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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터너, 《칼레의 해변》, 1832년.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 《오버르스히의 일몰》, 1867년, 보이만스 판 뵈닝언 박물관 소장.
전시[편집]
1860년 사진작가 나다르의 집. 이곳에서 《인상, 해돋이》의 전시가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파리의 카퓌신 대로 35번지에 위치한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1874년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미술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익명 화가·조각가·판화가 협회'가 주최한 것으로, 클로드 모네도 이 전시회에서 본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모네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모네가 붙인 제목은 《아브르의 풍경》 (Vue du Havre)이었다. 그러나 도록 담당을 맡은 에드몽 르누아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동생)는 작품 속 풍경이 르아브르인지 알아볼 수 없다고 지적하며 다른 제목을 붙여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공감한 클로드 모네는 《인상》 (Impression)이란 단어를 넣으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에드몽 르누아르가 《해돋이》 (soleil levant)라는 부제를 즉석에서 덧붙여 도록에 기재하게 되었다.[9]
이에 대해 미술사학자 폴 스미스는 모네가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고 세부묘사가 부족했다는 점을 가리기 위해 '인상'이란 제목을 붙였다는 설을 내세웠으나, 제목과는 관련없이 똑같은 지적이 평론가들로부터 나왔기에 이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하다.[10]
평론가들의 반응[편집]
전시회를 관람한 평론가 대다수는 《인상, 해돋이》를 이번 전시의 대표작으로 평가하지 않았으며, 전시 후기 가운데 해당 그림이 언급된 것도 5건에 불과했다.[11] 그러나 전시회 자체와 모네의 출품작에 관한 평가를 통해, 새로운 미술운동의 발전과 모네의 작품활동에 관한 시각을 내놓은 평론가들이 많았다. 일례로 《라 레퓌블리크 프랑세즈》의 필리프 뷔르티는 전시회 개막을 전하는 기사에서, "적갈색 모직물로 덮인 벽과 아파트 같은 측면 햇빛 조명이 그림과 알맞다"며 각 작품이 공간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고 호평했다.[12]
본 작품을 언급한 평론 가운데 후대에 이르러 가장 유명해진 것은 루이 르루아가 1874년 4월 25일자 《샤리바리》지에 기고한 〈인상주의 전시회〉라는 평론이었다. 이 기사에서 르루아는 구시대 화가가 모네와 동료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충격받는 모습을 가정하여, 《인상, 해돋이》에 드러난 진보적인 화풍을 에둘러 비판하고 있다.[13]
"아, 저기 있다, 저기 있어!" 그는 98번 그림 앞에서 외쳤다. "나 이 사람 알지, 파파 뱅상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야! 이 그림은 뭐가 그려진 거지? 도록 좀 보자."
"인상, 해돋이."
"'인상'이라, 그런 것 같구만. 나도 막 그렇게 생각하던 참인데, 분명 어딘가에 인상이 있을 텐데... 그림을 참 제멋대로 대충 그렸구만! 이제 막 뽑은 벽지도 이런 바다 풍경보다 더 잘 나왔겠어."
르루아가 쓴 '인상주의' (Impressionnisme)라는 표현에 대해, 또다른 평론가 쥘앙투안 카스타냐리는 이들의 그림을 평가하기에 '인상주의'만한 용어도 없다며 긍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1874년 4월 29일자 《르 시클》에 기고한 〈카푸신대로의 전시회〉를 통해 카스타냐리는 "인상주의는 그들의 언어 속으로 들어왔다. 모네의 해돋이는 도록에 기재된 것처럼 풍경이 아니라 하나의 인상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현실은 뒤로 하고 이상주의의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높이 평가했다.[16]
입수 경로와 도난 사건[편집]
전시 직후 1874년 5월 모네의 친구이자 수집가였던 에르네스트 오셰데가 800프랑을 주고 구입했다.[17] 이후 오셰데가 파산하면서 소장품들도 사법경매를 통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는데, 당시 경매에 나섰던 수집가들이 터무니없이 낮은 경매가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어, 당대 인상주의 작품의 인기가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878년 조르주 드 벨리오가 210프랑에 구입한 뒤 소장하고 있었다가 1893년 사위로 맞이한 에르네스트 도노프 드 몽시 (Ernest Donop de Monchy)에게 물려주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그림을 개인 소장하고 있던 마지막 소유주로 남았다.[18] 1938년 마르모탕 모네 박물관에 임시 기탁되었다가 전쟁이 발발한 1940년 샹보르성으로 잠시 옮겨졌고,[19] 마침내 1957년 마르모탕 박물관에 최종 이관되었다.[20]
이 시기 그림의 제목에 대해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1940년 샹보르성으로 이전될 당시에는 《일몰》 (Coucher de soleil)이란 제목으로 등록되었으며, 1959년까지 《인상》 (Impression) 내지는 《인상, 해넘이》 (Impression, soleil couchant)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는 모네의 작품 다수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지금의 《인상, 해돋이》 (Impression, soleil levant)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1965년에 이르러서였다.
1985년에는 마르모탕 모네 박물관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해 모네의 다른 작품 4점, 르누아르 작품 2점과 함께 유실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1990년 12월 코르시카의 조직폭력배가 일본 야쿠자와 연계된 일본인 후지쿠마 신이치와 협상하던 와중에 그림을 입수하면서 되찾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2014년 마르모탕 모네 박물관은 이 작품을 주제로 한 특별전 〈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의 위대한 작품세계〉 (Impression soleil levant : l'Histoire vraie du chef-d'œuvre de Claude Monet)를 그해 9월 18일부터 2015년 1월 18일까지 주최하였다.[22]
유사 작품[편집]
모네는 이 작품 외에도 흐릿한 안개 속의 바다 풍경에서 태양을 점찍고 태양빛이 반사되는 소재의 그림을 2점 더 그렸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접기
클로드 모네회화연작인연박물관관련 작품관련 문서
출처[편집]
참고문헌[편집]
인용
Sainte-Adresse의 정원과 관련된 인용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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