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17년, 한니발이 갈리아 키살피나의 겨울 숙영지에서 나온 것은 날씨가 바뀌기 시작할 무렵-아마도 4월 경이었다.(Polyb.3.78) 하지만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본격적으로 에트루리아에 침입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산에 쌓인 눈이 녹아 군대가 이동하기 편해지는 5월까지는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Lazenby, p60] 대략 6월 초까지, 그의 군대는 산맥을 넘고 습지대를 통과하느라 고생을 겪게 된다.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는 아레티움에 있었다. 그의 병력은 25,000명 가량으로, 한니발에 비하면 상당히 열세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이 아레티움을 빗겨나가 계속 진군하자, 그 뒤를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플라미니우스는 데마고그로 군대 지휘에 자질도 없는데다 경솔한자로, 한니발은 이를 꿰뚫어보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식으로 플라미니우스를 도발하여 유인해냈다는 것이다.
지난 글(http://cafe.daum.net/shogun/9xm/7557
)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상황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플라미니우스군이 한니발을 추격하는 동안, 다른 한명의 집정관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의 군대도 아리미니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아레티움에서 트라수멘누스(트라시메노)호수 쪽으로 나아가면서, 한니발의 군대는 티베레강에 차츰 접근했으며 그렇다면 아마 플라미니아 가도를 통해 내려오고 있었을 세르빌리우스의 군대와도 가까워지고 있었을 것이다. 즉, 이대로 가면 한니발은 대략 페루시아 남쪽의 티베레 강 유역에서 두 집정관의 군대 사이에 끼이는 곤란한 형국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세르빌리우스는 한니발의 에트루리아 침입 소식을 받고 움직였고, 플라미니우스의 장교들은 그와 합류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Polyb.3.82) 이는 아마도 사전에 한니발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취하기로 합의된 작전 계획의 범위 내에 있었을 것이다.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동해안도, 서해안도 아닌 중간쯤에서 들어오고 있었으며, 이는 두 집정관의 야전군이 양쪽에서 압박하여 가두기에는 아주 좋은 경로였다.
어느 시점까지, 두 집정관은 자신들이 한니발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니발은 트라수멘누스 호반의 북쪽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뒤를 따라오고 있던 플라미니우스군이 호반의 좁은 길을 지나고 있을때 전면적인 기습을 가하여 야전군 하나를 완파해 버렸다. 그 전투는 2차 포에니 전쟁의 많은 전투 중에서도 한니발의 지략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 처럼, 플라미니우스가 한니발을 추격하기로 한 것 자체는 괜찮은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승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트라수멘누스 호반을 지나면서 정찰에 게을렀다.(Liv.22.4) 그런 원칙의 무시가 반드시 총사령관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건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다면 간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한니발군의 매복작전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자신은 죽고 군대는 파멸했다. 플라미니우스를 "곤봉 훈련 밖에 모르는 고집불통의 경솔한" 장군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하더라도, 호반에서의 결정적인 시간에 그가 단순히 불운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