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에 관한 시 모음> 박형진의 '입춘단장' 외
----문학과 사람들에서---+ 입춘단장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박형진·농부 시인,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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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
담벼락 갈라진 틈을 비집고 올라온 새순들이
머리를 비비대며 봄을 기다린다.
시샘 많은 바람이 담벼락을 흔들고 지나가자
덜덜거리며 수음을 한다.
기다려야 한다.
진짜 봄이 올 때까지.
(이재봉·시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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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지금 입덧 중 - 입춘
하얀 겨울,
치마끈 풀어내고 살그머니
가슴에 작은 꽃씨 하나 품었다.
설 넘긴 해가 슬금슬금 담을 넘자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
토해도 토해도 앙금으로 내려앉는 금빛 햇살
매운 바람 속에 꼼지락거리던
꽃눈 하나 눈 비비고 있다.
(목필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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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立春
겨울 가뭄이 너무 오래다
오늘이 하마 입춘절(立春節)인데
어린 가지에는 단물이나 오르는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고
전하는 소문마다 살만한 건 그예 없고
속앓이 풀릴 기미는 감감하고
바람도 가뭄 타서 뒷길로 분다
오늘이 하마 입춘절(立春節)인데
겨울 가뭄이 너무 오래다
(강세화·시인,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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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
입춘 아침
할아버지는 사립 문설주에도
햇발 안 드는 뒤안 장지문에도
입춘방을 붙이셨다.
응달에는 눈이 쌓여
할아버지의 흰머리만큼이나 근심스러운데
마른 가지는 겨울바람이 남아
할아버지의 손등만큼이나 앙상한데
입춘방을 붙이셨다.
둘러보아도 봄소식은 알 길 없고
풀 그릇을 들고 종종거리다가
나는 보았다
하얀 수염 사이
어린아이 같은 할아버지의 웃음
봄이 오고 있음을 보았다
(정군수·시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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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
아직도
겨울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
산마루에도
계곡에도
들판에도
그 잔해가 늑장을 부리고 있다
겨울 속의 봄인가
봄 속의 겨울인가
간단없는 시간은
누구도
거꾸로 돌릴 수 없다
이미
봄은 문턱을 넘어왔다
지필묵을 준비 못해
'입춘대길'은
마음에만 새긴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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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
봄 앞에서 선 날
좋은 날만 있어라
행복한 날만 있어라
건강한 날만 있어라
딱히,
꼭은 아니더라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크게
욕심부리지 않을지니
새 봄에
우리 모두에게
그런 날들로 시작되는
날들이었으면 싶어라
매서운 추위 걷히고
밝은 햇살 가득 드리운
따스함으로
뾰족이 얼굴 내미는
새순처럼
삶의 희망이 꿈틀거리는
그런 날들이었으면 싶어라.
(유승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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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이야기
잔설 속에 숨어
밤새껏 몸을 뒤척이던
동백이
복수초가
여기저기서
새봄맞이 길을 닦느라
재잘거리는
입춘이야기를 듣는다.
이젠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태동
어차피 잘려나갈 겨울 긴 꼬리
아직은 좀 이른 셈인데
꽃망울을 붙들고
서로 밀치고
잡아당기며
서리꽃 앞다투어
지는 소리를 듣는다.
(박얼서·시인,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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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그 입춘 사이
겨울 내내 낡은 양철지붕은
펑펑 쏟아 붓는 함박눈을
잔치 집 밥상처럼 느긋이 먹어치우고선
입을 쓱쓱 닦고
그 자리에 하늘빛 고드름을 내어 달아
열두 가얏고 소리를
낙숫물과 함께 참 이쁘게 그려냈는데,
그 소리엔
막 글을 깨친
첫째의 책 읽는 소리도 함께 섞여 있어서
하루종일
듣기가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이런 날은
으레 일도 없이
빈둥빈둥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에게
그런 소리를
소중히 나누어 들으라고,
아내는 나를
무릎에 뉘여 놓고
오래도록
귓밥을 파주고 있었다
(곽진구·시인,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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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
입춘이란다
무심한 짧은치마는
한파를 비웃고
쇼윈도 마네킹은
화려한 꽃무늬로
입춘을 반긴다만
폭설로 고개 넘기를 포기하고
먼길을 우회하는
심정은 어쩔 것이냐
서울역 행려병자의
객사하는 산송장을
옆에 두고
속없는
세상 사람들의
봄 타령은 어쩔 것이냐
입춘이란다
체감하기 어려운
봄은 다가오는데
내 마음의 한파는
도무지 풀릴 줄 모르는데
입춘이란다.
(공석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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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 추위
평년보다 유별나게 행세했던 동장군
제 기념일인 대한도 모른 채 한눈 팔아
꼬리를 사리나 싶더니
그러면 그렇지 제 성깔 남 주랴
정상적으로 오르내리던 온도계 혈압이
봄의 문턱에서
지하로 급격히 추락해
온기 사라진 살벌한 세상
계절도 시기가 만만찮아
호락호락한 봄에게
그렇게 쉽사리
자리 비켜주기가 싫은 게야
다짜고짜 다가와 주물러대는
뻔뻔스런 봄의 끄나풀 아양 못 이겨
제풀에 지쳐 스러지는 그날까지
또, 얼마나 발악을 할는지
(권오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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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나무 입춘
채 겨울도 떠나지 못한 들판에서
미리 푸른 것들이야 계절의 전령으로
치지
오메, 벌써 봄인갑다, 그리 오두방정으로
좌정치 못하고 들썩거리기 시작할라치면
이제 돌아오는 봄을 어찌 다 견디겠는가
낮고 볼품없는 밭두렁이나 언덕배기로부터
코딱지풀꽃이나 냉이꽃, 술꽃들이 서둘러 피어나면
듬성듬성 이름도 설운 오랑캐꽃이 또
피어나고
그러다 환장하도록 노오란 빛깔의 꽃들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릴 터라
미리 조심스럽다
매양 사는 꼴이 똑같아
하나도 더 나아지는 법이 없어
늘 초라하고 곤란하면서도
어찌 봄을 또 그리 겨워하는지
야윈 두 팔로는 햇빛을 가득
안으며
마른 가지마다 톡톡 움을 틔어볼까,
하는갑다
하찮은 바람에도 호들갑을 떤다
(김영천·시인, 194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