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욕의 허드슨 강을 건너는 것은 대부분 다리이지만 터널로 건너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터널이 ‘링컨터널’입니다. 터널은 어둡고, 터널은 좁고, 터널은 답답합니다. 하지만 터널의 끝이 보이면 점차 밝아집니다. 그리고 이내 밝고 환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대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향해 나아가는 ‘터널’과 같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지나온 터널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탄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깨어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적인 깨어남입니다. 우리는 이런 깨어남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구도의 길을 갈 때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이방인일지라도, 죄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대림 제2 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행동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만과 욕망의 언덕을 낮추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기와 질투의 언덕을 낮추는 것은 무엇일까요?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는 위로와 희망으로 채우면 좋겠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는 일치와 용서로 채우면 좋겠습니다. 교만과 욕망의 언덕은 겸손과 나눔으로 낮추면 좋겠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언덕은 인내와 관용으로 낮추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대림 제3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자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편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이들을 위로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제4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순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 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살았을 때는 낙원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