 만족함이 없습니다. 물로 채울 수 없는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동 지역에서 아무리 비 오는 시즌이라 할지라도 오는 족족 스며들기 쉽습니다.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불은 끄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릴 것입니다. 거머리나 이 네 가지 예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은 어떻습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재물에 대한 욕심, 만족하지 못하는 삶의 환경들, 만족하지 못하는 세상 쾌락과 욕망, 정욕, 명예욕, 지배욕 등등에서 우리는 ‘조금만 더’를 외치며 아쉬워합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은 터진 물웅덩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물을 부어도 부어도 다 쏟아져 버립니다. 물을 마셔도 마셔도 목마릅니다. 물론 잠언에서는 이런 욕망들을 절제하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소유보다는 우리 존재 자체에, 또 소유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보다 더 마음 두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진정으로 만족하고 자족하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한 자취며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기 나오는 네 가지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공중에 독수리가 날아다니는 흔적을 알 수 없습니다. 바위 위로 뱀이 기어간 흔적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바다로 배가 지나가면 처음엔 물결이 남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배가 지나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보통 남자와 여자가 동침한 흔적도 잘 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음녀의 자취를 추가합니다. 물론 꼬리를 밟다 보면 들통날 수도 있겠지만 대개 사람들은 음행한 흔적을 잘 남기지 않고 애써 감추려고 합니다. 저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들을 나열하면서 죄를 애써 감추려 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요즘 사회는 음행의 죄를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중년에 불륜의 죄도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죄들을 사람들은 은밀하게 즐깁니다. 철저히 자신의 죄의 흔적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놓고 대낮에 죄를 저지르는 양심에 털 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은밀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는 음행뿐만 아니라 다른 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눈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는 있습니다. 또 용케 끝까지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은밀히 즐긴 죄라 할지라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 같아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내면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다 아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멀리하며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현숙한 여인 (31장)
잠언 31장은 르무엘 왕을 상대로 한 그의 어머니가 훈계한 잠언입니다. ‘르무엘’이란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르무엘 왕이 어떤 사람인지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아라비아 지역을 다스렸던 왕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 잠언은 왕위에 오른 아들에게 어머니가 주는 교훈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먼저 왕에게 성적 타락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옛날 절대 왕정 시대에서 왕은 수많은 여인을 거느릴 수 있었습니다. 자기 눈에 들면 아무 여인도 자신의 소유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성적 타락에 빠져들게 되고 그러다 보면 왕이 백성들의 안녕에는 관심이 없고 육신의 정욕만 채우는 데 마음을 허비하게 됩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런 왕을 만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됨을 봅니다. 어머니는 왕에게 정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 마음을 쓰라고 훈계합니다.
또 4절에 보면 포도주나 독주, 즉 술을 탐하지 말라고 훈계합니다. 술을 마시다 보면 판단력이 흐려져 국정을 혼란하게 할 수 있고 백성들의 재판에서 그릇되게 판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주는 마취제로 사용했고 포도주는 삶이 고달픈 서민들이 잠시라도 시름을 잊을 수 있도록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의 쾌락보다 백성들의 삶을 돌보는 목자 같은 삶을 살라고 가르칩니다.
10-31절은 ‘현숙한 여인에 대한 시’입니다.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현숙한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그리며 노래합니다. 사람을 돈이나 보석에 비유하는 것이 요즘에는 썩 좋은 비유는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현숙한 여인은 진주보다 값진 보배로운 여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여인은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습니다(12). 13절을 보면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여기 ‘부지런히’는 ‘기쁨으로’라는 의미인데 가족들을 위해 기쁨으로 옷도 만들고 열심히 일하는 여인입니다. 또 멀리까지 가서 장사해 양식들을 사옵니다(14). 그래서 그 여인의 집안에는 양식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여종들에게도 일을 정해 줍니다(15). 새벽녘부터 일어나 온 집안을 살피고 돌봅니다. 땅을 살 때도 지혜롭게 잘 살펴보고 사고 자기가 벌어들인 재물을 사용해 포도원을 일굽니다(16). 요즘 같으면 ‘투자의 신’입니다. 또 성실한 경영을 통해 재물을 모읍니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두 팔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일합니다(17).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고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합니다(18). 이 여인은 열심히 일해서 자기와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살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고달프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며 도와줍니다(20). 옛날 시골 어르신들, 특히 할머니들을 보면 집안과 자식들, 남편을 위해 헌신적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챙기지 않다가 골병든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헌신적으로 섬기면서도 자기를 위해서도 아름다운 이불을 짓고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습니다(22). 자기 것도 좋은 것으로 챙길 줄 아는 여인입니다. 이런 여인을 아내로 두었으니 남편의 지위가 올라가고 남편이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됩니다(23). 이 여인은 능력과 존귀함이 있어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노후를 생각하며 다만 웃고 있습니다(25). 이 여인은 말하는 것도 지혜롭게 하고 사랑을 베풀고 잠언에서 자주 말했던 것처럼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하는 여인입니다(26,27). 이런 여인은 자식들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남편은 ‘세상 최고의 아내’라고 칭찬합니다(28,29). 이런 여인은 아주 슈퍼 울트라우먼입니다.
잠언에서 그동안 언급했던 말씀이 본문의 ‘현숙한 여인의 시’에 농축되어 다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에 나타난 여인의 삶처럼 살 수만 있다면 잠언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잠언은 시작 부분에서도 그랬듯이 끝도 이런 말로 마무리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의 처음이나 끝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뭘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 끊임없이 배우며 경험하는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잠언을 통해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의 삶에 대해 배웠습니다. 또 이 ‘지혜’의 삶은 오늘 ‘현숙한 여인의 시’에 다 농축되어 나타납니다. 잠언에 나타난 ‘지혜로운 삶’, 지혜가 농축된 ‘현숙한 여인’과 같은 삶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 현숙한 여인, 지혜로운 어머니의 훈계,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 이 모두는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외모나 소유를 바라보기 쉬운 오늘날, 우리의 삶과 가치관이 잠언이 말하는 지혜로운 삶을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삶이 현숙한 여인과 같은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최고의 가치를 두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을 겸손히 배우고 닮아가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