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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4년 2월 21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밤이나 낮이나 나는 그분을 피해 다녔네.
여름철에 많은 파리를 살펴보면 참 신기합니다. 파리는 방바닥에 앉거나 벽에 붙어 있을 때에 시간만 있으면 앞 다리나 뒷다리를 모아 싹싹 비벼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파리가 더러운 병균을 옮겨서 잘못했다고 빌고 있는 것 같아서 파리채를 내려치려 하다가 오히려 내가 잘못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파리가 천정에 거꾸로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은 파리의 다리에 붙어있는 흡판 때문입니다. 이 흡판에 축축하게 습기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천정에 붙어 있을 수 있는데 그렇게 열심히 비비지 않으면 먼지가 묻어서 그 흡판이 소용없게 됩니다. 그래서 파리는 쉴 때에는 항상 다리를 서로 비벼서 먼지를 제거하고 흡판에 침을 묻혀 촉촉하고 끈기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먼지를 털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미물도 어느 곳이든지 붙어 있기 위해서 먼지를 제거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는 하느님과 떨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붙어 있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부부지간이나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렇고, 친구들과 교우들과의 관계에서도 서로 붙어있도록 먼지 같은 장애를 없애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오히려 먼지를 더 많이 묻혀 갈라서고 멀어지게 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항상 붙어 있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으면서도 먼지처럼 그 분을 갈라놓는 것을 없애려 하지 않고 오히려 먼지를 핑계로 피하고 살았고 요나처럼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도저히 피할 수 없도록 아주 작은 부분까지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피하기만 하는 우리는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충고를 듣고 모두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피했다가 요나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동서의 피안'(東西의 彼岸)이라는 책(중국의 우징숑(오경웅 吳經熊) 저, 김익진(金益鎭) 역)에서 저자는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진리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던 시대에 주님의 섭리하심에 이끌려 새 사람이 된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응석을 잘 받아주는 아버지가 어린 자식에게 하듯이 나와 숨바꼭질을 하고 계셨다. 어떤 때에는 내가 소리를 지르며, “아빠, 어디 계셔요?” 할 때까지 앞도 보지 않고 쫓아가게끔 이끌어주셨다. 또 어떤 때에는 하느님께서 찾아오셨으나 내가 알아보자마자 하느님께서 다시 사라지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속마음과 당신이 하시는 일을 내가 알아차리도록 내버려두셨다. 우연히 내가 알아맞힌 때도 있었으나 거의 번번이 그 기회를 놓치곤 했다. 하느님께서 나의 사색을 넓혀 주시고, 나의 정서를 드높이시고, 나의 열성과 기분을 익히시어 마지막으로 나로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지경으로 나를 몰아넣으시어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은총에 의지하도록 해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차례로 한 쌍씩 제기되는 상반되는 모순으로부터 벗어나 종합하려는 나의 모든 기도(企圖)는 하느님께서 친히 내 영혼 안에 불어넣으실 위대한 협화음을 위한 조율에 불과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참다운 교회로 인도하시려고 내가 다녔던 교회를 버리게 하셨다. 내가 얼마나 높이 뛰었는지, 얼마나 멀리 달려왔는지, 또 얼마나 깊이 하강해 들어갔는지 관계없이, 그리고 번번이 거꾸로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절대로 도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프란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꾼’이라는 시가 항상 내 지난 몇 해 동안의 일을 일깨워준다.⌟
하늘의 사냥꾼 - 프란시스 톰슨 -
밤이나 낮이나 나는 그분을 피해 다녔네.
돌고 도는 세월 내내 그분을 피해 다녔네.
내 마음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웃음소리 뒤쫓는 속에 그분을 피해 다녔네.
눈앞에 널려 있는 헛된 희망 쫓아 달리다
캄캄 절벽 천리 길, 공포의 낭떠러지 그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지.
그래도 유유히 따라오는 그분의 자약(自若)한 보조 침착한 발 디딤
위엄 있는 다그침 그 발소리보다 더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를 버리면 만물이 너를 버리리라.”
I fled Him, down nights and down the days;
I fled Him, down the arches of the years;
I fled Him, down the labyrinthine ways of my own mind;
And in the midst of tears
I hid from Him, and under running laughter. Up vistaed hopes, I sped;
And shot, precipitated, adown Titanic glooms of chasmed fears
From those strong Feet that followed, followed after.
But with unhurrying chase, and unperturbed pace, deliberate speed,
Majestic instancy, they beat - and a Voice beat more instant than Feet -
All things betray thee, who betrayest Me."
(‘동서의 피안’ 중에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10
주님의 말씀이 1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6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7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축일2월 21일 성 로베르토 사우스웰 (Robert Southwell)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 지역 : 영국(UK)
활동 연도 : 1561?-1595년
같은 이름 :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Robertus Southwell, 또는 로베르토 사우스웰)은 1561년경 영국 잉글랜드 동부 노퍽(Norfolk)의 호셤세인트페이스(Horsham Saint Faith)에서 부유한 부모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576년 5월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에 있는 가톨릭 신학교인 영국 대학으로 갔다. 그곳에서 공부하던 중 프랑스와 에스파냐 세력이 충돌하자 안전을 위해 파리의 클레르몽 대학으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예수회의 토마스 다비셔(Thomas Darbyshire)를 만나 그의 지도하에 공부하며 예수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입회가 거부되자 1577년 6월 15일 두에로 돌아왔다. 1년 후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기 위해 로마까지 걸어가 1578년 10월 17일부터 로마의 성 안드레아 수련원에서 지원기를 보내고 1580년 예수회원이 되었다. 수련기를 마친 후 그는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84년 학위를 취득한 다음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로마의 영국 대학에서 학생 지도 소임을 맡아 2년을 보냈다.
1586년 영국 선교사로 보내달라는 그의 청원이 허락되어 그는 헨리 가넷(Henry Garnet)과 함께 영국으로 출발했다. 그해 7월 17일 영국 해안에 도착한 그들은 각자 런던을 향해 떠났다.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은 런던과 그 일대에 대한 선교 책임을 맡았고, 헨리 가넷은 잉글랜드 중부 지역의 선교 책임을 맡았다. 그는 비밀리에 가톨릭 신자 집의 은신처에 머물며 다른 선교 사제들의 활동을 돕고 그들에게 은신처를 소개해주었다. 또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고, 신자들을 만나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베풀었다. 헨리 가넷 신부가 영국 예수회의 책임자가 되어 런던으로 온 뒤로는 주로 런던 외의 지역에서 활동했다. 1587년경 헨리 가넷이 신자들을 위한 출판물을 인쇄하기 위해 비밀리에 가톨릭 출판사를 만들자 그는 그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는 평소 문학에 소질이 많아 많은 시간을 글을 쓰는데 투자했다.
그렇게 6년 정도 검거를 피하며 비밀리에 활동하던 그는 한 여성의 배신으로 1592년 6월 25일 체포되었다. 가톨릭 사제 사냥꾼으로 유명한 리차드 톱클리프(Richard Topcliffe)는 그를 체포한 후 자신의 집에 가두고 다른 사제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고문을 자행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여왕의 명령으로 6월 28일 그를 게이트하우스(Gatehouse) 감옥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추밀원의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아무 정보도 말하지 않았다. 고문 집행관은 결국 그를 극빈자들을 가두는 감옥에 가뒀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더러운 감옥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아들을 본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의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에게 탄원서를 보내 아들에게 죄가 있으면 처형하고 아니면 신사답게 대우하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 그는 런던탑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이것은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는 목적 외에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화합을 노래한 것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 외에도 그는 ‘장례식에서 흘린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물’, ‘위로의 편지’ 그리고 ‘죽음을 이긴 승리’ 등의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시와 글들은 훗날 그가 순교한 후 출판되어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1595년 2월 18일 런던의 뉴게이트(Newgate)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2월 20일 웨스트민스터 홀(Westminster Hall)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음날 오전, 그는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2월 21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축일2월 21일 성 베드로 다미아노 (Peter Damian)
신분 : 추기경, 교회학자
활동 지역 : 오스티아(Ostia)
활동 연도 : 1007-1072년
같은 이름 :다미아누스, 다미아니, 다미안, 다미앵, 데미안, 데미언,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다미아니(Petrus Damiani)는 어릴 때에 고아가 되어 형의 도움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형은 라벤나의 사제였는데, 그에게 다미아누스(Damianus, 또는 다미아노)라는 이름을 붙여준 뒤 파르마(Parma)로 보내어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는 여기서 교수가 되었으며 1035년에는 베네딕토회 회원이 되었지만 자신은 성서 연구에 전념하면서 은수자로 생활하였다.
1043년경 수도원장이 된 그는 은둔소를 다섯 군데나 더 세웠다. 그는 특히 이 세상을 초탈한 인물로 또 성직매매를 극도로 반대했던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다. 1057년 그는 교황 스테파누스 9세(Stephanus IX)로부터 오스티아의 추기경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수도자의 위치로 돌아온 그는 주로 교회의 개혁운동을 주도하였는데, 특히 대립교황에 대해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는 연옥, 성체에 관한 글을 남겼고, 사제 독신제 옹호를 비롯하여 사제들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즉시 그에 대한 지역교회의 공경이 시작되었고, 1823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가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며 보편 전례력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1828년 교황 레오 12세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로베르토 사우스웰 (Robert Southwell)와베드로 다미아노 (Peter Damian)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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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