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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사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영화가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차대전 당시 터키인과 맞서 싸웠던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인 영국군 장교 T.E. 로렌스의 삶을 바탕으로 만든 이 작품은 여러 개의 오스카상을 거머쥐며 야심만만하다는 말의 의미를 철저히 보여주었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수많은 감독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특히 스필버그와 역시 이 영화의 열광적인 팬인 마틴 스콜세지는 나중에 함께 이 작품을 원작의 길이(216분)로 복원하는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모리스 자르의 휩쓸어가는 듯한 주제곡과 로버트 볼트의 문학적인 대본, 사막에서 이루어진 프레디 영의 매혹적인 촬영, 거기다 수천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꼭 영화관의 대형 화면으로 보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70㎜ 필름으로 촬영된 형식은 주인공 피터 오툴의 푸른 눈동자부터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사막의 모래를 내리비추는 햇빛에 이르기까지 정밀한 세부표현을 가능하게 했지요. 사막의 신기루에서 나오는 오마 샤리프,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불붙인 성냥을 비추어보는 장면과 경탄스러운 아카바 공격 등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장관을 빚어냅니다. 컴퓨터 특수효과가 생겨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더욱 그러하죠.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촬영상, 편집상, 주제곡상, 음향상 등 7개 부분에 걸쳐 상을 받았지만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남우 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피터 오툴의 탈락은 이후 8회에 걸쳐 후보에 오르고 끝내 수상을 못하는 불운(?)의 전주곡이기도 했죠(그해에 남우주연상은 <앵무새 죽이기, 일명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의 그레고리 펙이 수상했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제작 자체가 기적인 영화입니다. 오마 샤리프가 언급했듯이 당시까지는 무명이었던 출연 배우들, 액션 장면도 거의 없고 여배우와의 로맨스도 없는 그러나 상영시간은 거의 4시간에 달하는 영화를, 그것도 사막에서 찍기 위해 엄청난 제작비가 소요된다는 말을 듣고도 돈을 투자한 제작자에게는 정말이지 존경심이 들 정도입니다. 아무리 감독이 데이비드 린이라고 해도 말이지요.
영화의 주인공인 T.E.로렌스는 실제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아랍 민족을 자극하여 독립 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여러 개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지적인 인물이자 아랍 문명을 사랑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의 제국주의를 도와줄 수 밖에 없었던 모순적인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드라마틱한 인물이지요.
영화 초반의 로렌스의 죽음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데이비드 린이 굳이 로렌스의 죽음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죠. 오토바이를 타고 엄청난 스피드로 달리다 속도를 통제하지 못해 사고로 사망한 로렌스는 그의 일생 역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들어 상처입고 실패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영웅의 몰락을 그리고 있죠.
하지만 제목이 무색하게도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로렌스가 아니라 사막 그 자체입니다. 실제 사막에서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화면은 관객들에게 경이로운 대리 체험을 경험하게 합니다. 4시간짜리 영화라고 하지만 스토리는 간결합니다.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채우는 것은 광활한 사막의 모래바람과 태양, 그 사이에 존재하는 베두인들입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의 현란한 편집이 난무하는 영화들은 발끝도 따라오지 못할 거대한 이상이 구현되는 장면들도 모두 사막 장면들입니다.
로렌스(피터 오툴)가 알리(오마 샤리프)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한번 보죠. 사막의 우물에서 물을 길던 로렌스와 안내인은 멀리 무언가를 보지만 관객들에게 보이는 건 머나먼 지평선입니다. 롱테이크(한 장면을 길게 찍는 영화기법)로 찍은 이 장면에서 지평선은 높은 사막의 온도로 아지랑이까지 겹치며 작은 점은 점점 커져 낙타를 탄 사람의 형상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사막의 위력을 영화 초반에 선보이고 중반에 로렌스가 네푸드 사막을 건너다 낙오한 카심을 구하기 위해 되돌아갔다 돌아올 때 좀 더 스펙터클하게 반복합니다. 이 2개의 장면은 반드시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 본래 감독이 의도했던 시각적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크게 2개의 이야기로 나뉩니다. 전반부에서 로렌스는 영국군 장교로 당시 터키의 지배에 반발하는 아랍 부족에게 파견되죠. 단순한 영국군의 일부로 아랍 부족을 편입시키려는 상관에게 반발해 파이잘 왕자(알렉 기네스)와 협상해 알리와 50명의 베두인들을 이끌고 네푸드 사막을 가로질러 전략적 요충지인 아카바를 점령합니다.
후반부에서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터키군과 싸우며 신문 기사를 통해 얻은 명성을 이용해 다마스커스를 점령 후 아랍의 독립을 염원하지만 결국 제국주의의 덫을 피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귀환길에 오릅니다.
전반부의 아카바 공략은 그야말로 시청각적 성찬입니다. 앞서 언급한 알리와 카심과의 사막에서의 조우 장면은 모두 전반부에 이루어지죠. 전반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막 횡단입니다. 로렌스와 안내인이 파이잘 왕자를 찾아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가는 장면, 파이잘 왕자와의 짧은 만남 후 네푸드 사막을 횡단하는데 140분을 모두 써버립니다.
대사도 그리 많지 않고 특별한 액션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영상으로 표현된 사막은 숨막히게 아름답습니다. 마치 관객 스스로 사방이 모래로 덮힌 광활한 사막의 여정에 함께 동참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한 정서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전반부가 로렌스와 아랍 부족의 영광을 노래했다면 후반부는 절정에 달했던 로렌스의 성공이 열강의 힘의 논리에 의해 부서지는 영웅의 좌절이자 몰락이야기입니다. 시원스러웠던 전반부의 진행에 비해 후반부는 로렌스의 심경을 반영하듯 혼란스럽습니다.
중요한 이벤트였던 다마스커스 공격도 아카바 공략과는 달리 간단하게 처리되고 오히려 다마스커스 정복 후 영국군과의 대립에 대해 더 큰 비중으로 소개. 이상주의자였던 로렌스의 접근법은 그의 조국이기도 했던 노회한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하기에는 순진했습니다.
아랍 부족과 영국 모두에게 배신당한 이 젊은 낭만주의자는 결국 자신의 몸을 돌려 본국으로의 귀환길에 오르게 됩니다.
피터 오툴이 영화의 타이틀 롤을 맡는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 영화의 주연이 알려지지 않는 무명 배우에게 돌아갔으니 그럴만도 하지요. 물론 나중에 우리는 피터 오툴이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 잘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무명의 배우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로렌스는 배우가 연기하기가 쉽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피터 오툴은 놀라운 통제력으로 로렌스 역할을 100% 이상 소화해 냅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의 말투, 몸짓 모두에서 로렌스가 동성애자임을 강하게 암시하죠.
기차 습격 성공 후 탈선된 기차 위에서 마치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던 그의 모습을 보시죠. 어린 하인 파리지와의 관계도 연인처럼 느껴집니다. 성정체성 외에도 로렌스의 마조히스트적인 면모에 괴로워하는 부분도 명연기 중 하나입니다. 촌락을 습격했던 터키군을 몰살시킬 때의 광기 어린 로렌스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뛰어난 감독의 영감을 스크린에 구현한 이상적인 영화입니다. 문학적인 향취와 스펙터클한 영상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보기 드문 영화이기도 하죠. 영화에서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믿는 부류와 활동사진으로서의 영상미가 중요하다고 믿는 부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입니다.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T. E. 로렌스의 저서 <지혜의 일곱 기둥> 머리말에서...
[ 간략한 줄거리 ]
영화는 T. E. 로렌스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뒤,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언급한 이후 그의 모험을 회상하는 구조로 진행됩니다. 1916년, 에집트에 있는 영국 정보국 소속 장교 로렌스는 아라비아에 정통하다는 이유로, 아랍 부족의 지원을 받아오라는 육군정보부의 명령을 받고 아라비아 반도 홍해에 면한 남쪽의 헤자즈 지역으로 파견됩니다.
이집트의 카이로를 출발하여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도중 그는 알리 족장과 만납니다. 이 때 로렌스는 우물물을 마셨다는 이유로 죄 없는 베두인족 안내인을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알리 족장의 비정한 모습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곳에서 만난 메디나에 있는 셰리프(태수) 후세인의 아들인 파이잘 왕자(알렉 기네스 분)는 사막을 지배하는 부족의 지도자이자 오스만 터어키에 대항하는 독립군 지휘자였습니다.로렌스는 자신의 상관인 브라이튼 대령의 의견과 달리, 수에즈 운하의 주요 통로인 아카바를 습격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파이잘 왕자는 자신의 부하를 내어주고, 알리 족장(오마 샤리프 분)과 함께 떠날 것을 허락합니다.
죽음의 사막 횡단 도중, 로렌스는 길을 잃고 뒤쳐진 부하 카심을 구하기 위해 일행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영웅심을 발휘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부족민들의 존경심과 신뢰를 얻습니다.사막에서 돌아온 뒤 로렌스는 알리의 부족과 라이벌인 하위탓 부족의 족장 아우다(안소니 퀸 분)를 꾀어내 아카바 습격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어냅니다.
그는 아랍 독립에 일조한 공로로 아랍민족으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적인 칭호를 얻으며 선지자적인 위치에 오릅니다.
이후 로렌스는 아랍 전사들을 이끌고 터키군과 싸우던 그는 남의 우물물을 마신 병사에게 총살을 하고, 확인사살까지 수차례 하는 잔인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강인한 지도자임을 확고히 합니다.선지자라는 확신에 찬 그의 행동은 점점 과장되어갑니다.
그러던 중 터키군에 잡혀 성적 고문을 당한 그는, 자신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히 절감하게 됩니다. 영국 정부의 소환을 받고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아랍민족연합회의를 이룩할 것을 꿈꾸며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하지만 아라비아 사막은 열강의 지도자들로 인해 정치적 타결점을 찾아 판세는 뒤바뀐 상태였습니다.
믿었던 파이잘 왕자마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난 뒤, 로렌스는 고문직을 사임합니다. 몇년 뒤 고향에서 그는 오토바이 사고로 죽습니다.
[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
* 어린 시절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1888년 8월 16일 웨일스의 작은 소도시 트리머독에서 태어났습니다.
로렌스는 어린 시절부터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했습니다. 그의 특별한 성격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원래 이름은 준남작 칭호를 받은 토마스 로버트 채프먼 경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본부인과 네 딸을 둔 가장이었는데, 하녀 사라 메이든과 사랑에 빠집니다.
* 멀리 보이는 로렌스의 생가
사랑과 가정을 동시에 지킬 수도 있었으련만, 그는 가정과 나라, 이름까지도 버리고 사라 메이든과 함께 도피하여 웨일스의 트리머독에 새 가정을 꾸렸습니다.
새 보금자리에서 그는 성을 로렌스로 바꾸고 5형제를 낳았습니다. 토마스는 둘째였습니다. 아버지가 본부인에게 이혼을 요청했으나 본부인이 응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로렌스 형제는 법적으로 사생아였습니다. 아버지는 사냥이나 낚시, 요트, 승마 등을 즐겼고, 어머니는 캘빈교도로서 의지가 강한 금욕주의자였습니다.
로렌스의 성격은 몽상가인 아버지와 금욕주의자인 어머니를 반반씩 닮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금욕주의자인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그는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았고, 일생 동안 여자를 멀리했습니다. 다만 몽상가라는 점 외에는 로렌스는 아버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로렌스는 승마를 빼고는 아버지의 귀족적인 취미를 거의 물려받지 않았습니다.로렌스는 어릴 때부터 자기 단련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피곤하면 눕는데, 이 로렌스는 철이 들 무렵부터 굶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자기가 먹을 걸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물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체력과 근력의 한계는 어디인지 끊임없이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체구는 상당히 작아 키가 166cm에 불과 했다고 합니다.
어린 로렌스는 나무 오르기나 자전거타기, 헤엄치기, 말타기 등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습니다. 운동신경이 대단히 발달했음에도 그는 단체경기를 싫어했습니다. 축구나 크리켓 따위를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구경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규칙이나 약속에 얽매이는 것, 많은 사람이 함께 모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극도로 싫어해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하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또한 섹스를 혐오하는 기이한 결벽증도 있어서, 로렌스는 평생 결혼은 물론 여자와 교제했던 기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서전에 나온 시들과 행적들을 보면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 반 동성애적 사회 시대에 맞추어 자신의 성욕을 억제하거나 섹스 전반을 기피한다고 외부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한 듯싶습니다.
어쨌든 로렌스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원만한 성격의 소년은 아니었고, 고독을 즐기며 혼자서 사색하는 외로운 몽상가였습니다. 방학 때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영국 각지는 물론 프랑스에도 다녀왔습니다. 주로 옛 교회와 성터를 답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중세의 고적이라는 고적은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고학 탐구에 재능을 발휘하고, 옥스퍼드 대학의 사학과에 진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이후 첩보원 신분 겸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대영박물관 원정대의 일원으로 특파되어, 1914년까지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지를 조사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로렌스는 아랍인들의 문화 및 언어를 배웠습니다. 원래는 이런 수순을 밟고 고고학자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 중동 탐사
대학 시절 만난 옥스퍼드의 박물관장 데이비드 조지 호가스는 로렌스를 중동지역으로 안내한 스승이었습니다. 스승은 로렌스에게 아랍어를 배울 것을 권했고, 그로 인해 로렌스의 아라비아에 대한 관심도 배가됩니다.
로렌스의 아라비아와의 직접적인 인연은 1909년 대학에서의 마지막 여름방학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졸업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진행 중이던 고대 히타이트 문명의 발굴 사업을 견학하기 위해 아라비아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스승인 호가스 박사는 여름에는 여행하기 좋지 않다며 반대했지만, 로렌스는 휴대품이라고는 카메라와 권총, 칫솔만 달랑 챙기고는 이웃 마을에 놀러 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 영화에서...
물론 가벼운 여행이 될 수는 없었지요. 말라리아에 걸린 적도 있었고, 위장에 탈이 난 적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지방 신문에 피살당했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한 아랍인이 로렌스의 구리 시계를 금시계로 착각하고 로렌스를 죽이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아랍인이 권총의 안전장치를 몰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호가스 박사의 추천으로 대영박물관 산하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원정대에 본격적으로 참가하였습니다. 1911년 초부터 1914년 여름까지, 로렌스는 줄곧 중동 지역에서 생활했습니다.
* 아카바 항구
작업이 끝나면 다른 연구원들은 귀국했지만, 로렌스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을 두루 훑고 다녔습니다. 어차피 혼자 생활하는 것을 즐겼던 그였기에 여행의 고독이, 특히 사막의 고독이 그에게는 오히려 오래 입은 옷처럼 편안했던 것입니다.
1914년 1월 로렌스는 영국군의 지원 아래 시나이 반도의 네게브 지방에 대한 고고학 탐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물론 이는 순수한 고고학 탐사가 아니라 영국군에게도 중요한 탐사였는데 향후 오스만과의 전쟁 돌입 시 오스만 군대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했기 때문에 이곳은 이집트 방위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 영화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로렌스는 바로 영국군에 입대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해 정보 장교로 임명되어 10월에 카이로에 있는 아랍 부서국으로 배치됩니다. 1915년이 되면서 아랍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여 아랍 반란의 기미가 솔솔 풍기기 시작합니다.
당시 영국은 사우디 헤자즈 지역의 태수였던 샤리프(아랍의 지도자) 후세인과 접촉하게 되는데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드는 대신 헤자즈,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포함한 아랍 국가에 대해 영국이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10월이 되도록 영국이 답을 내놓지 않자,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 편에 붙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안 그래도 갈리폴리 전역에서 곤욕을 치루고 있던 영국은 결국 헨리 맥마흔 경의 편지를 통해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주기로 합니다. 이에 따라 로렌스는 1916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파견되어, 아랍 반란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 영화에서...
* 1916년 아랍의 반란, 전투 참가
영국 군부는 아랍어도 능통하고 아랍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은 로렌스에게 터키에 대항할 아랍인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로렌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아랍인 지도자들을 불러 각자 병력을 모아 터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라고 종용하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군자금을 제공할 것이라도 약속합니다.
몇 몇은 거부했으며, 나머지는 이 일을 수행하기에는 힘이 충분치 않아 보였습니다. 결국 로렌스는 실망하여 카이로로 돌아 왔으나, 얼마되지 않아 그가 찾던 적임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메카의 대종주(大宗主)이자 헤자즈의 태수 후세인이었습니다.후세인은 모하메드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고 모든 아랍인들로부터 대단한 존경과 칭송을 받고 있었습니다.
* 중동에서 유적 탐험시...
그에게는 알리, 압둘라, 파이잘, 자이드의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알리와 파이잘은 터키군으로 복무하면서 터키군이 훈련한 아랍 병력을 이끌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터키군에서 이탈한 아랍 병력을 이끌고 사막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즉시 터키에 대항하는 이 봉기를 지원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후세인의 가족 중 누가 군대 지도자로 가장 적합한지 아는 것이 중요하므로 로렌스는 가족을 만나고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는 샤리프 후세인의 세 아들들과 면담을 하였는데 그중 3남인 파이잘이 아랍반란을 이끄는데 적격자로 결론을 내립니다. 이후 파이잘 왕자와 로렌스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로렌스는 파이잘과는 그럭저럭 잘 해 나갔으나 파이잘의 부하들은 전형적인 아랍인들이어서 외부인, 특히 이슬람 교도가 아닌 그를 떨떠름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는 아랍인들이 그를 신뢰하려면 가능한 한 아랍인들과 비슷하게 보이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는 아랍인의 왕족처럼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는 아랍어로만 말하였고 아랍 음식을 먹었으며, 낙타를 구하고, 맨발로 다니며 아랍의 벼룩을 견디어 냈으며, 아랍인들처럼 바닥에서 자고, 아랍인들처럼 사고했습니다. 이제 아랍인들은 그를 존경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그들의 일원이 되었고, 참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된 것입니다.
* 베르사이유에서 파이잘 왕자와...가운데 파이잘, 오른쪽이 로렌스
그 효과는 탁월해서 아랍인들은 곧 그가 요구할 때마다 기꺼이 싸웠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가 지불하는 금화를 좋아 했으며, 그들이 습격해서 얻는 돈, 음식, 총, 옷, 카페트, 보석따위의 전리품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은 타고난 전사(戰士)였습니다. 그들은 힘과 용기를 찬양했는데, 험한 사막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그것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파이잘 왕자와 로렌스가 세웠던 아랍 반란군의 전략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오스만 제국의 거점이었던 메디나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되, 점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메디나는 메카 다음으로 중요한 이슬람의 두번째 성지였고 당시 주둔 중이었던 오스만 군도 질병과 포위 속에 약체화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점령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디나를 점령하는 대신 시리아-메디나 간 철도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다님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메디나를 유지하기 위해 병력을 철도 복구 및 수비에 쓸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로 아랍 반란군의 거점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둘째는 아랍 반란군의 진격 방향으로 남쪽으로부터 시리아의 중심도시인 다마스쿠스를 향해 북진하는 것이었습니다.
* 화살표가 아카바
* 아카바 함락과 다마스쿠스 점령
1917년 로렌스는 아랍 반란군과 함께 홍해 근처 요충지였던 아카바 공략에 나섭니다. 로렌스와 아랍 반란군은 오스만 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막으로부터의 공격이었습니다.
2개월간의 피말리는 행군을 한 뒤 1917년 7월 6일 홍해의 북쪽 끝에 있는 아카바를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힘겨운 싸움이 계속되었지만, 1918년 10월에는 영국의 앨런비 장군의 부대와 협동 작전을 펼친 끝에 마침내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 사우디 헤자즈 지역, 파이잘 왕자의 아버지 샤리프 후세인의
본거지였으나 사우든 알리(현 사우디 왕족의 선조)에게 쫓겨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종전이 된 후, 각국의 이권을 계산하는 평화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국주의의 탐욕을 드러냈습니다. 로렌스는 아랍의 일은 세계 어느 나라도 간섭하지 말자고 주장했으나, 그 주장이 먹힐 리가 없었습니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파이잘을 국왕으로 한 시리아 아랍 왕국이 이후 탄생했지만 이 왕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내세운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하여 다마스쿠스를 점령해버리는 바람에 1920년 금새 증발해 버립니다. 아랍의 독립이라는 애초의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 터어키 군을 골탕먹인 헤자즈 철도(지금도 있습니다)
로렌스는 전쟁 막바지에 자신의 상관들에게 아랍 독립국 건설에 대해 지속적으로 설득하였으나 영, 프 양국은 이전에 맺은 협약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으며 결과적으로 로렌스가 바랐던 아랍의 진정한 독립을 박살내고 이들 지역들을 위임통치령, 보호령이라는 이름하에 사실상 영,프의 식민지로 삼아버렸습니다.
이상적인 결말을 꿈꾸었던 로렌스는 깊은 환멸을 느낍니다. 그는 국왕 조지 5세로부터의 훈장과 작위 수여를 거부하면서, 자신은 아랍인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불어넣었다며, 아랍 반란에서의 자기 역할은 자신에게나 영국에게나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 종전 후
이제 로렌스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나 전쟁이 끝나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 신분과 이름을 숨기고 은거해버립니다. 자신과 영국이 주도하였던 아랍의 독립 운동이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 지역에 대한 식민지 지배로 이어지면서 물거품이 되면서 실의 속에 빠져 버립니다.
그는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기 위해, 30대의 나이에 영국 공군에 몰래 이등병으로 입대합니다.
30세에 대령이었던 그는 35세에 계급을 낮추어 사병이 되었습니다. 1922년 8월 존 흄 로스라는 가명으로 공군에 입대한 것입니다. 이듬해 2월 신분이 밝혀져 제대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직 로렌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3월에는 다시 토마스 에드워드 쇼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육군 전차부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왜 이렇게 군대로 돌아가려 했을까요? 허울 좋은 명성만 무성한 ‘아라비아의 로렌스’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군대에 있으면, 복무기간 중에는 조용한 생활이 보장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시기에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의 나에겐 살기 위해 싸울 기력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예전의 로렌스와는 헤어졌습니다. 세상의 소문이라는 것이 만들어놓은 그 로렌스를 생각만 해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군대로 피신하고 싶은 소원을 정부도 들어주었습니다. 로렌스는 1935년 2월 말까지 10년의 병역 만기를 채우고 제대했습니다.
* 영화에서...
이제 그를 귀찮게 하는 요소는 없어졌습니다.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한 로렌스는 마음껏 은둔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대 후 그는 클라우즈힐의 코티지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지혜의 일곱 기둥>을 썼습니다. 생각해보면 지나온 세월은 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속력을 즐기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고독을 즐겼습니다.
바람을 만들면서 전속력으로 달리는 오토바이는 그에게 한껏 해방감을 안겨주었을 겁니다.
* 죽음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신나게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935년 5월 12일이었습니다.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전보를 치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데, 저 앞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년들이 보였습니다. 그들을 피해 핸들을 꺾는 순간 오토바이는 곤두박질치고 오토바이로부터 분리된 로렌스의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나동그라졌습니다.
의식을 잃은 그는 이튿날 육군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머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로렌스의 육체는 쉬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소생할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5월 19일, 20세기의 괴짜 영웅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5월 21일 모턴 교회에 매장되었습니다.
* 로렌스 묘지
* 인간 로렌스
그는 부드럽고 따뜻하며 의리 있고 가끔 고집을 부릴 줄 아는 친구 같은 존재였고, 더욱이 자신의 나라가 아닌 불우한 처지의 남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휴머니스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무작정 찬양할 수만은 없습니다. 어찌됐든 그는 영국 제국주의의 군인이었고, 그가 기여한 아랍 반란의 성공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아랍인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접근은 어떻게 보면 가장 교활한 제국주의의 발톱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우리에게 그 누구와도 다른 감동을 선사한 영웅입니다. 제국주의가 로렌스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긴 했지만 아랍인들을 향한 그의 마음은 순수했던 것입니다. 로렌스는 이상을 꿈꾼 몽상가였을 뿐이었습니다.
로렌스의 아랍 독립에 대한 열정은 단지 전략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아랍과 아랍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기꺼이 영국 군복을 벗어던지고 아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로렌스의 진정한 마음이 아랍인들에게 전달되었기에 그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터키군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아랍의 일은 세계 어느 나라도 간섭하지 말자"
로렌스의 아랍에 대한 마음이 순수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사실상 서구인의 오만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문제를 서양인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오만이었습니다. 실제로 로렌스는 “옥스퍼드 시절에 일생 동안 단 한 번쯤은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하는 일에 뛰어들고 싶다”(<지혜의 일곱 기둥>의 에필로그에서)라고 생각했음을 고백했습니다.
* 영화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했듯이, 영국이나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아랍은 터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제국주의 군대가 개입했을 때는 이권을 주장할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로렌스는 짐작했어야 했습니다. 터키의 지배를 벗어나 아랍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이니, 결과적으로 로렌스는 아라비아의 영웅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영웅이 된 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렌스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폄하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 고귀한 품성의 소유자였고, 잘못된 결과를 놓고 합리화하기보다는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행적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는 영국 왕실의 훈장도 사양했고, 작위 수여도 거부했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20세기의 가장 특별한 괴짜이자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영웅적인 행위는 결국 제국주의에 이바지하고 말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이상을 꿈꾼 몽상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회고록 <지혜의 일곱 기둥>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지만, 그 회고록은 자신이 결코 영웅이라는 것을 결코 주장하지 않습니다.
** 오리엔탈리즘
원래 유럽의 문화와 예술에서 나타난 동방취미(東方趣味)의 경향을 나타냈던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제국주의적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서양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태도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 전쟁, 협잡, 제국주의의 탐욕 그리고 현대 중동의 탄생 >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은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 와중에 여기저기 이중약속을 하면서 전후 중동지역을 혼란에 빠트립니다. 먼저 1915년 맥마흔-후세인 서한을 통하여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제국의 멸망 후에 완전한 독립을 약속합니다. 아랍인들의 반란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듬해에는 비밀리에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으면서 아랍지역을 갈라 먹겠다면서 뒷통수를 칩니다. 그리고 밸푸어 선언으로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내줍니다. 중동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끝내는 아랍인들과 로렌스를 좌절시킨 영국의 3중 속임수의 핵심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현대 중동의 탄생이라는 혼돈과 슬픔의 씨앗이었던 겁니다.
*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른 나눠먹기
* 3년 동안의 제국주의의 삽질-중동의 비극 탄생
1. 맥마흔 선언(1915년)
2.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년)
3. 밸푸어 선언(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이 독일 편에 서 있던 오스만제국 내 아랍인들의 반란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독립국가 건설 지지를 약속한 선언입니다.
맥마흔은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헤자즈의 태수였던 샤리프 후세인과 전시외교정책에 대한 서한을 주고 받았는데, 그 내용은 아랍인들이 참전하면 전쟁 후 오스만제국지역 내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과 전쟁 중이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중동 영토 안에 많은 아랍 부족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협력을 얻어내면 전쟁 중인 오스만 제국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으리란 판단을 합니다.
그리하여 시작된 것이 무함마드의 후손이며 메카의 대족장이었던 후세인과 영국의 이집트 고등판무관 맥마흔 사이에 맺어진 '맥마흔 선언'이란 이름의 비밀협정이었습니다.
* 영화에서...
이 선언은 쉽게 말해서 '반란 일으키면 아랍 국가 만들어주마'라는 내용이었고 통일왕국의 야심을 가지고 있던 후세인은 여기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당시 반란군에 파견된 영국의 연락책이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진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였습니다.
영국의 공세와 연결된 반란은 꽤나 성공적이어서 오스만 군을 죄다 몰아내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점령합니다.
그러나 영국은 한편으로는 이듬해 1916년에 사이크스-피코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합니다. 이 협정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사이의 비밀 협정으로 오스만제국을 분할하여 영국이 이라크ㆍ쿠웨이트를, 프랑스가 시리아ㆍ레바논을, 러시아가 터키 동부지역을 차지한다는 내용으로 이중외교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문제의 인물 중의 하나, 맥마흔
이 협정에 의거 프랑스는 이미 영국과 이 지역을 갈라먹자고 짝짜꿍을 해놨기 때문에 전후 이들 아랍 군을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레반트(現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확보했고, 영국의 배신으로 인해 통일 아랍 결성이 좌절된 헤자즈 가문의 에미르 후세인은 라이벌 사우드 가문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해 본거지인 메카에서 패주하여 쫓겨납니다.
* 에미르 후세인, 파이잘 왕자의 아버지,
사우디에서 쫓겨나 둘째 압둘라가 통치
하던 요르단으로 가서 사망
패망하여 쫓겨난 후세인의 아들들에게 영국은 자국령을 양도하였는데, 이래서 요르단 왕국(둘째 압둘라에게)과 이라크 왕국(세째 파이잘에게)이 건설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랍 세계의 분할을 완성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자신들의 보호령으로 삼아놨습니다. 현재의 중동 문제는 상당부분 이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영국만 탓하기도 곤란한 것이 헤자즈 왕국이 망해버린 건 성급한 칼리프 지위 선포로 중동 이슬람교도 전체의 반발을 부른 후세인의 삽질이 주된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헤자즈 가문이 사우드 가문에게 한 순간에 근거지를 다 털려버리고 개털이 되버린 걸 영국이 후원해서 그럴듯하게 왕국(요르단,이라크)을 세우도록 도와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 후세인의 3남 파이잘 왕자, 로렌스와 함께 오스만 군과
전투를 벌임. 종전후 시리아 왕국을 건설하고 왕으로 재
임했으나 프랑스군에 쫓겨남. 이후 영국이 이라크 국왕으
추대함. 영화에서 알렉 기네스가 이 역할을...
세 번째 해인 1917년에는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맥마흔선언과 모순되는 밸푸어선언을 하였습니다. 이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민족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미국 내 유대인을 움직여 미국을 제1차 세계대전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팔레스타인 인들의 웬수, 밸푸어
이러한 영국의 대중동정책은 전쟁의 불씨를 만들어 향후 두고두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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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타계한 피터오툴의 파란눈을
대한극장메서70미리 초대형
으로 보면서
어린나이에 영화의 정치적배경과 로롄스가 누군지
잘 모르고지나쳣으나
오늘 고박사글을 읽고
마니 깨우치게되서
기쁨이 한량없네
수고 마니하셨읍니다
변대감! 그래서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됐지요. 우리가 영화의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관람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걸 놓치게 되는지 안타까워서...하여튼
지나간 영화들이지만 이제 그 영화들의 역사적 배경을 상상하면 새삼스럽게
이해되고 깨달아지는지는 점이 많으리라 생각되네요. 그리고 배경을 알고보
면 재미도 배가되는 법이지요. 덤으로 역사적 지식도 얻게되고...ㅎㅎㅎ
열독해주어서 항상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