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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공격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 소비에트 러시아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폴란드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기동전 전문가인 [니콜라이 페틴]을 임명한 혁명군사위원회는 즉시 폴란드에 대한 총공세를 명령하였고, [세묜 부됸니]가 이끄는 기병군단은 고의로 기민하게 철수하며 폴란드군을 우크라이나 일대로 깊숙이 끌어들였습니다.
내전 때에 중립을 지켰던 민족주의자들이나 우익 인사들도 폴란드가 러시아를 먼저 공격하는 상황에 인민위원회와 소비에트 정권을 지지하는 성명을 잇따라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이 전쟁을 '러시아를 수호하는 전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 중 대표격은 대전쟁 당시 브루실로프 공세를 입안했던 전쟁영웅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이었죠.
폴란드와의 전쟁 발발 소식에 레닌은 마침내 베를린과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사회주의의 축을 세울 수 있다며 환호했지만,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신중했습니다. 스탈린은 ‘설사 폴란드에 사회주의 정권이 세워지더라도 유럽 전체에 혁명을 일으키긴 어려울 것’이라며 잘라 말했고, 트로츠키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노농적군이 이식하는 혁명은 의미가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인민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득표수로 대결해도 밀릴 것임을 깨달은 레닌은 ‘어차피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할 것’이라 주장하며 한발 뒤로 물러났습니다.
한편, 통수권자인 피우수트스키가 반대하는 폴란드군의 전쟁 수행이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폴란드군은 쿠를란트와 발트 지역으로 진격해오는 노농적군을 막지 못했고, 빌뉴스 일대에서 주력 병력이 대거 포위되는 대참사를 맞이했습니다.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는 황급히 주영 러시아 대사 크라신을 호출해 ‘쿠를란트의 러시아 점유를 인정하고 리투아니아를 완충국으로 분리하며, 갈리치아의 독립을 보장한다’라는 절충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데다 독일 혁명의 지원이 급선무였던 러시아로써는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러시아에게 불리할 게 없었습니다. 협상이 늘어져서 안 좋을 것도 없었고, 협상의 결렬을 핑계로 신속히 폴란드 영내로 진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으니까요.
크라신은 리투아니아에 ‘러시아 편입 주민투표를 5년 내 실시할 것’, 그리고 ‘폴란드 영내의 철도 이용권’을 주장했지만, 폴란드와 영국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습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독일에 사회주의 정권 수립을 용인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요.
러시아와의 전쟁만은 막고 싶었던 피우수트스키가 노발대발하여 모험주의를 추종하는 장군들을 경질하고 자신의 심복들을 전선에 파견하는 동안, 페틴은 ‘종심작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교리로 폴란드군을 무력화시켰습니다. 폴란드군과 싸우지 않고 후방에 포위되게 만들며 바르샤바로 달려가는 것이었죠. 부됸니의 기병군단은 차량과 항공기의 시대에서 카자크 기병대의 마지막 신화를 써 내리듯 빛나는 전과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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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모험주의자들로 인해 폴란드가 패망할 위기에 처하자 피우수트스키는 크게 상심했습니다. 그는 바르샤바 근교에까지 노농적군이 다가오자 직접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바르샤바 근교의 전투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비수아 강에서 노농적군을 요격했습니다. 전선사령관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연이어 실책을 저지르며 폴란드군에게 기회를 주었고, 피우수트스키가 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타격군’은 바르샤바로 접근하는 노농적군을 남부에서 타격했습니다.
공격을 예측하지 못했던 투하쳅스키의 병력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들을 구원하려던 부됸니의 기병군단도 전멸에 가까운 손해를 입었지요.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폴란드로 망명해있던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인 극우 민병대는 독단적으로 전선을 이탈해 노농적군을 추격하며 큰 빈틈을 드러내었고,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라는 젊은 장교가 이끄는 러시아 최초의 차량화부대인 ‘스베르들로프 제1장갑차연대’를 이끌고 폴란드군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전차와 장갑차를 한 부대에 몰아넣은 페틴과 트리안다필로프의 노림수는 제대로 먹혀들었습니다. 비수아 강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부됸니와 투하쳅스키의 실패를 수습하기 위해 몰려든 예비대는 타격군을 포위 섬멸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피우수트스키는 미련 없이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프랑스 대표로 파견되어 노농적군의 승리를 목격한 [막심 베이강] 장군은 '대전쟁이 낳은 진짜 괴물은 공산주의자들의 붉은 군대'이다라는 평가를 남기고 황급히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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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만에 폴란드가 패망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1919년 9월 30일 유폐되었던 카지미에시 5세는 끌려 나와 항복문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쿠를란트와 리투아니아를 할양받고 독일과 러시아의 국경이 육로로 이어진 상황에서 이는 모두가 예측할 만한 상황이었죠. 리투아니아의 팔랑가 항은 자유도시로 선포되었지만, 사회주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낀 데다 제대로 된 항만도 없는 '팔랑가 자유시'가 얼마나 더 버틸지는 명약관화했습니다.
승리를 눈앞에 둔 독일 좌익, 이제 ‘독일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국명까지 얻은 사회주의 세력은 라인란트 일부를 제외하면 균일한 점령지를 지닌 사실상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자유군단과 우익 군대는 전향하거나 투항, 혹은 도주하였죠.
독일 좌익은 좌익도 우익도 지지하지 않으려던 독일민주당 인사들을 동원해 우익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습니다. 독일 물리학회장이자 민주당을 지지하는 인사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는 독일 좌익이 유대인 음모론에 맞서는 것은 칭찬했지만 방법론적으로 너무 잔인하다며 비판적인 지지를 했죠.
폴란드가 러시아의 손에 넘어가자 협상국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베르사유에서 독일 우익과 진행되던 대전쟁의 평화협정은 일방적으로 중단되었고, 프랑스군 잔당과 영국군은 미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인란트로 진군했습니다. 그리고는 엘베강 이서에서 전면 철수하라는 권고안을 독일 사회주의 공화국에 전달했죠.
공산당도 싫었지만, 대전쟁이 재개되는 것도 싫었던 협상국은 물론 러시아가 이 주장을 무시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주프랑스 대사 바레츠노프는 이들의 주장이 블러핑에 불과하다는 것을 꿰뚫었고, 표트로프에게 지시해 프로이센 지역을 공격하는 한편 노농적군은 발트 독일인과 볼가 독일인 등을 모아 ‘독일인 자원병사단’을 창설해 독일-폴란드 국경을 넘게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쾨니히스베르크에 적기가 계양되며 자유군단을 비롯한 우익 세력의 군사력은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협상국은 결국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라인란트 양안과 팔츠 지역을 라인란트 공화국으로 독립시킨다는 후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심지어, 라인란트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던 노동자 민병대와 프랑스에 낙오되어 있던 구 제국군 중 좌익을 지지하는 이들이 무기를 소지한 채로 독일 좌익의 지배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한다는 후한 조건까지 포함되어 있었죠.
독일 내 극단주의자들은 '이럴 거면 알자스 로렌만 남기고 꺼지라고 하자'라는 극단적인 의견을 내었으나, 레닌은 협상국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윽고 '함부르크 조약'이 체결되며 독일 혁명은 종료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은 마침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고향 독일에서 혁명이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독일 사회주의 공화국은 마르크스주의의 교황 카를 카우츠키를 수반으로 옹립하였고, 한때 카우츠키가 배교자라며 비난하던 레닌은 몸소 베를린으로 찾아와 카우츠키와 악수하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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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군이 라인란트를 점거하는 사이, 프랑스 노동계급은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러시아를 지지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조합주의자들은 식민제국의 건설자 [위베르 리요테] 장군을 제1통령으로 옹립하였습니다. 그러나 리요테의 권한은 비상 대권이었음에도 불명확했고 범위도 불확실했습니다.
그는 프랑스군 총사령부가 위치한 샹티에서 시행령을 발표해가며 프랑스를 통치하려 시도하였으나, 프랑스의 어디가 얼마나 그의 지시를 따르는지는 이론적인 가설로 추측을 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사실상 해외정보기관으로서 기능하던 GRU는 바레츠노프와 함께 프랑스에 대한 보고서를 몇백 페이지씩 발간했지만 결국 프랑스에 단일한 정치체제가 들어서지 못했고, 마치 프랑스 혁명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결론만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종류의 왕당파, 노동계급, 군부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였고, 러시아 공산당에 비견될 ‘혁명적 전위조직’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낼 수가 없었으니까요.
더군다나 GRU는 아나톨리아 지역 공작으로 인해 무척 바빴습니다. 페브지 차크마크와 이슬람주의 반군이 GRU의 공작을 눈치채고 GRU 요원을 잔인하게 살해해 그 시신을 GRU 지부에 배달한 뒤, 아나톨리아와 자캅카스에 배치된 GRU 요원들의 반이슬람주의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는 아르메니아인과 조지아인들로 이뤄진 자캅카스 지도부와 자캅카스 지도부가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러시아 인민위원회까지 여파를 끼쳤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아나톨리아 튀르크인들의 형제민족이었던 아제리인과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나톨리아 전역이 종결된 뒤, 자캅카스 정부에 대한 반발을 멈추고 불안한 동거 중이었죠.
그 동거도 이제 끝나게 되었습니다. 아제리인의 지도자였던 라술자데는 ‘실종’되었고, 아제리인의 대중정당이었던 평등당은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평등당원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조리 연행되었지요. 아제리인들이 한때 범이슬람주의, 범투란주의에 경도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나 각종 전쟁범죄에 모두 가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자캅카스 지도부의 제한적인 보고만 듣는 러시아 인민위원회는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평등당이 ‘아제르바이잔’이라는 타브리즈 일대의 지명을 따와 건국하려 했던 국가는 완전히 뿌리째 뽑혔고, 그 자리에는 첸트로카스피야 보호령이라는 군정이 들어섰습니다. 아나톨리아로 추방되지 않고 남아있던 아제리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 전역의 노동수용소로 분산 배치되었고, 첸트로카스피야의 인구는 순식간에 급감했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범투란주의와 범이슬람주의에 동조했던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과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유사 인종청소나 다름없는 이 사태에 경악한 파우코이는 GRU 내부 단속에 나섰지만,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이슬람에 대한 혐오는 러시아의 최고 지도자들이 부추기는 것이었으니까요. 독일 혁명이 성공한 뒤 자캅카스에서 GRU 산하의 특수부대 훈련을 맡게 되었던 표트로프 또한 이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미 우스트랼로프의 ‘난민 공세’ 계획을 반대했던 표트로프로는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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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와 갈리치아-로도메리아가 별도의 다당제 민주공화국을 설립하고 사회주의를 내세우지는 않는 중립국 행세를 하는 사이, 레닌과 그의 수하인 ‘5인방’은 엄청난 영예를 얻었습니다. 독일 혁명을 완수했다는 것은 모든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이 바라는 꿈을 이루었다는 것이었으니까요.
특히 스탈린의 회의론과 트로츠키의 현실론에 맞서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 레닌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공산주의의 건설자’라는 칭호를 얻은 레닌의 주위에는 개인숭배가 생겨났고, 레닌의 일가족인 울리야노프 일가는 러시아 공산당에서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울리야노프 일가 대부분이 실제로 천재나 영재의 기준에 부합하는 엘리트 지식인들이긴 했지만, 이들의 출세는 분명 특혜라고 볼 여지가 있었습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오는 법, 독일 혁명의 성공은 러시아 내에서 숨 돌릴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백군에 가담했던 트루도비키와 멘셰비키 찬전파에 대한 탄압이 종료되었고, 구 입헌민주당을 비롯한 부르주아 세력을 제외하면 언론의 자유 또한 인정되었습니다. 농민을 옹호하고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좌파공산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의 권리와 통일전선을 중시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의견이 일치한 결과였죠.
트로츠키를 따르던 각종 노동조합과 공산당 이외의 정당들은 각자의 신문과 출판물을 자유롭게 재개하였고, 이를 좌파공산주의자인 교육위원장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직속의 문학출판국에서 ‘보도지침’이란 명목으로 게이트키핑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안에서 이러한 극적인 타협이 도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19년 말부터는 경제정책 논의가 다시금 등장했으니까요.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기왕 독일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거 즉각적인 전국 공업화에 착수하자고 주장하였고, 반대로 좌파공산주의자들은 독일의 지원이 있는 만큼 노동자-농민계급의 생활 수준과 소비자 경제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환적 사회주의 경제라 불리는 2년 동안의 경제발전안 타협안은 좌파공산주의자들의 편을 들었었기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번에는 패배하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지요. 이는 크게는 스워지니치니 사후 표트로프의 스승으로써 노농적군의 범접할 수 없는 1인자로 자리매김한 트로츠키와, 국외에서의 높은 명망을 기반으로 재건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총비서가 된 부하린의 첫 대결이었습니다.
레닌의 5인방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통일된 의견을 내지 못했습니다. 우스트랼로프는 정치적 입장에서는 트로츠키, 경제적 입장에서는 부하린의 편을 들며 박쥐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절충안을 주장했고, 본래부터 트로츠키의 편을 들었던 표트로프와 트로츠키와 손잡은 바레츠노프는 중공업의 확장을 주장했습니다.
좌파공산주의자로 자리매김한 카튜셰프와 레닌이 2년 동안 부하린의 편을 들었던 것을 아는 파우코이는 반대로 산업의 70%는 경공업이 되어야 하고 무역과 경제 등에서 미국과 서구의 투자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강경했죠.
그 와중 카튜셰프에게는 러시아의 경제 재건보다도 훨씬 어려운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인 쑨얏센, 일명 [쑨원]이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합작을 원한다는 소식이었죠. 민족주의자인 쑨원이 공산당이 집권한 러시아와 협력을 원한다는 아리송한 소식에 러시아의 많은 인사들이 당황했지만, 곧 쑨원이 반제국주의를 내세운다는 것이 알려지자 상황은 변했습니다.
독일에서 제3의 위치를 주장하는 기상천외한 인사들에 비해 쑨원의 사상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라고 분류해줄 만한 여지가 있었기에, 러시아에서는 국민당의 중국 장악을 도울 인사들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공산당 내 신진 사상가로서 자리매김하는 카튜셰프가 그중에 포함된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전통문화니, 민족이니 하는 것에 시큰둥하던 좌파공산주의자인 카튜셰프에게 좌우익이 섞여 있는 공화주의 빅텐트 정당인 국민당을 도와야 한다는 임무는 난감하고 복잡한 것이었습니다.
첫댓글 원래 스토리에서 사람 하나 빠져도 원활한 전쟁 수행이 가능하군요 ㅋㅋ 이게 제대로 된 국가죠(?)
+ 별개로 눈 파진 시체를 언급한 다음날 그 기억이 다시 돌아오니 기분이 묘하긴 하네요. 모든 주사위가 좋을순 없겠지만서도...
그렇긴 한데 뭔가 섭섭한 무언가가 드는 당사자도 있다는게...ㅎㅎ...;;
+ 근데 이대로면 결말도 원작과 비슷하게 나오려나 하네요.결국 폴란드는 좀 타격 받았지만 이겼으니?
그 시신사건의 나비효과가 퍼지고 있죠
아인슈타인이 왜 여기서 나와....?
진짜로 민주당 창당선언문 작성에참가했더라고요
이외에도 막스 플랑크도 민주당원이었다고 합니다
@렌지파일 이과들의 정당 독일민주당 ㄷㄷㄷ
오... 빠른 중국 혁명... 루마니아 쪽 사건은 넘어갔으니, 중국 이후 유럽혁명까지 얼마 안남았네요 ㅋㅋ
후다닥 소설본편파트를 추월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