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먹고 TV앞에 앉아 있다가 남편이 1, 6일이 안계장날이라고 가보자 했다. 그는 시장 조사 차 가는 것이고 나는 장날의 느낌을 보러..아버님은 꽃 모종 사신다고 모 두 각자의 목적을 갖고 안계로 향했다. 낙동면을 지나 낙단대교를 건너면 의성 단밀면이다. 그 입구에 관수루가 있다. 관수루는 밀양 영남루, 안동 영호루과 더불어 낙동강 가에 세워진 영남 3대 정자 중의 하나이다. 높다랗게 앉아 있어 낙동강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이름에 걸맞는 정자이다. 우리가 건너왔던 낙단대교도 보인다. 이 다리가 생겨서 의성으로 가는 주도로가 되었다. 단밀 지나 단북면으로 들어서니 양쪽으로 시원하게 논이 펼쳐져 있다. 상주보다 벼가 더 빨리 익은 것 같다. 이곳까지 모두 ‘안계들’이라 부른다했다. 단북에서 불과 몇 분 거리에 안계면이 있다. 의성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도시다. 그래서 이쪽 안계, 단밀 쪽은 의성읍과 상당한 거 리가 있다. 의성 춘산쪽과 단밀은 차를 타고 1시간 이상을 가야한다. 그래서 의성의 행정, 상업 등은 동서가 전혀 다르게 형성되어 있고 이곳 서쪽의 중심지 가 안계이다. 안계면으로 들어서니 좌우로 삼성중학교, 안계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면부의 학교가 이렇게 크다니.... 전교생 서른명인 우리 학교와 비교 되었다.
돌축대 위에 높다랗게 앉아 있는 관수루 정자 위에 서면 낙동강이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우리가 건너온 낙단대교- 건너편이 낙동면이다. <단북면을 지나가면서 본 넓게 펼쳐진 들판- 벼이삭이 무러익어 간다.>
안계에 볼 일이 있었던 적이 한번도 없으니 기억에도 없다. 한곳에 차를 세우고 장터로 들어섰다. 아침 일찍부터 장이 열리니 이 시간이면 거의 파장에 가까울 시간이다. 물건파는 사람들은 흥청거리는데 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곳에 장이 열리면 옆에 있는 단북은 거의 장사가 되지 않는단다. 길게 늘어선 온갖 상점들, 그리고 상인들... 너무 다듬어져서 구수한 장터의 맛은 없지만 있을 것은 다 있어 구경하기에 좋았다. 그래도 여기저기 흥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아버님은 국화, 꽃기린 등을 사셨고 나는 천마, 도라지, 옥수수, 당파씨를 샀다. 가을의 뙤약볕 더위를 실감했다. 그래도 장구경의 마지막은 장터국밥이라며 우리는 점 심을 먹기 위해서 장터국밥집을 찾았다. 천막집에 길게 늘어진 탁자와 의자, 그 가운데 서서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국밥을 한사 발씩 떠 주는 그런 국밥을 상상해 보는데...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다. 장터국밥 파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가리켜 보이는 곳은 번듯한 건물에 정육점을 겸 하고 있는 식당이다. 좀은 실망을 하면서 국밥집에 들어갔는데 소국밥, 돼지국밥 할 것 없이 모두 맹물 냄새가 나는 아주 아주 실망스런 국밥이었다. 마무리 작업이 영 신통찮은 일처럼 우리들의 장터구경은 이렇게 끝이 났다.
<안계 면 중심시가지- 일직선으로 단조롭게 펼쳐져 있다> < 시가지에서 골목길을 따라 한블록 내려오면 이렇게 장터가 펼쳐진다> <잡화상 앞에 서 있는 아주머니, 그리고 산 물건을 배낭에 담고있는 아주머니> <어물전 앞의 사람들- 상주에는 이런 상어고기가 나오지 않는데 안계장터에는 있다> <당파씨를 사는 사람이 더 달라고 한주먹 쥐고 파는 사람은 안된다며 봉지를 뺏든다> <차가 서는 곳도 아닌데 평상위에 앉아 있는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 <말벌 방지용 옷이 신기해서 찍어 보았다. 문득 벌에 쏘였던 것이 생각난다.> <떡방앗간 풍경> <각종 그릇들을 파는 곳인데 손님이 없고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외롭게 보였다>
돌아오는 길은 다인으로 해서 중동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주변에는 여전히 익어가는 들 판... 그 풍요로움에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중동으로 들어서면서 류씨 종택인 수암종택에 들러보았다. 아버님의 친구분이 이집 출신이라 아버님의 관심도 컸다. 내가 30년 전 상주중학교에 부 임했을 때 교장선생님이도 이집 종손이셨던 걸로 안다. 아주 인품이 뛰어난 학자풍의 풍 모를 보이셨던 분이다. 청렴하고 강직하여 한번씩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교육에 대한 신심이 있으신 분이라 감히 대들 수 없었던 그런 분이었다. 수암종택은 풍산 유씨 우천파의 종가로 유성룡의 아들 유진이 자리 잡은 곳에 1700년대 중반에 지어졌고 일명 우천세가 또는 대감댁이라고도 불리어 왔다. 이곳은 낙동강과 그 지류인 위강이 만나며,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의 지맥이 한 곳에 모 이는 이수삼산 二水三山 의 명당이라 한다. 전체 구성은 ㅁ자형 몸채와 ㄴ자형 녹사청, 一자형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몸채는 중 문간채를 중심으로 안과 밖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지붕으로 연결되어 있다. 녹사청은 녹봉을 지고 오는 관리들을 대접하기 위한 곳으로 보기 드문 실례가 된다한다. 솟을대문을 거쳐 마당안으로 들어갔다. 우천세가라고 편액이 붙어있는 사랑채가 보이고 뒤로 녹사청이 있겠지만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가는 입구의 행랑채는 그냥 버려진 듯 한옥에 어울리지 않는 양철 물받이를 걸쳐놓 았다. 이 정도의 가옥이라면 보존의 의미를 두고 살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수암종택 바깥에서 본 풍경> <입구의 솟을대문- 가문의 위력이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행랑채의 물받이는 첫인상을 나쁘게 한다> <우천세가 라는 편액이 걸인 사랑채이다>
아버님은 친구분 연고지라고 처음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고 사진을 뽑아서 친구분 에에게 가져다 준다고 하셨다. 譜學을 바탕에 두고 만나는 분들이라 늘상 연고지가 어딘지, 그곳의 주 姓이 무엇인지 그곳에서 어떤 벼슬을 한 사람이 배출되었는지를 꿰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나에게는 당 황스럽고 솔직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것이 아버님의 삶의 부분이니 내가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니 아버님과 나와의 대화 가운데서 “잘 모르겠는데요...” 라고 할 때가 많 다. 물론 관심이 없는 것이겠지만. 우물리를 떠나 신암리 중동대교를 거쳐 상주로 나왔다. 이곳은 예전 토진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뒤의 산이 토끼형상을 하였고 앞에 나룻터가 있어 토진이라 했다. 예전 육로가 번성하지 못했을 때 물길을 따라 이곳도 번성했다고 한다. 지나치고 나니 다리 위에서 보는 낙동강 굽이가 너무도 아름다워 차를 세워달라 했다. 그러나 다리 끝에서는 강이 보이지 않아 나는 뛰어서 다리 중간에 갔다. 흘러가는 물굽 이를 다리 양편으로 보면서 눈 속에 담았다. 남편이 차를 다시 돌려 다리 끝까지 갔다가 또 돌아와 다리 위에 차를 세워 주었다. 고마 웠다. 어쩌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다. 안계장터 구경을 잘 하고 돌아왔다. 파씨도 심고 천마도 다듬고 도라지도 다듬어야 할, 일은 태산 같겠지만. <낙동강이 흘러와서 ...... .........흘러간다> |
출처: 희망만들기 원문보기 글쓴이: 그저물처럼
첫댓글 우리고향을 방문해 주셔서 참 고마우이더. 제가 어릴 땐 단밀 낙정에서 상주 낙동으로 배로 다녔니더. 버스도 막 싣고 갔니더.
안계장터에 가서 장터에서 놀던 향숙씨도 이야기했지요. 글 속에 써넣지를 못했네요.
벌옷은 벌이 입어야 하는 옷^^이지요, ㅎ~
비옷은 비가 입나? 잠옷은 잠이 입나?
새옷은 새가 입고 헌옷은 헌이 입고~~~ㅎ
엄청 유치한 발언을 해가지고설랑은....ㅋㅋㅋ
2일 7일이 의성장날인데 의성장에 한 번 오소.
아~ 여행 가고 싶다. 리프레쉬 휴가, 한 1년 받는 방법 아시는 분, 조언 부탁드립니다.
장날 풍경은 가을하늘님네 나무꾼한테 물어봐야되는데...
나무꾼이랑 어디 비기겠습니까요? 기냥 지 풀에...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