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랫동안 춤을 인연으로 해서 알게 된 같은 댄스동호회 멤버였다.
그의 닉은 ‘윈드밀’ 이다. 영어 철자로는 ‘windmill’ 우리말로는 풍차...평소 나는 늘 그를 풍차라 불렀다.
풍차는 주로 성남시와 서울의 강동지역 근방에서 춤을 추었는 데 그 지역에서 가장 춤을 잘추는 베테랑급이었고
훤칠한 키가 외모로서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남자였다. 그의 말을 따르면 댄스경력 30년...그의 춤추는 모습은 풍차가
한번 바람의 동력을 받기 시작하면 세차게 돌아가듯 음악에 무르익어 흥에 도취된 후에는 말 그대로 훨훨 날랐다.
그의 댄스 이력이 말해 주듯이 실제로 춤에 관한 한 그는 늘 자신만만해 왔다. 그러나 그에게서 춤 이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선 별로 들은 기억이 없다. 그의 내면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냥 나혼자 만 추측할 따름이다. 단지 춤 이외의
것에 대해선 별 개념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춤을 떠나서는 그와 교류할 일이 별로 없으니 뭐 이러니 저러니 따질 것도 없다.
좌우간 어떤 춤이 됐든 간에 그와 한번이라도 춤을 췄단 여자들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진짜 춤을 잘 춘다고 한마디씩
했다. 나이는 나보다는 거의 10살 정도 적었지만 늘 내 콤플렉스의 하나이기도 했던 키는 나보다 훨씬 더 컸다.
다만 오랫동안 담배를 즐겨 왔던 탓으로 입가에 주름이 좀 있었고 얼굴 피부 상태로만 보면 나이와 상관없이 내가 더
나았던 것은 확실했다. 풍차는 사석에서 늘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 ‘닉네임’ 을 부르지 않고 형님이라 불렀다.
한때는 나도 사교든 댄포(댄스스포츠)등 어떤 춤이든 능숙하게 잘 추는 그를 무척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속칭 춤의 고수가 되어보겠다고 댄스계에서 제법 잘 알려진 프로 선생에게서 비싼 강습비 주어가며 개인레슨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잘 되지는 않았다.
언젠가 주말 토요일 오후 풍차와 나는 지하철 분당선 야탑역 근처의 G 콜라텍에 왔다. 그 전날 풍차는 오랜만에 내게
연락했었다. 춤을 제법 출 줄 아는 두 여자와 약속이 되어 있는 데 주말에 별 약속이 없으면 함께 어울리자는 것이었다.
나는 알았다고 하면서 그도 잘 알고 있는 평소 나와 같이 춤을 빌미로 가끔 함께 어울리는 한 친구와 같이 가면 어떻겠
냐고 물었다. 그러나 풍차는 여자 둘에 남자 셋 그러면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재미도 없어진다고 이번에는 나만 혼자
나오라고 얘기했다.
사실 따져고 보면 남녀가 둘씩 4명이 어울리는 게 더 자연스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성비(性比)가 맞지 않는다면
분위기가 묘하게 꼬일 염려도 있었다. 그날 나는 G 콜라텍에 약속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었다. 과연 생전 첨보는 듯한
두 여자와 풍차 등 세명은 먼저 도착해서 벌써 춤을 몇 곡 추고 난 직후였다.
풍차와는 이전부터 잘 아는 듯한 여자가 눈에 확 들어오는 예쁜 댄스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보랏빛 색에 물방울 줄무늬가 있는 첫 눈에 봐도 꽤나 값이 나가는 듯하게 보이는 것이 이제까지 내가 본 댄스복 중
가장 근사했던 것 같았다.
진주목걸이, 몸에 좋다는 고품격의 게르마늄 손팔찌, 에머랄드 원석반지와 보석 귀걸이...보통의 여자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부유하고 시간 많은 유한마담의 모습 그 자체였다. 나이는 5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고 눈가에 가는
잔주름 외에는 하얀피부가 한참 물이 오른 듯한 후덕한 모습의 여성이었다.
함께 온 친구 사이인 듯 다른 여자는 거기에 대비되듯 비교적 수수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어두운 색 계통의 댄스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목에 건 목걸이와 금반지 외에는 별 치장을 하지 안았고 키는 크지 않았고 좀 통통했다.
약간 은빛색의 머리칼은 스프레이를 뿌려서인지 적당히 부풀어져 있었다.
춤을 추지 않고 잠시 앉아 있는 동안에는 내내 말이 없이 무표정 했다. 옆에 앉아 있어도 없는 듯한 투명인간...
거기다 외적인 감정의 외적 표시가 전혀 차분한 표정...뭐라 말할까? 영어로 표현하자면 'Flat Affect' 라 할까?
첫인상은 그런 유형의 여자였다.
오늘은 풍차도 다른 날과는 달리 좀 유별나게 검정색 연미복 계통의 긴 조끼 속에 붉은색 넥타이를 맨 흰색
와이셔츠에 연말 댄스파티에나 입고 있을 듯한 평소보다는 좀 더 드러나게 차려입었다.
전날 풍차는 통화 중에 이렇게 얘기했었다. '형님 내일은 우리가 ‘댄스어필 하는 날입니다. 형님은 제 옆에 가만히
계시면서 모처럼 춤 실력 발휘하시면서 즐기시고 재밌게 노시면 됩니다.’
나는 속으로 웃고 말았지만 ‘아니 나보러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 는 얘기구먼 하고 내심 속으로 생각했었다.
자간 뭐 그게 크게 기분 나쁜 일도 아니었고 나야 모처럼 주말같이 놀 여자와 부담없이 좋아하는 춤이나 실컷 춰야
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댄스어필 ’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본듯한 생소한 낱말이었다. ‘섹스어필’ 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댄스어필 이라니? 자간 춤이든 섹스든 때로는 미친 듯이 열중해야 하는 거니까 비슷한 면도 충분히
있는 듯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곳에서 모처럼 몇 시간 동안 신나게 춤을 즐겼다.
풍차는 말할 것도 없고 두 여자 다 댄스 수준은 평균 이상이었다. 나는 주로 함께 따라온 상대편 여자 친구와 춤을
추었다. 그녀는 사교춤보다는 자이브와 룸바 등 라틴댄스가 수준급이었고 춤을 추지 않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말 그대로 발랄하게 흥겹게 댄스를 즐겼다.
또한 블루스와 같은 느린 댄스곡이 나오면 일부러 내 귀에 대고 알아들을 수 있는 톤으로 따라 불러곤 했다.
단지 춤만으로 만 따진다면 오랫동안 함께 춰도 결코 싫증나지 않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춤을 제외한다면
무슨 이유인지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물론 풍차 파트너였던 여자와도 몇곡 춤을 추었다. 함께 온 친구보다는 좀 서틀렀지만 이제 막 춤의 맛과 재미를 터득
해 가는 성숙단계라고 할까 그런 수준이었다. 우리 넷은 거의 3시간 정도를 놀았을 거다. 평소 땀이 별로 나지 않는 나
인데도 속 셔츠가 담으로 흠뻑 젖을 정도였다. 오후 5시 정도였다.
춤은 이제 고만 추고 나가서 목도 추길 겸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우선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각각의 탈의실로
갔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풍차는 그녀에 대해 대충 귀띔을 해주었다. 그녀는 모두가 들으면 알만한 P 식품기업 오너의
동생으로서 지금은 남편과 이혼하고 딸 하나와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어느날 우연히 어느 인터넷 동호회가 주관하는 댄스파티에서 알게 됐으며 그럭저럭 춤으로 만난지 거의 1년 남짓 되었
다고 했다. 우리 둘은 옷을 갈아입고 콜라텍 내 식당으로 가서 차가운 병맥주 한 병을 시켜놓고 나누어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저 여자를 만나게 된 거요?” 나는 물었다.
“형님도 잘 알다시피 이곳 콜라텍은 우선은 다른 거 다 제쳐놓고 매너있게 춤을 잘 춰야 하잔아요. ‘댄스어필’ 만 잘 하면
춤추는 여자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거고요. 각자 맘에 드느냐 들지 않느냐는 차후 문제지만요.”
이렇게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말을 해줬다. 그리고는 오늘 저녁 식사는 그 여자가 살 거라고 덧붙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