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32
7월25일 [연중 제1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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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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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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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엘리사 예언자는 기적의 예언자로 유명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만 14번인데, 기록되지 않은 기적들도 숱하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행한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들과 자주 겹칩니다. 요르단 강물 위를 걸어서 건넌 기적, 죽은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적, 나병환자를 치유한 기적, 그리고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인 기적 등입니다.
기적하면 빼놓은 수 없는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낙마하고 눈이 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삶이 180도 바뀌게 되는데, 이는 기적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그에게 엄청난 능력을 선물하십니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이 터치만 해도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습니다. 삼층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추락사한 청년 에우티코스를 소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더 큰 기적을 행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는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힘차게 주님 사랑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기쁘고 환한 얼굴로 초대교회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다시 또 있을까 싶습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소서 4장 1~3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분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직전 안드레아 사도는 무척이나 회의적이었고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복음 6장 9절)
안드레아 사도는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 그분이 지니신 권능에 대한 신앙이나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예수님을 예언자 중에 한 분이나 탁월한 랍비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 세상 만물의 주인이 예수님이란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적은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 기적으로 충분하고 흘러넘칩니다. 이제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더 이상 죽었던 사람이 되 살아나고 죽어가던 사람이 순식간에 정상화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또 다른 기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또 다른 누군가가 행할 기적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들이자 사도들인 우리 각자가 행할 기적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회복 불가능한 중병에 걸려 하루하루 삶과 죽음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억울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초 긍정 마인드로 살아가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오늘 교회는 어르신들과 조부모님들을 각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간 소홀했던 연로하신 부모님들의 영육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노인에 대한 배려나 존경이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시대를 한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럴수록 더 큰 그릇, 더 큰 거목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기댈 생각 아예 접고, 더 당당하고 더 힘차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노년의 삶도 멋지고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들 앞에 보여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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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LFbGRQ4G0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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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가지는 자는 유통업자다>
오늘은 요한복음의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공관복음과는 차별되게 요한복음의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사람들을 자리 잡고 앉게 하고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빵’은 보통 ‘말씀’을 상징합니다. 가르침일 수도 있고 은총이신 말씀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이런 면에서 제자들은 ‘말씀의 유통업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팔려고 하는 말씀에 관심을 두게 하고 팔고 남은 것들은 자신들의 몫이 됩니다. 그런데 결국 자신들의 몫이 가장 많습니다.
오늘은 제가 돈을 벌어본 적은 없지만 돈 버는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제로 사회에서 살아가시는 분들은 비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순수한 저의 생각이고 제 말이 틀려도 상관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아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 면에서 ‘유통업자’들이 가장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유통업자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제주도 여행 갔을 때 함께 간 누군가가 자연산 전복을 먹어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찾아다녀도 오분자기나 양식전복은 많이 보았어도 자연산은 찾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분당 횟집에 갔는데 주방장이 커다란 자연산 전복을 들고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잡은 것이냐고 물어보니 제주도에서 나온 것이라 했습니다. 자연산 전복은 크고 값도 비싸서 잡은 현지인들은 먹지 못하고 도시로 팔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비싸서 사 먹으려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어떻게 될까요? 유통업자가 처리해야 합니다. 사 먹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양만큼만 사기에 남는 것은 유통업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유통업자가 가장 많이 남는구나!’ 왜냐하면, 팔면서 이윤을 추구하고 또 남는 것들도 자신들의 몫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산하는 사람은 아까워서 못 먹고 사는 사람은 딱 먹을 만큼만 사기에 유통업자만 좋은 것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가치 있는 물건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유통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큰 자본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유통을 하며 재산과 기술을 축적하여 생산까지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것입니다.
하지만 남아봐야 처치 곤란한 상황이 되는 것들을 팔면 어떨까요? 스트레스가 심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학용품을 판다라고 가정해봅시다. 학용품을 팔고 많은 재고가 남았습니다. 결국, 이것은 유통하는 사람이 다 사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채소나 과일이 남아도 시간이 지나면 상하기에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절대로 위의 것들을 파시는 분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돈을 더 벌기 위해서라고 가정하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하에서, 저 같으면 이런 것보다는 남아도 가치가 되는 것을 팔 것 같습니다. 물론 처음에 시작하는 비용이 많이 들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비싼 명품 가방이나 옷, 혹은 금은보석을 팔다가 남으면 그것이 또 나중에라도 팔 수 있는 것이 되기에 사실 이런 것들을 파는 것이 더 돈을 벌기에 유리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파는 것이 축적될 수 있는 기술이라면 어떨까요? 컴퓨터 기술이나 백신 기술과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요? 이것들도 팔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축적된 기술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더 높은 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회사들은 가치와 기술을 생산하거나 유통하는 회사들입니다.
세계 대기업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과 같은 회사들은 기술을 팔면서도 그 기술을 축적하는 회사들이고 아마존이나 페이스북, 구글이나 알리바바와 같은 기업들은 가진 기술을 통해 사람을 이어주거나 물건을 유통해 주는 기업들입니다. 단순히 생산만 해서는 돈이 남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을 이어주거나 가치를 파는 이들이 가장 많이 남깁니다.
사제는 무엇을 파는 사람일까요? 바로 ‘말씀’을 파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최대한 많이 팔기 위해 신자들을 모으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다 보면 남기는 게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는 이 ‘말씀’은 생명처럼 고귀하고 또 축적되는 기술과 같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게 언제부터 강론을 썼느냐고 물으신 분이 있기에 생각해보니 주일 강론은 신학생 때부터 썼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한 강론의 가장 큰 덕을 본 사람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전하려는 말씀을 통해 제가 더 많이 깨닫게 되고 또 그동안 축적된 기술도 많습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이어주는 역할입니다. 유통업자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5천 명을 먹인 기적을 체험한 이들 중에 가장 큰 수혜자는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그것이 당신 살과 피라고 말씀하실 때 끝까지 그분 곁에 남고자 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말씀의 유통업자인 제자들뿐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오늘 기적만 보면 말씀의 가장 큰 수혜자는 그 말씀을 유통해 주는 복음 전파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보편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예언자직을 수행하기 위해 연결해 주는 유통업자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고프지 않고 항상 충만하여 기쁨과 평화를 누리려면 말씀을 이어주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의 가장 큰 수혜자는 평신도라도 성경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가르쳐 본 사람은 다 압니다. 자신이 가르치면서 더 배운다는 것을.
더 가지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우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알고 그것을 유통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세속의 즐거움입니까? 그런 것들은 가져도 더 가지고 싶고 공허하기만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젠 말씀의 유통업자가 되기로 마음먹으면 됩니다.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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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다운 배려인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이것을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취하는 것은 이 기적에 이어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주일까지 요한복음에서 언급되는 성체성사에 관한 것이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예언자 엘리사는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였고 그 음식이 남기까지 하였다.(2열왕 4,44 참조) 또 엘리사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자 제자가 놀랐던 것과(2열왕 4,43) 필립보의 경우와 비슷하다.(요한 6,7) 복음사가들은 구약의 여러 가지 기적들의 문학형식을 모방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복음: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예를 들면, 만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모세에 대해 언급하며(요한 6,31-33.49 참조), 장소에서도 따로 떨어진 산에서 기적을 행하시고(3절), 그때는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4절) 전하면서 구약의 이야기들을 모방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구원적 메시지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과거 구원의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빵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하여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신명 18,15) 그 예언자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이시다.’ 하고 말하였다.”(14절) 그리고 모세의 경우와 같이 예수께서도 산에서 기적을 행하셨고, 이 빵의 기적은(10절) 그러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파스카를 상징하고 있다. 즉 옛것의 “완성”이면서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새로움”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 빵의 기적은 바로 이 ‘새로움’을 이해하게 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13절)
빵을 나누어 받은 군중이 제1독서의 백 명이 아니라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10절)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나는 지나치게 거두어들일 수 없었으나(탈출 16,20) 예수께서는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12절) 모으라고 한 것도 이 기적의 특수성을 말해 준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외에 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 ‘메시아적 빵’은 이제 오천 명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짐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의 행동과 ‘감사드린다, eucharistéo’(11절)라는 뜻의 성체성사의 특성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새로움을 말해 준다. 요한복음에는 최후만찬을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15절) 한다. 군중들은 기적을 보고 감동하여 열광은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후에도 예수님을 찾은 것은 빵과 물질적 이익 때문에 모여들었다.(요한 6,26절 참조) 그들이 생각하고 찾고 있던 메시아는 권능을 가지고 무엇이나 거저 베풀어주시고 물질적인 것까지도 해결해주는 메시아였다. 즉 편의주의적 메시아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찾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만을 찾고 있다. 자기 자신만을 찾을 때, 그리스도를 계시해주는 표지로서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에 자기 자신을 여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그 잘못된 이해를 잠재우기 위해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과 군중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하신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을 깨닫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인 성체성사에 암시된 표지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현세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신앙은 진정한 빵의 의미를 왜곡하여 이기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며, 하느님을 자칫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기 쉽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사랑에 기인한 ‘단일성’을 말한다. 오늘 에페소서의 내용이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고 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신앙의 단일성에로 이끄는 요소들은 많다. 하나이시며 같은 성령,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의 성체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몸도 하나이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성체성사는 단일성과 사랑의 원동력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소년이 그것을 군중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기적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그들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의미를 즉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내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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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살기 위해서 먹는가? 먹기 위해서 사는가?” 음식을 두고 이런 장난스러운 질문을 하는 것이 실례같지만,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이른바 ‘맛집 투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저는 “살기 위해 먹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저마다 성향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가톨릭 신자라면 적어도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아니면 죽기 위해서 먹습니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신앙 안에서는 ‘어떻게 먹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먹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하여 두 가지 모습의 빵을 떠올려 봅니다. 한 가지는, 그저 자신의 배를 채우고자 저 혼자 숨기고 먹는 빵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부족하고 초라하지만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많은 사람 앞에 내어놓은 아이의 빵입니다. 빵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지만, 그 빵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함께 살아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초라한 빵이 아무 소용없다는 포기와 절망은, 다만 살기 위해서 먹는 빵일 뿐입니다. 반면에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레 내어놓은 아이의 빵은 작은 봉헌임에도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이 깃든 빵입니다. 그 빵을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살리는 빵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빵을 먹고 있습니까?
우리는 또 다른 빵을 먹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살기 위하여 먹는 빵이 아니고, 그것만 먹고 살아갈 수도 없는 빵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죽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내어놓고 봉헌하고 희생하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그 빵은 인간의 생명을 버리고 하느님의 생명을 선택하게 이끌어 줍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 성체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자신을 죽이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택하였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하여 먹는 것조차도 또한 누군가를 살리고자 먹는 것임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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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빵>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즉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메시아’로 계시하신 ‘표징’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그 표징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요한 6,2)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병을 고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뒤에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육신의 배부름’만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그 예언자’ 라는 말은, 모세가 약속했던 예언자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 유대인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또는 희망했던 메시아는 자기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지도자였습니다. (원래 모세가 한 말의 뜻은,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잘 실천하여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기를 거부하고 산으로 물러가신 것은, “빵만 보지 말고 나를 보아라.”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떨어져서 ‘혼자서’ 산으로 가신 것은, 아마도 제자들도 군중의 분위기에 휩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표징’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배가 고팠다는 말도 하지 않고, 시간이 늦었다는 말도 하지 않고, 제자들이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한 일도 생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빵의 기적’을 일으키려고 작정하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빵만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라는 의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5-6) 예수님께서 왜 특별히 필립보 사도를 지목하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이야기의 내용 전체를 생각하면, 예수님의 질문은 필립보 사도에게만 하신 질문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에게 하신 질문입니다. 여기서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라는 말은, “믿음을 끌어올려 주려고 하신 말씀이다.”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라는 말은, 제자들의 대답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이미 계획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질문, “어디에서?”의 답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서”입니다. (‘생명의 빵’은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빵의 기적’에 대해서 말할 때, 어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잘못된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기적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만일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어야만 ‘빵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러면 ‘전능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어도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어야 올바른 믿음입니다. 또 “어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자 그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내놓았고, 그래서 모두가 배불리 먹게 되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든 일이다.”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빵의 기적’은 처음에 빵과 물고기를 내놓은 아이가 일으킨 기적이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 아닙니다. ‘빵의 기적’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즉 사람들이 자기가 먹을 것을 각자 따로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이야기 속에서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아이가 자기의 빵과 물고기를 내놓은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인가?”라고 물을 사람들이 많을 텐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대한 ‘응답’으로, 또는 ‘참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빵의 기적 이야기’ 뒤로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과 그 말씀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신앙생활은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물론 지상에서 먹고사는 일도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한다면(인생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을 믿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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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원로사목자로 은퇴하신 지 13년이 되셨습니다. 저보다 24살 많으신 토끼띠십니다. 80이 넘으셨는데도 아주 건강하십니다. 신부님은 은퇴하신 후에도 바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수경 침을 배우셔서 아픈 사람에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수경 침을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멕시코, 필리핀에서도 수경 침을 알려 주셨다고 합니다. 틈틈이 철사를 이용해서 십자가를 만드셨습니다. 만드신 십자가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저도 하나 받아서 차에 걸어 놓았습니다. 은퇴 하신 후에도 아픈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시는 신부님을 존경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신부님에게 건강을 주신 것 같습니다. 나이를 숫자로 생각하면 주름이 늘지만 나이를 경험으로 생각하면 연륜이 쌓인다고 합니다. 은퇴를 한 후에도 봉사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직업에는 은퇴가 있지만 신앙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하느님께 갈 때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뉴저지의 뉴튼 수도원에는 한국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마리너스’ 수사님의 묘가 있습니다. 수사님은 20년 전인 2001년에 선종하였습니다. 수사님은 “피난민들 가운데에서 하느님 형상을 보았기 때문에 배에 태울 수 있었고 1만 4000명의 목숨을 구하면서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깨달아 수도원에 입회하게 됐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6.25전쟁 중 수많은 피란민을 승선시켜 구조한 이른바 ‘흥남철수 작전’의 주인공입니다. 당시 60명이 정원인 화물선에 피란민 1만 4005명을 태운 배는 성탄절인 12월 25일 경남 거제에 무사히 도착해 수많은 이들을 전쟁터에서 구했습니다. 당시 구조된 이들의 후손은 지금까지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되며, 당시 배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와 누나도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너스 수사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모범적으로 평가돼 시복시성 절차를 밟게 되었고, 지금 예비 조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마리너스 수사님의 시복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저는 은퇴하신 신부님과 마리너스 수사님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연민입니다. 또한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과 연민입니다. 그 사랑과 연민이 있었기에 눈이 먼 사람은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들리지 않던 사람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죽은 소녀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기적과 표징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연민이 있는 곳에는 기적과 표징이 일어납니다. 교황님께서는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국가에 백신을 나누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한국교회도 교황님의 권고에 적극 동참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있었던 G7 정상회담에서 10억 회 분의 백신을 가난한 나라에 제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바이러스는 백신이 보급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과 연민으로 서로를 보듬어주고, 아껴주면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표징의 시작은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셨습니다. 표징은 자발적인 나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어린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와 빵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와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걱정과 근심은 표징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자신 것을 지키려는 소유욕은 표징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사랑과 연민, 자발적인 나눔, 감사의 기도가 함께 만나면 표징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이태석 신부의 사랑과 연민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이 있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과 함께 했던 젊은이들 중 54명이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태석 신부님의 뒤를 이어서 어려운 이들을 위해, 아픈 이들을 위해 헌신 할 것입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 표징이 먼저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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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내 생각에 갇혀 있는 나,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하려는 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갇혀, 가지고 있는 음식으로는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배불리 먹은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더 채워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임금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께 믿음을 두지 못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갇혀 있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예수님을 바꾸려고 할 때는 없는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도 이 미사를 통해 우리를 영적으로 배불리시고자 빵이 되어 오시는 주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방금 우리는 너무도 잘 아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실 정도로 예수님은 위대한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굶주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핵심 구절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입니다.
지금까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통해 성체 성사에 대한 이야기도 참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빵의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제자들, 특히 필립보와 안드레아의 태도와 빵의 기적 후 군중들의 요구에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의 태도에서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있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하려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알지 못했으며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우리도 그렇게 내 생각에 갇혀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에 대해 살펴 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나를 벗어나 좀 더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예수님께서 진정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 보도록 합시다.
‘컬러 배스 효과(color bath effect)’라는 말을 아시는 지요? 여기서 'bath'는 색을 입힌다는 뜻으로 색깔을 매개로 아이디어를 만드는 발상법의 일종입니다. 무언가를 마음에 두면 그것이 유난히 눈에 잘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가령 잘 아는 사람이 새 차를 사게 되면 신기하게도 거리에서 같은 종류의 차가 눈에 잘 들어오게 됩니다.
예전 어느 봄날 명상의 집 주방 자매님과 사무원, 그리고 수사님들과 뒷산을 산책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따사로운 봄 기운과 파릇파릇한 연두 빛 나무들을 감상하며 산책로를 걸어가고 있는데 주방 자매님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이것도 먹을 수 있는 풀, 저것도 먹을 수 있는 햇순" 하시며 우리와 다른 시선으로 산책하고 있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의 관심은 요리였던 것입니다. 저도 글을 읽다가 토마스 머튼 이야기가 나오면 더 관심이 가게 됩니다.
컬러 배스 효과의 핵심은 관심과 집중입니다. 특정한 것에 관심을 갖고 집중을 하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 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좀 더 심리적인 의미에서 재해석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집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이 좋아 보이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그의 모든 것이 싫어 지고 심지어 잘하는 것도 삐딱하게 바라 보게 됩니다. 때로는 정말 이상한 심리로 좋아하면서도 관심을 받고자 상식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머튼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지 의문입니다”(새 명상의 씨, 223)라고 했나 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지만 때때로 내가 만난 예수님에 갇혀 그것이 전부인양 여기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굉장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오히려 믿음이 부족하고 한 쪽으로 치우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자신의 생각대로 바꾸려 하거나, 자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느님을 배척하거나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틀 안에서 자신이 보려는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자신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이러한 영적 컬러 배스 효과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는 먹을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다”고 답을 합니다. 맞는 대답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했음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라고 물었는데, 필립보는 “빵 값”을 따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많은 사람을 먹일 빵을 줄 수 있는 분인데, 필립보는 빵을 살 돈 걱정을 한 것이지요. 즉, 그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돈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어서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나서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하는 말은 이것이 저 많은 사람들이 먹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세상이 논리에 젖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군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빵을 배불리 먹은 후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에 탄복하여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참된 예언자의 표징은 화려한 모습의 임금이나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는 주님의 종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관심사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 안에도 필립보와 안드레아, 그리고 군중들처럼 내가 보고 싶은 예수님만을 보려는 경향, 내가 원하는 예수님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나아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느님에 갇혀 다른 이들도 그 잣대로 판단하고 심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연민의 마음은 잊은 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예수님 상에 따라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거부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이 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나누어 그들이 참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깨닫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그분 나라의 기쁨을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고 그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무엇보다 예수님께 관심과 집중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는 하느님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세상의 논리나 합리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선을 믿고 그분께 내가 가진 작은 보리 빵과 물고기를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통해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12광주리에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는 12 제자들처럼 남은 조각을 모으는 주님의 도구들입니다. 믿고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나머지는 그분이 채워 주실 것입니다.
지금 나는 필립보처럼 예수님이 아니라 돈에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요?
지금 나는 안드레아처럼 작고 사소한 것을 무시하며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지금 나는 군중들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빵을 배불리 먹고 놀라 내가 원하는 예수님을 만들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굶주린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영혼의 양식을 주시고 놀랍고 오묘한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길러 주시고 우리를 당신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을 몰라 보고 내 안에 갇혀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피해 다시 산으로 물러 가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그 옛날 군중들에서 처럼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 6, 26-27)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양식을 얻는 길은 예수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오늘도 마주 오는 미숙한 나와 미숙한 너를 성숙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남은 사랑의 12 광주리는 더 큰 사랑의 나눔을 위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어린 아이의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보다 작다하더라도 더 큰 주님의 사랑에 몽땅 내어 맡기도록 합시다. 아끼지 맙시다. ( )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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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손용창 베드로 신부님]
<사랑 안에서의 나눔>
지난번에 갓 서품을 받은 신부님께서 본당에 와서 미사를 봉헌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첫 미사라 신자분들께서 많이 오셨습니다. 미사 후에는 새 신부님의 안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신자분들께서 안수 전에 고해성사를 많이 보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그날 속이 좋지 않았는데, 성사를 주는 동안 제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성사를 드리다가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끝났으려니 하고 나가시는 신자분께 몇 분 남았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다섯 분 정도 남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 다섯 분의 신자가 미워졌습니다. 힘들게 다섯 분께 성사를 드리고 나가려는데 그 사이 두 분의 신자가 와 계셨습니다. 그 두 분이 저는 정말 미웠습니다. 성사를 다 드리고 사제관에 와서 “정말 쉽게 미움을 가질 수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게다가 먹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예수님께 봉헌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물론,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오천 명이 먹을 수 있었겠지만, 기적은 쉽게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적은 너무나 부족하고 미약하지만, 아이가 봉헌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먼저 나눌 때, 주님께서는 모두가 부족하지 않게 하여 주십니다. 바로 자기의 것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건 너무 부족하고 이건 미약한데…, 이걸 어떻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너무 미약하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주님께는 다르게 보입니다.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꺼이 주님께 봉헌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내가 봉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위한 작은 배려 역시 봉헌일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나눔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미움은 쉽게 우리 곁을 찾아오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을 멀리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한 주간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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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최견우 사도 요한 신부님]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동기로 표징을 연관시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란 명사를 쓰지 않고 ‘믿는다’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동사는 ‘안다’라는 동사와 병행해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믿는다’와 ‘안다’라는 동사는 동일한 대상을 목적으로 합니다. 아는 것은 믿는 행위 곧 신앙의 삶에 있어서 조건이자 요소가 됩니다.
믿음은 믿음의 내용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결단과 더불어 실제로 받아들이는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믿음에 따른 자기희생은 바로 하느님이 보여 주시는 삶의 원리요 구원의 길이며 사랑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을 실천한 사람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내놓은 음식이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열두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남겼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예수님의 기적이 기적이라면 어른들이 주저하는 사이에 한 아이가 가진 것을 모두 내놓은 사실 또한 기적입니다.
성경에서 자비는 ‘정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본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의 개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당신은 당신의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속한 것을 그에게 건네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선이란 호의가 아닌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해타산에 밝고 받는 것에만 익숙한 현대인들은 삶을 나누기보다 오늘 복음의 사도들처럼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만 관심을 둡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깊은 뜻과 삶의 원리는 바라보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빵만 생각 할 때가 많습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뜻이요, 능력이며 삶의 원리입니다. 희생 없이 결코 삶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일해서 죽은 무덤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흙과 더불어 적당히 노동을 하는 것이 최상의 건강비결입니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부족함을 느낀다면 과욕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자가 될수록 욕심이 생기고 과식을 하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사람의 행복은 편리하고 풍요로운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하고 부족한 것을 느낄 때에 훨씬 행복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삶에서 아이의 몇 조각 안 되는 빵을 기다리기보다 부자가 제공하는 대량의 빵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이 억데나리온도 다 채우지 못 할 탐욕 때문에 순수해야 할 교회의 본래 정신이 망가질까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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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작은 나눔이 갖는 큰 힘>
고사성어에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 사람이 밥 한 숟가락씩 보태면 한 사람 먹을 분량인 밥 한 그릇이 된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이 조금씩 힘을 모으면 큰 도움을 줄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요즘 대학생 중에는 이런 정신으로 작은 봉사와 나눔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우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는 기특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십시일밥’이라는 봉사단체는 대학생들이 공강 시간에 학생식당에 가서 주방일을 도우면, 일한 시간만큼의 급여를 식권으로 대신 받아 기부하고, 그렇게 모은 식권을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동료 학생들에게 전달합니다.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고 방법을 몰라 실천하지 못했던 학생들이 하루에 한두 시간 되는 짧은 시간을 내어놓음으로써 나눔의 기쁨과 봉사의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이 정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라고 핑계만 대는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한 사람의 작은 나눔과 희생이 가진 힘을 과소평가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권능을 지니고 계시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에게 어떻게 하면 먹을 것을 줄 수 있을지 물으시는 예수님께 자신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저 많은 군중을 어떻게 먹이겠느냐고,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시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넉넉지 못한데 그런 바람을 가진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사실 제자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먹을거리를 준비해갔던 많은 사람도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지요. 자기 가족이 먹을 양보다 넉넉히 가져오긴 했지만, 미처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해 굶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나눠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모두가 함께 나눠 가질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나’라도, 우리 가족이라도 배불리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눈치만 보던 사람들 마음을 크게 흔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자들에게 얼마 안 되는 음식을 전해 받으신 예수님이 당신의 배고픔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들은 백성들의 어려움은 나 몰라라 하고 자기 배를 먼저 불리려고 안달인데,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희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한 사람들은 비로소 마음을 열고 그분의 모습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래 아무리 사는 게 팍팍하고 여유가 없어도 나만 생각하면 안 되지’, ‘다 같이 나눠 먹으려면 내가 먹을 양이 모자라겠지만 모두 함께 기쁘게 먹는 게 하느님께서도 바라시는 일이 아닐까?’ 각자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눈 결과,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많은 양이 남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빵의 기적’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적인 빵으로 육신의 허기를 채운 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할 뿐, 그 본질은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며 기꺼이 나눔을 실천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배불리 먹은 체험을 통해 나눔이 주는 큰 기쁨을 깨달았고, 그 기쁨이 모두의 마음을 영적으로 충만하게 채워준 것입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큰 기적’을 일으키는 데에는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더 큰 희생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욕심에서 한 숟갈을 덜어내어 결핍으로 고통받는 이웃의 마음 그릇에 사랑 한 숟갈을 채워주면 됩니다.
나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하느님께서 쓰시도록 내어 맡기는 믿음과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작은 성의에 하느님께서 은총과 축복을 넉넉히 담아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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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17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빵”에 대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빵의 ‘모자람’과 ‘충만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2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하나인 참된 빵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모자람’과 ‘충만함’의 대조를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를 시험해보려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 곧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깨우치시고자 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이는 필요한 것이 “빵”이며, 그 “빵”을 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곧 모자람을 채울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십니다. 그것은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사실은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누구에게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돈으로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찾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안드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음을 이미 보았지만, 그도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용이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부자 어른이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 ‘모자람’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충만함’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가난하면서도 지니고 있는, 무능하면서도 전능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서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십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단순히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됩니다. 곧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요한 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외로이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요한 6,15)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당신 생명의 충만함을, 당신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입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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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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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6,6)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의 마음은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가엾은 마음'이 되어주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측은지심에서 시작된 기적이며, 영원한 예수님의 측은지심인 '성체성사의 예표'입니다.
또한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같은 믿음과 세례로 다시 태어나 하느님의 한 형제자매가 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소명인 '사랑의 나눔'의 예표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선포하신 '제1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교황께서는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제목의 담화를 통해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노인들을 언급하시면서, 젊은이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작은 이들을 돌보는 것, 손주들에게 신앙을 잘 전해주는 것이 노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더 좋은 대학을 보내고 사회에서 출세시키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을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녀들에게 사랑을 물려주는 것이고, 더 큰 사랑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는 있다가도 없어지지만, 사랑과 신앙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에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십시오."(에페4,2)
사랑과 나눔의 기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함께 묵상하면서, 나를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랑과 신앙을 나누고 전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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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밥>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밥>
나눠
먹어야
밥
함께
먹어야
밥
모두
먹어야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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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시골에 가면 수도가 없고 대신 펌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펌프질을 해서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펌프의 윗부분에 한 바가지의 물을 부어야 했습니다. 이 물의 이름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마중물’입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에 놀러 가서 처음 본 이 펌프는 상당히 낯설었습니다. 마중물을 넣지도 않고 그냥 펌프질만 했다가 아무런 물도 얻지 못했었지요. 그러나 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부으니, 엄청나게 많은 물을 펌프는 제게 주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이런 사랑의 샘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중물을 찾지 못해서 사랑의 샘에서 사랑을 끌어 올리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바로 주님께서 마중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을 보고 주님을 닮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에서 넘치는 사랑이 내 안에서 펑펑 쏟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빵의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모여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먼저 묻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예수님의 사랑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제자 필립보입니다. 하지만 자기들도 가지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기들도 쫄쫄 굶고 있는 상황에서 저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빵을 사 오라는 듯한 이 말씀에 답답했을 것입니다.
현실적인 상황을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안드레아가 아이가 가져온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이 먹기에도 너무나도 부족한 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봉헌을 원하셨습니다. 무조건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시는 주님이 아닌, 우리의 것을 먼저 나눌 때 주님께서는 더 큰 기적을 일으켜서 모두가 부족하지 않게 하십니다. 즉, 너무나 부족한 빵과 물고기라도 모두를 위해 봉헌할 때, 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 실천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너무 자그마한 사랑 실천이라면서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물질적인 봉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 지금 내 옆의 사람을 위한 작은 배려를 실천하는 것 역시 우리의 작은 봉헌이고,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작은 사랑의 실천이 마중물이 되어 주님의 커다란 기적을 일구어낼 수 있습니다. 내 사랑 실천이 마중물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사랑의 실천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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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
판토하의 ‘칠극’을 읽었습니다. 조선 시대,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한 책입니다. 칠극에서 으뜸가는 일곱 가지 죄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가톨릭 교리 안에서 ‘칠죄종’이라고 하지요.
죄와 악습을 낳는 죄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교만, 질투, 인색, 분노, 음식에 빠짐, 여색에 빠짐, 선에 게으름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를 이기는 일곱 가지 덕은 이렇습니다.
첫째, 겸양으로 교만을 이긴다.
둘째, 남을 아끼고 사랑하며 질투를 이긴다.
셋째, 재물을 희사하여 인색을 이긴다.
넷째, 인내를 길러 분노를 이긴다.
다섯째, 담백함으로 먹고 마시는 것에 빠지는 것을 이긴다.
여섯째, 욕망을 끊어서 여색에 빠지는 것을 이긴다.
일곱째, 천주의 일에 부지런히 힘 쏟아 선행에 게으른 것을 이긴다.
정말로 필요한 덕이 아닐까요? 사실 일곱 가지 죄에 자주 넘어가는 우리입니다. 그 유혹의 힘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이기는 덕이 꼭 필요합니다. 판도하의 ‘칠극’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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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느끼려면 그만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 하권 4장 42절-44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맏물로 만든 보리빵 스무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시종에게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내 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하느님의 손에 맡겨 드리면 분명히 달라집니다.
우리 삶에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저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계산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풍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러한 분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보잘것없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너무 부족해!’라는 생각을 접고, “나누어 주어라” 는 말씀만을 기억할 때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믿음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적을 낳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게 하려고(탈출 4,2-5),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마태 11,4-6)서 또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마르 16,20)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위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믿음을 기반으로 능력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비스러운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는 곳을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믿음을 성장시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비로운 것을 아무리 많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적의 체험은 특별한 체험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더 큰 신비한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는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져진 믿음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입니다. 어떤 신비한 현상이 기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또는 성모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얻는 것보다 하느님을, 성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며 우리를 위한 사랑에 목말라 하신 예수님의 삶을 오늘 내가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십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쫓지 말고 기적을 낳으시길 바랍니다. 기적이라는 현상을 과거에 묶어놓지 말고 오늘 내가 주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기쁨과 평화를 이루십시오. 그것이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6장 1절에서 15절을 보면, 배고픈 군중을 바라보는 예수님과는 달리 필립보는 빵을 살 돈을 걱정했고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실적인 자기입장에서 바라보고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계신 주님을 간과 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적인 계산을 먼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끊임없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 버리십시오! 그리하면 그 때 비로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보리빵 다섯 개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고 남은 조각으로 열 두 광주리를 가득 찼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불가능해 보여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가능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모두를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아도 내 놓을 수 있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아도 전체는 항상 부분보다 큽니다. 아무리 많아도 부분은 모두보다는 적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한 아이가 건네준 빵과 물고기를 사용하여 배고픈 이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셨습니다. 인간의 협력을 높이 사신 것입니다. 많든 적든, 크던 작던 상관없습니다. 주어진 모두를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먹고도 남았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더 크게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찮은 것이라고 보이는 것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엄청난 일이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2코린9,6). 하고 말했습니다. 은총을 심는 이는 은총을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둡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것이라도”하고 사랑을 담아 내 놓으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눔의 기적을 낳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풍요와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이 빵을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또 배고프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천 명이 배부르게 빵을 먹은 현상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이 사건을 통해 가르치신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능력을 지니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나눔의 기적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더더욱 미사 안에서 당신자신을 성체의 형상으로 끊임없이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적으로 살찌우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영성체를 할 때마다 사랑의 실천을 다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급하게 주님의 낙원을 꿈꾸고 기다리며 기적을 쫓지 말고 지금 여기서 주님처럼 사랑하고, 주님처럼 섬기고, 주님처럼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주님,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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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처럼 우리 모두 영원한 표징이 되어 삽시다>
-구원, 회개, 희망, 겸손-
어제가 보름이라 새벽 밤은 하늘엔 둥근 달에 별들도 많아 밝았고 대낮의 불볕더위와는 달리 많이 시원했습니다. 잠시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교황님의 담화문 내용중 ‘꿈과 기억,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바로 오늘 ‘제1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하여 발표하신 참 자상하고 세밀한 담화문 내용이 감동적이었습니다. 7월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에 가장 가까운 주일에 기념하니 바로 오늘입니다. 특히 교황님이 강조하신 꿈과 기억과 기도입니다.
“나이나 일, 혼자인지 가족이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꿈, 기억, 기도의 세가지 길을 따라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계속 꿈을 꿔야 한다. 정의, 평화, 연대라는 우리의 꿈은 젊은이들이 새로운 전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또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는 것은 모든 이의 참된 사명이며, 기억들은 더욱 인간적이고 환대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다. 우리의 기도는 매우 소중한 자원이며 빼앗겨서는 안되는 교회와 세상의 허파이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이라는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동안 세상과 교회를 위한 우리의 전구는 큰 가치를 지닌다.”
위 요지의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바로 성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꿈을, 기억을, 기도를 새롭게 하며 삶의 용기를 붇돋웁니다. 우리를 꿈꾸도록 자극하며 기억을 강화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게 합니다. 기도해야 꿈도, 기억도 살아납니다.
기적이 아닌 표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찾아야 할 것은 기적이 아니라 표징입니다. 표징은 보는 눈과 이해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영원한 실체를 상징하는 영원한 표징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사 예언자가 스무 개의 보리빵으로 100명을 먹인 일도 표징에 속하며, 오늘 복음에서 5000명을 배불리 먹인 일화도 표징에 속합니다. 이들 모두가 영원한 표징으로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을 꿈꾸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기도하게 합니다. 이런 표징들로 가득한 성서요 세상입니다. 표징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는 살아계신 주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원의 표징’인 예수님의 참으로 진지하고 간절한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그분이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따르는 많은 군중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시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요, 이미 주님은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잘 알고 계십니다. 바로 구원의 표징을 일으키기 직전입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구원의 표징이요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 때 우리 또한 이웃에게 구원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대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을 깨닫지 못한 필립보의 동문서답의 우려입니다. 이어 등장하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 아이가 회개의 표징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예수님 모습의 반영이자 참으로 믿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모인 사람들이 이 아이의 모습에 감동했을 것이며 부끄럽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아이의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순수한 모습에 하늘의 하느님도 땅의 사람들도 감동했음이 분명합니다.
감동이 부끄러움이 군중들을 회개로 이끌었을 것이며, 아마도 가진 것을 모두 내 놓고 함께 나눴을 겁입니다. 말그대로 십시일반十匙一飯의 기적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구원의 표징인 주님과 일치될수록 우리 또한 이웃에게 회개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교회가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이야기는 그대로 교회의 성체성사의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매일 교회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재현되는 영원한 구원의 표징인 빵의 기적입니다. 배불리 먹은 다음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광주리나 가득 찼다 합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의 풍요로운 은총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우리 하나하나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비로소 교회는 생생한 희망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치를 위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참 좋습니다. 그대로 전문을 인용합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끌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겸손-온유-인내심-사랑-평화-일치’의 삶중에 희망의 표징으로서 우리의 존재는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내적분열은 모든 죄악과 온갖 질병의 원천이 됩니다.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한 분 안에서 교회와 하나되어 살아갈 때 내적일치의 건강하고 온전한 삶이요 우리 하나하나가 희망의 표징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제 분수를 알아 겸손할 때,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으로 살 수 있습니다. 떠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할 때 잘 떠나는 것, 잘 물러나는 것 또한 겸손의 표징입니다. 복음 후반부의 예수님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처신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예수님의 표징을 오해한 무지한 군중들의 천박한 처신이 참 부끄럽습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때에 행해진 5천명을 먹이신 표징입니다. 바로 새로운 파스카의 주인공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겸손과 온유의 파스카 예수님을 그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화두처럼 주어지는 말씀, 마음 깊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으로 살기 위해 인생 광야여정중 고독과 침묵의 겸손은 필수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깊은 일치의 관상시간을 지니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꿈과 기억, 기도의 삶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 모두 당신의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겸손의 표징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당신은 손을 펼치시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주시나이다.”(시편 145,15-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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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가리키십니다.
제1독서 대목은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열왕 4,43)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어떤 사람이 봉헌한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를 백 명의 사람들에게 먹이라고 내어 줍니다. 하지만 사람 수에 비해 양이 터무니없이 적다보니 분부를 받은 시종은 사실 믿지 못했지요. 엘리사라고 산수를 못 하겠습니까만, 그가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모두가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깁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4)
복음사가는 도입부에 유다인의 파스카 축제를 언급함으로써 복선을 깔아 놓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놀라운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희생제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6)
많은 군중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실 생각부터 하십니다. 길고 험한 타향살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자녀들을 먼 발치에서 발견한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에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이렇겠지요.
"당신이 하시려는 일"
예수님은 먼저 군중에게 빵을 실제로 먹이려 하십니다. 육신의 허기를 채워 힘과 생명력을 북돋아주시려는 겁니다. 아울러 당신 스스로, 죄와 죽음으로 고통 받는 인류를 되살리실 희생 제물, 무죄한 어린양이 되시려는 계획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요한 6,9)
군중 안에 끼어 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마침 먹거리를 지니고 따라왔나 봅니다. 모르긴 해도 이 먹거리는 자신과 몇몇 일행을 위해 준비한 것이겠지요. 이 소박한 양식이 모든 이를 위한 마중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먼저 아이가 관대히 자기 것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황량한 광야에서 달리 양식을 구할 곳이 없고 그나마 수중의 돈마저 간당간당하다면 지금 지니고 있는 일용할 양식이 퍽 요긴할 텐데, 아이는 긴 생각 하지 않고 자기 음식을 내어놓습니다. 비록 어린 아이지만 예수님을 믿었고 허기 진 군중을 염려하시는 그분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이겠지요.
여분의 빵을 뒷주머니에 예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진 것 전부를 내놓는 행위는 바로 생명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아이의 봉헌은 미소하나마 파스카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온전한 자기 봉헌을 떠올려 줍니다.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3)
예수님의 감사 기도를 통해 아이의 빵과 물고기는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양식이 됩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다고 하지요. 더 보탤 필요 없이 넉넉하고 충만한 생명의 양식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가리킵니다. 열둘이라는 완전한 수로 남은 빵은 온 인류를 살리고도 남을 주님의 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렇게 인류를 위해 내어 주신 주님의 몸이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남기셨습니다. 이천 년을 이어오면서 인류가 받아 먹었고 지금 우리도 모시는 성체는 한 분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적은 양에서 오천 명을 먹일 양으로 늘어난 기적의 빵은 당신 몸을 내어 주신 생명의 양식으로 이어집니다. 생명의 빵은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 우리 온 인류를 한 몸으로 아우르고, 이 빵을 먹는 우리 모두는 한 몸이신 그리스도를 이루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인종, 국적, 성별, 나이, 빈부를 넘어 같은 몸을 받아먹는 한 식구지요. 우리가 누리는 영육의 모든 것이 서로 한 몸을 이루라고 안배하신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생명의 빵을 모시는 우리가 생명의 빵이 될 때 복음 속 빵의 기적이 비로소 지금 여기, 세상 곳곳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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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ppN5YIg9b4&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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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요한 6, 10)
사람이
있는 곳에
빵이 있다.
사람들 속에
빵이 있다.
사람이
빵이 된다.
서로에게
빵이 되는
만남이
참된
만남이다.
아름다운 삶은
빵의 삶으로
드러난다.
빵을 통해
사람이
누군지를
알게 된다.
빵은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을
정화하는
빵이다.
빵으로
하늘과 사람은
하나가 된다.
신앙은
우리가
빵이 되는
것이다.
빵으로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사랑의 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빵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빵이 되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주신다.
사람은 많아도
빵은 없다.
사랑은 많이
이야기하지만
우리에게
참된 사랑은
없다.
하느님께서
빵이 되셨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빵을 먹듯
살아있는
사람이란
빵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다.
빵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이 되고
빵이 되는
것이다.
빵이
사람을
만든다.
빵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빵을 진실로
믿는다.
사랑의 빵이
필요한
우리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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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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