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초기 소지가 불법이고 인구밀도가 높으며 경찰서가 비교적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정당방위의 범위를 좁게 가져가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정당방위가 허용될 수도 있다는 믿음을 주어 보복성 폭력 행위로 이어지게 하는 것보다, 팔을 잡는 등의 현상 유지만 하게 하고 공권력을 빌어 사건을 처리하는 편이 폭력의 총량을 줄일 수 있는 길이다. 물론 몇몇 아쉬운 사건이 있긴 하지만 더 큰 위험을 줄이기 위해선 현행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44)
살인미수 혐의를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같은 주장을 하곤 한다. A라는 사람 때문에 B가 죽었다 치자. 이때 A에게 적용되는 죄명은 살인죄만 있는 게 아니다. A가 무슨 마음을 먹고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 죄명은 네 가지로 갈린다. 죽일 마음이었다면 살인죄, 다치게 할 마음이었다면 상해치사죄, 그냥 좀 때려줄 마음이었다면 폭행치사죄,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실수로 죽게 했다면 과실치사죄. 똑같이 피해자가 사망했더라도 가해자의 마음속에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에 따라 죄명을 갈린다. 이러다 보니 살인(미수)혐의를 받는 피고인들 십중팔구는 형을 줄여보려 ‘죽일 의도는 없었고 그냥 좀 혼내주려고만 했다’고 주장들을 한다.
(68-69)
현행법상 집행유예 이상 전과자는 공무원이 될 수 없다. 벌금형이 가능한 젊은 피고인들의 집행유예형 요청을 만류하는 이유다.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 뒤늦게 공무원 시험 응시를 마음먹었다가 집행유예 전과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 나이 많은 피고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취업할 때 전과 기록을 제출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형 실효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집행유예 전과는 5년이 지나야 전과 조회 결과에서 사라지지만, 벌금 전과는 2년만 지나면 사라진다. 물론 둘 다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고 취업이나 기타 목적으로 조회할 때에만 보이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 차이는 분명 크다. 나도 변호사지만 우리나라 법 전체를 다 알지는 못한다. 집행유예 전과가 어디서 어떤 불이익을 가져올 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다.
(120)
도대체 왜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켜야만 하는 걸까? 바로 인권 때문이다. 형사재판이라는 게 국가 대 개인의 싸움이라 체급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이 과정에서 사수하려 애를 써도 보장하기 힘든 것이 개인의 인권이다. 하지만 요즘 인권을 얘기하는 것만큼 허무한 일은 없는 듯하다. ‘흉악범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는데 무슨 놈의 인권이냐. 도리어 피해자의 인권을 지켜야 한다’반론이 대번에 돌아온다. 사실 그 간의 형법이 피해자에게 소홀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피고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면 반대급부로 피해자의 인권이 지켜지는 걸까?
(170)
사실상 주변 정황으로 성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지금의 방식은 무죄추정의 원칙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이 과연 피고인만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지적장애인 역시 상대를 선택하고 성관계를 즐길 권리가 있다. 그 관계에 대해 국가가 광범위하게 개입한다면 결국 사람들은 지적장애인과의 성적 접촉을 기피하게 될 것이다. 같은 장애인이라고 해서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니 이는 비장애인이나 장애인이나 매한가지다. 눈앞의 불행을 막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애인과 그 가족들 앞에서, 멀리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 행복을 얘기하는 건 무책임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궁금한 건 지적장애인 본인들의 얘기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그동안 만났던 연인들이 모두 수사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여전히 심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207-208)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두 가지 책임이 발생한다. 하나는 국가에 대한 형사책임이다. 국가가 금지하는 범죄를 저질렀으니 벌을 받을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나머지는 피해자 개인에 대한 민사책임이다. 피해자에 대해 신체적 물질적 정신적 손해를 입혔으니 이를 경제적으로 배상할 책임이다. 두 책임은 완전 별개다. 국가에 대해 벌금을 냈다고 해도 피해자에 대한 민사책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합의를 해주지 않아도 별로 아쉬울 게 없다. 민사책임을 묻는 별도 소송을 피고인을 상대로 제기하면 되는데, 형사재판 결과가 나오면 이 소송이 무척 간단해진다. 자신의 피해액을 증명해 형사재판 판결만만 첨부하면 입증이 끝나는 것이다. 어차피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한다면 형사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에 하고 형을 적게 받는 게 피고인 입장에선 여러 모로 이익이다.
(226)
공직선거법을 악법이라고 칭한 이유는 선거의 자유, 공정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문제는 공직선거법에는 평범한 시민의 직관에 반하는 내용이 많지만 너무 자주 바뀌고, 그 내용도 제대로 홍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술김에 선거 벽보에 불을 지른다든지, 선거 여론조사를 조작한다든지, 공천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그건 누가 봐도 법에 위반되는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선거에 대해 조금만 입을 잘못 놀려도 전과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앞서 언급한 명함 돌리기, 조명판 설치는 보통 사람과는 그닥 인연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직선거범의 처벌 범위는 이것보다 훨씬 넓은. 선거운동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넓은 처벌 범위 때문에 악용 가능성 역시 높다.
(263-264)
강도상해죄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해볼까 생각도 했다. 헌법재판소에서 강도상해죄에 대해 위험 결정을 한다면 피고인은 무죄를 받을 수 있었다. 강도상해죄에 법정형은 너무 높다. 살인죄가 최고 5년인데 강도상해죄가 최소 7년이라는 건 뭔가 이상하다. 게다가 일단 강도가 성립되면 강도상해로 넘어가는 건 아주 쉽다. 병원에서 진단서를 쉽게 발급해주는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