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아름다운 섬나라 남해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23. 11:51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우리 산하 - 아름다운 섬나라 남해 인기멤버 2023.12.21. 21:45조회 3 댓글 0URL 복사 우리 산하 아름다운 섬나라 남해 『택리지』의 설명은 남해로 이어진다. 남해현(南海縣)은 경상도 고성 바다 가운데에 있어 육지에서 물길로 10리 거리다. 그 안에 있는 금산(錦山)의 작은 분지는 곧 최고운이 놀던 곳이며, 고운이 쓴 글씨가 아직도 석벽에 남아 있다. 경상남도 충무시, 삼천포시, 거제시, 통영시, 하동군, 남해군과 전라남도 여수시의 2개 도, 7개 시ㆍ군에 걸쳐 있는 남해 바다가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1968년이다. 이 지역은 해상 경관이 수려하고 어족 자원이 풍부하며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들이 많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은 통영군 한산도에서 시작하여 전라남도 여수에 이르는 수로에 펼쳐진 2438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드넓은 해상공원으로, 다도해ㆍ비진도ㆍ해금강 등을 포함하는 국내 8경의 하나인 일명 한려수도라 부른다. 한산수도, 축파수도, 장강수도, 충무운하, 동도만, 고성만, 자란만, 삼천포수도, 진주만, 노량수도, 여수만 등 무수히 많은 수도와 만을 이룬 곶과 반도, 섬 등으로 얽혀 있는 푸른 남해 바다의 거울같이 잔잔한 물위로 점점이 떠 있는 그림 같은 섬들, 호수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포구의 풍경, 해면 위를 날아드는 아름다운 갈매기의 모습들, 멀리 또 가까이 떠 있는 어선 사이를 오가는 크고 작은 여객선, 이 모두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되어 어우러진다. 남해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동국여지승람』「남해현」편 ‘형승’조에 “솔밭처럼 우뚝한 하늘 남쪽의 아름다운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산세가 아름답고 바닷물이 맑고 따뜻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이곳 한려수도의 한복판에 자리한 남해금산은 일찍이 자암(自菴) 김구가 한 점 신선의 점, 즉 일점선도(一點仙島)라고 불렀을 만큼 아름다운 섬 속의 산이다. 금산은 해발 681미터에 이르는 높지 않은 산이지만 예부터 금강산에 빗대어 ‘남해의 소금강’이라고 부를 만큼 경치가 빼어나다. 금산에서 바라본 한려수도 남해금산 쌍홍문 한려수도의 한복판에 자리한 남해금산은 일찍이 자암 김구가 한 점 신선의 점, 즉 일점선도(一點仙島)라고 불렀을 만큼 아름다운 섬 속의 산이다. 신라 때의 고승 원효가 683년(신문왕 3) 이 산 정상 부근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보광사(普光寺)라는 절을 지었는데, 이후 이 산 이름이 보광산이 되었다. 보광산이 오늘날 ‘비단산’이라는 뜻의 금산(錦山)으로 바뀌게 된 것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였다. 이성계는 왕이 되려는 청운의 뜻을 품고 백두산에 들어가 기도를 하였지만 백두산의 산신이 그의 기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두 번째로 지리산으로 들어갔지만 지리산의 산신도 들어주지 않자 이성계는 마지막으로 보광산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되게 해달라고 산신에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면 이 산을 비단으로 감싸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뒤 보광산의 은혜를 갚기 위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두르려 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심하던 이성계 앞에 한 승려가 묘안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비단으로 산을 감싼다는 것은 나라 경제가 허락하지 않으니 이름을 금산으로 지어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이성계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산 이름을 금산이라고 바꾸었다 한다. 보광사는 그 뒤 1660년에 현종이 왕실의 원당 사찰로 삼았는데, 그때부터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고, 1901년에 낙서와 신욱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1954년 동파스님이 다시 중수한 뒤 1969년에 이 절의 주지 양소황이 중건하였다. 이 절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인 보리암전삼층석탑과 간성각, 보광원,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1970년에 세운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다. 보리암의 해수관음보살상은 강화 보문사 관음보살상, 낙산사의 해수관음상과 더불어 치성을 드리면 효험을 본다고 알려져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음보살상으로 손꼽힌다. 극락전 아래쪽에는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올랐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이태조 기단이 있고 이태조 기단 옆에는 세 개의 바위로 된 삼불암(三佛庵)이 있다. 그 외에도 사선대, 제석봉, 촉대봉, 향로봉 등 제 나름의 사연과 이름을 지닌 금산 38경이 있으며 금산 정상에는 망대라고 부르는 봉수대가 있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여 적이 침입했음을 알렸던 금산 봉수대는 고려 영종 때 남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교대로 지켰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연기를 하나 피웠고, 적이 나타나면 둘, 가까이 접근하면 셋, 침공하면 넷, 접전 시에는 다섯으로 연락하였다. 구름이나 바람으로 인한 이상 기후에는 다음 봉수대까지 뛰어가서 알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봉수는 대체로 시간당 110킬로미터를 연락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양까지 7시간 정도 걸렸는데 통신 시설이 발달하면서 갑오경장이 있던 해인 1894년에 없어졌다. 남해금산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소설가와 시인들이 많은데 그중 서정인의 『산(山)』이라는 소설에서 주요 무대가 되었고, 이성복 시인의 아름다운 시 「남해금산(南海錦山)」도 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물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남해금산 아래에 그림처럼 빛나는 상주해수욕장이 있고 고개를 넘어가면 아름다운 포구인 미조포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미조항진(彌助項鎭)은 현의 동쪽 87리에 있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진이 설치되었다. 그 뒤에 왜적에게 함락되어 혁파했다가 가정(嘉靖) 임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석축이며, 둘레는 2146척이고, 높이는 11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미조항은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항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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