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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몬한 전투 | 2차대전사 2005.05.24 15:14
린(amiselin) 감사회원 http://cafe.naver.com/nuke928/12075
노몬한 일대에서는 국경문제로 소·일간 분쟁중이었는데, 일본측은 하라하강[哈拉哈江(합납합강)]을, 소련측은 그 북쪽 노몬한 부근을 각각 국경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1939년 일본 관동군은 예하 부대에 <소·만 국경분쟁처리요강>을 통해 국경분쟁에서는 소련군을 철저하게 응징하라는 방침을 시달하였다. 때마침 5월 12일 노몬한 부근에서 강을 건넌 외몽골군과 만주군이 충돌하였다.
하이라얼[海拉爾(해랍이)] 주둔 일본군 제 23 사단장 고마쓰바라[小松原(소송원)] 중장은 관동군 시달에 따라 즉각 부대를 출동시켜 외몽골군을 한때 격퇴시켰지만 외몽골군은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군의 가세로 병력을 증강, 반격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대해 관동군사령부는 소련군을 격파한다는 강경방침을 정하고 6월 27일 항공부대가 외몽골의 후방기지 탐스크를 폭격한 데 이어 7월 2일 제 23 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소련군의 우세한 화력과 전차 공격을 받고 고전에 빠졌다. 중·일전쟁이 치열할 때라 사건이 소·일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 대본영(大本營)은 불확대방침을 정하고 정부도 사건의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관동군은 이것을 무시하여 7월 23일부터 다시 공세를 취했고, 이것이 실패하자 제 6 군을 편성, 병력을 집중시켜 제 3 차 공세를 준비하였다. 한편 소련군은 국경선을 회복하기 위해 8월 20일 총공격을 시작, 일본군 제 23 사단을 괴멸시켰다.
때마침 8월 21일 독·소불가침조약 체결이 발표되고 이어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입으로 제 2 차세계대전이 시작되었으므로 대본영은 공격중지와 병력 후퇴를 명령하고 모스크바에서 정전교섭 타결을 서둘렀다.
그 결과 9월 15일 정전협정이 성립하였고, 이듬해 소·일 양국은 국경선을 대체적으로 소련의 주장을 따르기로 합의했다. 이 전투의 패전 책임으로 관동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이 패배는 일본육군의 대소전략에 중대한 타격을 주었고 대소개전(對蘇開戰) 시도를 좌절시켰다.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전투인 노몬한 전투는 국경순찰중인 몽고 기마병을 일본군이 국경을 넘었단 이유로 사살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몽고의 군사력은 그다지 위험한 수준이 아닌지라 몽고군은 관동군에 밀렸지만 곧 쥬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이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전투는 처참하게 변해버립니다.
소련군의 전력은 1개 기계화군단으로 전차 300대와 차량이 1만대가 넘어갔지만 관동군의 전력은 7개사단에 전차 80대 총차량이 7천대였습니다.
관동군은 시작은 가상적이었던 소련을 대상으로 한것이기 때문에 장비와 보급 처우등이 좋았고 독립적인 재량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오랜시간동안 중국과의 전투로 인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전투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군비의 압박에 시달리던 일본이 관동군의 기계화에 투자할수 없었던 지라 결과적으로 관동군은 소련군과의 전투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전투가 벌어지기 전 군 참모들은 전투를 반대하였고 육군 내부에서도 의견은 분분했지만 이타가키 세시로은 "사단 한개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라는 말을 남기며 전투를 승인. 반대를 한 참모들은 전투 전 패배를 거론했단 이유로 할복 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일본의 초기 오판은 정말 자신들의 80여대의 전차가 승리할것이라 믿었다는 겁니다.
애초에 압도적인 물량과 성능의 차이가 확연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관동군의 기갑부대는 첫 전투에서 소련군에 괘멸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제 부터 전투는 전차와 전차의 싸움이 아닌 전차와 인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맙니다.
이때 등장한 물건이 화염병으로 보병들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전차로 달려드는 전술이 등장합니다.
소련군이 이 노몬한 전쟁에 투입한 BT 전차의 가솔린 엔진을 덮고 있는 뚜껑은 쉽게 과열되었고 공기가 통하도록 길고 가는 구멍들이 여러 열로 뚫려져 있어서 화염병을 그 뚜껑에 던져서 깨뜨림으로서 화염병 속의 가솔린과 고무가 흩뿌려지고 그 결과 가솔린에 젖은 고무가 열에 눌어붙고 또한 가솔린이 엔진 쪽으로 타고 내리면 불이 좍 붙게 됩니다. 게다가, 눌어붙은 고무 때문에 전차가 아무리 불을 끄기 위하여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기동을 하더라도 불꽃은 떨어지지 않게 되고 그렇게 해서 발생한 화재에 의하여 안에 있는 전차병들은 모두 불타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전술은 처음 많은 희생끝에 적 차량 300대 가량을 불태우게 됩니다. 이중 기갑차량이니 전차나 장갑차는 100여대 정도였습니다. 이 전술이 성공할수 있었던 이유는 소련군이 보병과 기갑병과의 합동전투가 아닌 기갑부대만의 단독진격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술도 오래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관동군은 처음부터 전투에 대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이 여실히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포탄이 바닥나기 시작하였고 화염병도 더이상 제조할 물건이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보급품은 떨어지게 되었고 관동군은 패퇴하기 시작합니다.
전투가 종반에 이르자 일본군은 마지막 전투를 개시합니다.
병사들은 소총에 대검을 착검하고 전차를 향해 돌격했습니다. 혹자들이 '대전차총검술'이라고 부르며 비야냥거리는 사건이죠.
전투결과 관동군은 주력인 23,7사단은 75%-80%의 손실을 입고 사실상 전멸 총 1만여명의 전사자와 4만여명의 부상자를 남기고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며 전투를 끝마쳤습니다.
우리에겐 다행으로 2차 전투 작전참모등 주 인사들이 태평양전쟁에도 참여하였고 일본군의 기계화 수준은 이 후에도 별로 개선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정신수준과 전투 감각역시 그다지 개선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특히 제일 중요한 전쟁전 전쟁에 대한 대비 역시 태평양전쟁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로 일본군은 패배하고 맙니다.
국공내전의 경과에 대해.(동북지역전투위주) | 2차대전사 2006.07.20 15:54
원슝이(g_funkrapsta) 초보 http://cafe.naver.com/nuke928/65626
독일식군장류로 무장한 1930년대 총통직속 국민당군(중앙군)부대의 열병.-(사진출처-디펜스코리아)
1937년 부터 45년까지 8년간의 항일전쟁에서 미국의 원자폭탄덕에 태평양전쟁이 종결되는 상황에 이르러
일본이 항복하는 전기가 마련되었지만 그동안 중국인민들과 국민당과 공산당과 파벌을 막론하고 병사들이
흘린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항일전기간 중국측의 인명피해는 1000만명이상이었고 그들의 영웅적투쟁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출혈을 강요하며 그들의 조국인 중국을 수호하였습니다.
1945년 9월9일 일본군대장 오카무라야스지는 그들이 8년전 만행을 저질렀던 중국의 수도 남경에서
국민당의 하응흠총사령관에게 중국내 전투지역과 환남지역의 백만일본군의 항복을 서명했고
그 역사적인 조인식후43일간의 회담을거쳐 45년 10월10일 공산당과 국민당은 쌍십협정을 체결하여
중국의 평화와 내전종식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으며.그 내용은 각 정당및 공산당의 합법적지위인정, 군대의 국가귀속,
정치협상회의소집 등이었습니다.그리고 이듬해 1월 정전협정을 체결하여 평화가 찾아드는듯 했으나 46년 3월13일 장제스는
돌연 남부 이촨과 뤄촨방면에서 공산군에 대한 기습을 개시하였고 7월에는 공산당의 당군 중추지휘부가 있는
옌안에 34개여단 25만명을 동원하여 공격을 시작하여 중국전토는 국공내전의 불길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모택동의 대단위게릴라전술을 팽덕회가 이끄는 공산군이 구사하여 옌안공방전에서 국민당군34개여단병력은 괴멸당했고
47년9월부터는 공세로 전환하여 48년10월 요심전투의 승리를 발판삼아 국민당군을 벼랑끝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죠.
일찌기 스틸웰장군도 국민당의 부정부패와 일가친척의 공권력남용을 문제삼아 차라리 각료들을 부패의 위험없는
미국인 전문관료들로 바꾸라고 조언한바있고 그 후임인 워드마이어장군도 이미 47년초 중국백서에서 밝히기를
"국민당의 이런식의 중국통치는 희망이 없다..이미 인민들은 공산당의 편이다"라고 한데서도 볼수있듯 이미대세는
모택동의 공산당편이었죠. 45년8월이후 양군의 군세는 국민당군은 430만.공산군은 120만 이었고 무장도는 알다시피
국민당은 미제무기로 완편한사단만 47개사단이었고 화력과제공권의 우세를 점하였으으나 공산군은 일본군항복후
소련의도움으로 만주지역 구일본군의 무장을 넘겨받아 무장도를 충실히하였고 45년12월에는 구일본군의 97식전차를
베이스로하는 공산군최초의 기갑부대를 창설하기도 합니다. 허나 역시 화력과 병력의 우세는 국민당이 점하고 있었죠.
(전차기종만해도 국민당의 M-4셔먼과 M-3스튜어트vs공산당의 97식과 95식약골브라더스..)
그러면 뭐하랴..48년10월 요심전투의 상황들을 살펴봅시다.
동북지역국민당군 총사령관이었던 위립황은 공산군의 포위작전에 예하사단들이 붕괴되자
심양에서 도주직전에 52사단장 허경양에게 이렇게 말했다.-"스스로 살길을 찾으시오"..이말한마디만 남겨놓고는
혼자 미국에게 공여받은 C-47을 타고는 "날아가버렸죠".(~~몽환의 숲으로 가셨나??)
결국 52사단장은 진지방위도를 공산군에 넘겨주고 투항했으며 장개석이 총애하던 청년군으로 구성된 207사단의
젊은장교들은 "국민당은 동북에서 끝났다"며 각기 도주하며.그밑의 병사들은 창고에쌓인 미국의 밀가루와 옷가지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땅바닥에는 그들이 버린 미제화기들이 나뒹굴었으며..10월31일 심양의 207사단은 결국 붕괴되어
동북지역의 국민당 최후저지선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이때 같은방어선상에 있던 17사단의 전차부대는 "공산당에 공손하게 자진투항"했고 11사단의 포병대는
155미리 미제 유탄포를 "지키고있다가"들이닥친 공산군에 바치며 "우리사단에 장개석이 미국에게 받은 야포를
36문 주었는데 이를 모두 국가에 반납합니다"라고 말하며 기쁜마음(?)으로 투항합니다.
그 이유는 동북지역에서 지난3년간 싸워온 국민당군병사들의 고향이 대부분 호남,광동지역이어서 향수병과
국민당고위층에대한 환멸, 개인의 안전이라는 측면이 결부되어 군중심리처럼 퍼져나가서였죠.
11월1일에는 제8부대사령관인 주복성장군까지 공산군에 생포되면서 동북지역에서 국민당세력은 완전히 괴멸되었고
그 시간 장개석은 전화통을 붙잡고 최후의 발악을 하고있었죠.(야이 병신들아~끝까지 사수하란 말이~야~!!(박명수호통개그 톤으로--)
아무튼 동북지역 국민당군의 전멸직전에 장개석은 끝까지 전황을 역전시키고자 전력을 집중시켜 금주를 공략하여
전황을 타개하고자 노력하여 요요상대장의 미식장비기계화부대 12개사단이 창무를 공격하여 점령하여
공산군의 남하통로를 막고 금주로 병력을 증원하려했다.이때 미국뉴스들은 "국민당이 결절적인 대승을 얻었다"라고
과대선전을 해대기 시작했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던 그시점..공산군은 31시간의 강행군으로 국민당이 상상할수없던
시간에 나타나 금주를 점령하여 거꾸로 장개석의 지원부대를 포위해버렸습니다.
장개석은 요요상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해든 금주를 수복하라"고 을러대고 애원했고 신신당부하죠.(매우 초조했겠죠..발을동동~)
장춘에서는 국민당60군이 포위를 못견디고 도시를 들어통째로 공산군에 투항했고 장제스는 최후의 보루인
심양을 사수하기로 마음먹고 10월25일 북릉비행장에서 총사령관 위립황과 1시간의 긴급회의를 여는데 위립황은
"보름내로 대규모 전투를 벌일수는 없다..각부대의 피로가 심하다.심양만을 사수하자"했으나
두율명은 장개석의 비유를 맞추느라 "적을 공격하자고 주장하여"장제스는 요요상에게 요서공격을 명하고
요요상의 12개 기계화사단은 전화력을 집중하여 공격했으나 흑산북방에서 돈좌되고 위립황은 심양의 방어가 걱정되어
요요상에게 심양으로 오라고 전보를 보내고 계속되는 명령의 반복에 요요상예하 전부대는 혼란에 빠지게되죠.
이는 59사단장이었던 양철표장군의 증언에서 엿볼수있는데 -"나는 당시 10월26일 하루동안 다섯가지의 각기다른명을 받았다"
말그대로 혼란한 전투였다".- (정말 정신 없었겠군요..요리할때 냄비3개만 끓고있어도 정신없는데..각기다른명령이 5개가 넘는다라..)
국민당지휘계통의 문란과 혼선속에 국민당최정예인 요요상부대는 공산군에 각기포위되어 패주중인 상황이 벌어지고
심양의 위립황은 무선전화를 통해 요요상을 호출해도 소재불명..마침22사단에서 전화를건 요요상은 "북쪽요하에는 적이없다"라며
그리로 철수한다 하는순간 전화는 또끊겼고 (통신상태불안)10월27일 새벽 요요상부대는 요하의 늪지에서 기동불능상태에 빠진채로
공산군에 각개격파당하여 국민당의 최정예 주력기계화부대들은 "바람과 함께 편제에서 사라져 버립니다"(아까운 장비들..)
다음날 심양의 7층짜리 동북포위토벌총사령부건물은 서로 비행기표를 얻어 남쪽으로 도망가려는 국민당장성,관료들로
북적대고 신일군 군단장 반욕곤은 "끝났다..이젠 완전히 끝났다"라며 화를 버럭버럭내며 도망갔고 여기서 바로 아까
처음에 말한 그 대목.-"위립황총사령관의 무책임하고 귀차니즘적인 언동"-("스스로 살길을 찾으삼..나 먼저 간다.~~!!")
이 연출되며 위립황의 수송기이륙을 엔딩씬으로 동북지역의 국민당세력은 공산군에 의해 일소됩니다.
국민당은 동북지역을 잃음으로서 과거 일제가 건설해놓은 막대한 규모의 만주와 요서의 공업력을 공산군에 넘겨주었고
요요상의 12개기계화사단의 괴멸로 돌이킬수없는 전력의 타격을 입었고 더불어 신일군,207사단,11사단,17사단,52사단등
정예보병사단들역시 괴멸되어 시애틀도 아닌 "남경의 잠못이루는밤"을 장제스에게 선물하게되죠..(--).
더군다나 이제는 공산군이 화북지역의 중원본토심장부로 거리낌없이 들어올수있게끔 완충지대를 잃어버려
국민당정권은 더욱 통치력이 불안해졌고 이는 이듬해인 49년 양자강을 도하하여 상해,난징을 공산군에게 넘겨주고
장제스가 대만으로 피신하게되는 수순을 마련해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국민당의 부정부패,매판자본가들과 졸부들과 그사이 국민의 빈부격차의 심화와 민심의 이반..
공산당간첩들의 국민당내 암약으로인한 이간질과 정보유출(고급장교중에도 공산당은 매우 많았죠)
계속되는 장제스의 실책과 예하장성 관료들의 무능과 도태..
그 시간 무장력을 강화하고 사상으로 똘똘뭉쳐 개떼처럼 러쉬하는 마오와 공산군..
정말이지 싸움은 머릿수나 무기로만 하는건 아니라는걸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p.s- 이때 장제스가 정신차리고 잘했으면 ..그래서 중국이 공산화되지 않았다면...참 우리나라에게도 득이었을텐데..
아쉬움이 남네요..하긴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서도..그랬으면 소련이 장제스를 쳤을라나??설마 3차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