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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99. 9. 3. 수요공부방 _ 김제원 교무님 설법.hwp
원기 99. 9. 3. 수요공부방 _ 김제원 교무님 설법
의두요목 11-15
I. 들어가며
반갑습니다.
재미없는 의두요목 시간이네요. 지난 주에 성욱 교무님이 의두요목 하셔서 다들 깨침을 얻었다고 들었는데요. 저는 한 번씩 일있으면 어디 갔다와도 된다고요.
의두요목이 여름방학 하기 전에도 한 번 했고, 지난주 두 번째, 이번주가 세 번째, 다음주가 네 번째입니다.
의두요목을 한 조목씩 풀면 시간이 너무 걸려요. 예전에는 1-2시간에 끝냈는데, 이번에는 4타임 하는데요. 차분히 의두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의두는 어느분야냐 하면, 기독교신앙에는 의두가 없지요. 천주교는 명상 같은 수양이 있지만, 의두는 묵상이 있는데. 법문에 대해서 묵상하는 시간이 있더라고요. 저희는 이제 스승으로부터 조목을 받거나, 본인이 의심이 걸릴만한걸가지고 연마를 하지요
의두와 성리의 차이점은 간단히 말하자면, 성리는 견성하는 것입니다. 의두는 일과 이치를 연마하는 것이지요. 성리는 한번 견성하고나면 자성반조라고 하여, 견성한 자리를 계속 확인반조하면 되는 것이고요. 설사 견성하였다고해도 그 사람의 습관과 업력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견성성불제중이라하지요. 성불이라는 것은 일종의 함축을 통해, 실지 경계를 접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 실지 경계에서 얼마나 적용되는지 대조하는 것입니다. 제중은 현실속에서 그것을 만나는 대상대상에게 깨달음에 대한 것을 펼쳐서 은혜가 되도록, 소통이 되도록 조화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견성하지 못하였다면, 수양도 필요없고, 취사보은도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지요. 가장 좋은 순서는, 젊은 시절에 견성하고, 중년에는 중생제도하고, 말년에는 해탈천도해서 내생 준비하는 것이 가장 잘사는 인생이지요. 젊은 시절에 젊으니까 하기가 좋은 것이 너무 많아요. 어떤 사람은 운동하는데, 연애하는데, 공부하는데, 수행하는데, 여행하는데, 예술에다가 에너지를 쓰지요. 대종사님은 현대시대에 먼저 젊은 시절에 빨리 견성하도록, 방향을 잡아주셨어요. 왜냐하면 견성을 하지 못하고 사는 삶은 남의 집 사는 것과 다름 없거든요. 견성은 나 자신을 아는 거거든요. 참 나를 아는 겁니다. 견성하지 못한 것은 반대로 남의 집을 사는 것입니다. 허상을 위해 살거나, 남의 다리 긁고 시원한 줄 알고, 열심히 뛰면서 잘하는 것인냥 하는 삶이지요. 열심히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열심히 해야지요. 실질적으로 은혜가 되어야지요. 그렇다고 형식을 무시하지는 말고요. 형식 속에 실이 있어야하는데, 그런 사람은 드물지요.
젊으니까 저녁 내내 술퍼먹고, 객기로 사는 사람들이 있지요. 역대 스승님들은 젊은 기운을 수양에다가 갔다놨지요. 젊을 때는 기운에 힘이있기 때문에, 빨리 힘을 얻어요. 역대 성자들 치고요, 젊은 시절에 힘을 얻지 않은 사람 드물지요. 오십대가 돼서 회상에 들어와서 영통하신 분도 있기는 한데요, 그런 분들은 전생에 많이 닦으신 분이고요. 그런 분은 이생에 출가위에 가더라도, 실지 제중 사업을 못했지요. 그러니까 젊은 시절에 하는 게 좋아요.
대산종사님께, 어느 교무가 물었지요. 종법실 찾아가서 질문을 했어요. “제가 결혼을 해야겠습니까, 안해야겠습니까.” 대산종사께서 “견성을 해라” 말씀하셨어요.
견성을 하고 나서는, 결혼을 하든 말든 상관없거든요. 이 인류의 어두움 중의 하나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지요. 정말 나는 가엽고, 또 불쌍합니다. 만약 내가 그런 삶을 살았다면, 나중에 알고 나서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누구나 다들 행복을 위해 삽니다. 또는 자유를 위해 삽니다. 그 행복과 자유는 결국은 가장 기초가 견성입니다. 즉 자기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견성은 의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리로 됩니다. 성리는 직관으로 들어갑니다. 직관으로 들어가려면 번뇌가 끊어져야 합니다. 번뇌가 끊어지려면 욕심이 서원으로 변화해야합니다. 그리고 신이 있으면, 마음이 정해져서 고요해집니다. 번뇌가 줄어들어요.
현진 교무님이, 시험기간에는 철학적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시험공부하면 여러분 방청소 하고 싶어지잖아요. 챙기지 않았던 것을 챙기게 돼요. 그런데 시험 끝나고 나면, 야호 끝났다하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순경입니다.
채근담에서 그런말이 나오는데, 배가 따뜻하면요, 그러면 사람한테 도심이 안나와요. 시험 끝나면 도심이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지금,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 꾸리고, 좋은 직장에서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와 좋은 인연 만나서 좋은 일하고 멋있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그것이 공부가 동반되지 않고, 견성이 동반되지 않고, 신앙적인 것이나 수행적인 것이 동반되지 않으면, 오히려 그 부귀영화가 본인의 도심을 더 말살해버립니다. 그리고 그릇이 작은 사람은 부귀영화가 더 피폐하게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래서 기본이, 구도심이어야합니다. 발심이어야 합니다. 원력이어야 합니다. 참 중요하지요.
교당을 다니다가, 한창 임원도 하던 사람이 가정꾸리고 배가 따뜻하니까 도심이 사라지곤 해요. 그것은 순경 때문입니다. 이따가, 일체유심조때 같이 나올 이야기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생에 대한 욕심이 있어요. 생존에 대한 근본적인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어떤 사람이 편하게 살고 싶어 하지 않겠어요. 어떤 사람이 맛있는 것 보고 안 먹고 싶어하고, 어떤 사람이 대우받기 싫어하겠어요. 누구나 칭찬받고 대우받고 편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한 선택이 다른 겁니다. 너무 달라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돈을 버는 것으로 해결해요. 어떤 사람은 저 여자와 기어이 내가 살면 되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얻으려 하고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지요. 그러다보면, 성자들은 스승님들은 뭐라하시나 생각해봐야합니다.
그래서 수양을 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내가 주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소리입니다. 욕심의 노예로, 번뇌의 장난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참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현상의 끌림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ㅡ.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눈이 피곤해요. 나처럼요. 오늘 제가 눈이 너무 피곤하네요.
여러분 뭐하려고 사십니까? 곧 관속에 들어가실건데요.
정말 허망해요. 아무리 큰소리 치고, 천하를 움켜쥘것같아도, 관속에 들어가면 땡이에요.
그래서, 진리를 또는 이치를, 또는 성품을 또는 인과를 또는 마음을 또는 스승을 구하고 찾고, 거기에 관심 갖는 것은 결국은 누구나 원하는 행복, 그것을 얼마나 더 갈구하느냐, 또는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인연을 얼마나 만나느냐, 혹은 만났어도 얼마나 간절한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신체적 나이와 정신적 나이가 다릅니다. 나이가 어려도 어른인 사람, 어른이어도 어린 사람이 있습니다. 성품에는 나이가 없습니다.
성품에는 남녀도 없습니다. 노소도 없고요. 생사도 없습니다. 선악도 없습니다. 부귀빈천도 없습니다.
제가 안암교당에 근무하는 것은, 여러 사람을 많이 교화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진리의 세계로, 견성 성불제중의 길로 안내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보람이고요, 종법사님께 제가 받은 명입니다. 그렇다면, 원불교는 아까 수양을 통해서, 수양을 하다보면 맑아지거든요. 맑아지면 밝아져요. 그래서, 아까 성리를 직관하려는데, 앉아있는다고 직관이 되나요. 맑아져야 들어갈 수 있어요. 그것은 지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수양하지 않는 사람이 성리를 연마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수양하지 않은 사람은, 전생에 엄청나게 수양한 사람 외에는, 견성하기 어렵습니다. 수양을 하셔야합니다. 내가 원력이 확실하면, 수양을 하게 되어있고요. 원력이 확실하면, 며칠하다마는 의두가 아니라요, 며칠하다마는 의심이 아니라, 기어이 파는 겁니다. 그것이 자존심입니다. 며칠하다말고,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면서 사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삶이에요.
언저리만, 근방만 맴돌다가 살면 안되잖아요. 원불교 만나서, 근처 맴돌다가 가실래요? 아까, 현진 교우님 이야기 잘하셨죠. 법문 하나만 갖다 써도, 그 사람 착하다고 그래요. 그러나 의두를 깨쳐서 내것화 하지 않으면요, 힘이 없고요, 어떤 경계가 오면 무너집니다. 결혼해서 멋진 사람 만나서 살다보면 바뀌어버려요. 왜냐하면 깨치지 못해서 그렇고요. 서원과 신심이 확실하지 않아서이고요. 좋은 거 얻으러, 지적 만족감을 얻으려, 영혼이 맑아지는 것 같다고 교당오는 사람은 경계오면 무너져요.
저 또한 제 인생이 아깝습니다. 제가 어떻게 바친 인생인데요. 여러분 인생도 소중하지만, 제 인생도 소중하거든요. 그러려면 진짜에 진입해야합니다. 근처에 맴돌기만 하면 안돼요. 90도 80도에서만 머물지 말고 100도에 가셔야합니다. 그러려면 수양을 해야하고요, 의심에 걸려야만 합니다. 의심에 안 걸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별로, 나와 다른가봐요.
나는 질문을 13시간 해본 적이 있고요.
보십시오. 나이먹고, 우리나라에 60대가 된 사람 중에 학교 다니는 사람이 늘어난데요.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공부하는 게 가장 재밌대요. 알고자 하는 마음, 안 만큼 보이고, 안 만큼 행복하거든요. 안 만큼 내 인생이 새로 보여요. 그중에도, 과학적 상식만 새로 알아도 너무 좋지요. 그런데, 나의 본래 어떤 것이 참 나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 나와 우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왜 이런 습관으로 되어있는가, 거기에 대한 연마가 실질적으로 없으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인간이 참 똑똑한데요, 그렇게 모르면서도 웃고 산다니까요. 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뭘 웃고 사는지.
내가 도대체 무엇이 나인지ㅡ 육신이 나예요? 육신은 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의 손”이라는 식으로 표현하지요. 잠시의 소유일 뿐입니다. 죽으면 태워버리든가, 땅속에 묻어져요. 나가 아니지요.
정말 여러분들 수학을 잘하시는가. 수학을 진짜 잘하는 사람은 수명을 계산해봐야해요. 싸인 코사인 푸는 것도 수학이지만, 내 인생의 수학을 보셔야 해요. 내가 몇 년 남았는데, 먹고 자는 시간 빼면 몇 시간 남았는가. 그렇게 보면 한가할 시간이 없어요. 그러면 내가 무관사에 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죽으면 원없이 잘것인데ㅡ.
잠을 못잔다고 그러는데, 죽으면 원없이 자요.
법위등급 설명하면서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요, 법위등급 올라갈수록 행복정도가 올라갑니다. 수양력, 연구력, 취사력이 올라갈수록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수양력 연구력 취사력이 부족할수록 덜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법위등급은 수양력 연구력 취사력 단계가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보통사람은 어떤 힘으로 사냐하면, 젊을 때는 힘으로, 혹은 자기가 이루려는 목표를 잡아서 거기를 반조하면서, 거기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에너지입니다. 그것을 강하게 한 사람은, 좋은 대학가고 시험에 합격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의 에너지에다가, 플러스 원력과 신에 바탕한 깨달음이있어야합니다. 깨달음을 원하고 믿는 힘으로 살아야합니다.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를ㅡ 요리법을 알더라도, 내가 실제로 해야 하잖아요. 내가 견성을 한다고 행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실행을 해야합니다.
불리자성이라 하면, 경계속에 내가 어떠한지, 내가 나를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ㅡ
여러분이 여러분을 다 만들었거든요.
원불교 공부를 잘못하시면요, 언저리 맴돌고요, 착한 사람 되려고 하고, 아니면 그저 아는 데 그치고요. 그러면 적자가 되지 못하고요. 내생을 책임지기 어렵습니다. 11번 읽어보시지요.
II. 의두요목 11-15번
11.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바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일체가 뭐인가요? 일체는 전부 다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진강급, 습관, 불보살로 사느냐 중생으로 사느냐 ㅡ 전부 일체입니다. 인연도 상생으로 만드는가 상극으로 만드는가 ㅡ 이것이 전부 일체입니다. 우주도 성주괴공하는 것도 사업의 흥망성쇠도, 부귀빈천하는 것, 지혜가 있고 없음도 일체에 전부 들어갑니다. 유형무형이 다 들어갑니다. 일체가 다, 일체는 사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우주도 다 포함되겠지요. 마음이 짓는 바라 하였습니다. 마음은 무엇이죠?
<판서>
마음 = 즉심시불
심즉불
불즉각
즉심시불입니다. 마음은 곧 부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심즉불이라고도 합니다.
불은 뭐지요?
불즉각이라 합니다.
마음은 부처인데, 부처는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이 사람의 마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심 우주심 천심 인심을 전부 포함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일원상서원문에는, 심신작용이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심신작용에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심신작용을 하나로 말하면 심입니다. 두가지로 말하면 심신, 세가지로 말하면 신구의입니다.
신구의 삼업으로 내가 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두가지로 말하자면, 몸과 마음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로 말하면, 마음이 들어서 몸도 움직이고 입도 놀리고, 몸도 입도 우주까지도 마음에 포함됩니다. 사람들이 천심 따로 있고 인심 따로 있는 줄 알아요. 그게 아닙니다. 기도를 해도요. 내가 나한테 감동이 없는데 하늘이 감동하겠습니까? 내가 나한테 먼저 감동을 해야, 하늘이 감동합니다. 내가 나한테 감동을 안 하는데, 어떻게 하늘이 감동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마음을 일명, 진공묘유라고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람한테는 공적영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무엇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요. 눈을 통해서 나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고 아시고, 듣고 아십니다. 그런데 그 듣고 보고 아는 그 신령스런 그것이 영지입니다. 그 영지가 언제부터있었고, 어디에 있고, 어떤 색깔이고, 어떤 사이즈인가ㅡ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요. 부모로부터 몸을 받으면, 몸이 생기면서 그 나라는 영식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리고 죽으면 그것도 같이 사라지지 않을까. 육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착각입니다. 오류입니다. 유형한 육신은 생로병사를 합니다. 그러나 무형의 영식은 생로병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구분해서, 성품은 본래 일념미생전 자리라고도 하지만, 또 우리 마음에는 생주입멸하는 마음이있습니다. 생겼다가 머물렀다가 이사갔다가 없어졌다가. 그렇게 생겼다 없어지는데, 무엇이 들어서 그렇게 됩니까? 뇌 때문에? 신경 때문에? 사람들은 뇌나 신경 따위가 영혼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럼 뇌사자는 무엇이지요?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마음일까요? 감각으로 느껴서 아는 그 자체ㅡ 영지 ㅡ
정산종사께서는 영기질로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영과, 듣도록 만드는 장치 귀 따위가 질이고요. 그것을 전달해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기입니다.
일체유심조를 풀면, 의두요목 스무개를 다 풀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이 그러니까, 너희 뭐 공부하냐 하면, 일체유심조 공부한다고 대답하라고 하셨잖아요. (교의품 27장)
불은 곧 마음이고
마음이라는 것은 공적영지해서, 불생불멸하고 인과보응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그렇습니다. 일체유심조를 푸려면 반드시 12인연을 풀어야합니다. 원불교 다니면서 육도윤회, 12인연, 영기질, 공원정 이런 단어들을 모르면, 아직 초입자입니다.
왜 일체가 유심조입니까. 여러분의 진강급 같은 것들은 전부 여러분 마음이 들어서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눈이 큰 사람이 있고, 키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 있고, 건강한 사람있고 아닌 사람있고 ㅡ 전부 여러분 마음이 지은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도 짓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기 지금 올 수도 있고 안올수도 있잖아요.
오늘은 제가 12인연에 대해 설명드리려 합니다.
<판서>
불(彿) = 심(心) -불생불멸
-인과보응
<판서>
명(明) 무명(無名)
행(行)
식(識)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여러분이 대개, 어떤 사람은 명으로 어떤 사람은 무명으로 들어갑니다.
보통 범부들은 무명으로 음욕을 타고 들어갑니다. 왜 그러냐. 전생에 생을 마감할 때 착심이 업력이 너무 많으면 무명으로 출발합니다.
무명으로 죽은 사람은 무명으로 행 합니다.
어떤 영혼은 죽어서도 날마다 세수합니다. 죽은 자세로 그대로 있는 영가들도 있어요.
어떤 양반이 영통한 사람인데요, 광화문에 영가가 그렇게 많대요. 천도 안된 영혼들이.
욕심으로 죽으면 무명으로해서, 행이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이 하는데, 어떤 사람은 49일만에 천도를 받지만, 어떤 사람은 수천년간 천도를 못받아요.
본인이 스스로 해탈천도를 했거나, 천도재의 타력을 받는 사람은 전도몽상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무명이나 욕심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우마육축이 멋진 것으로 보여서 들어가거든요. 전도몽상입니다. 이런 걸 알면 당장 내가, 무엇을 사고 마느냐가 아니라, 이것이 내 문제임을 알지요. 이런 데 욕심 좀 내면 좋겠어요.
행 다음이 식입니다.
영식이 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어떤 경우는 명색이 먼저 생기기도 하고요. 일종의 유전자를 말합니다. 세포 분열하는 거요.
대개는 명색이랑 식이 함께 들어가는데, 수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식이 나중에 생기기도 합니다.
그다음이 육입입니다. 눈코입이 생깁니다.
수도를 한 사람은, 식, 명색, 육입으로 들어갈 때요,
강감찬 장군은 아버지가 부부관계를 일부러 늦게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음욕으로 탁태하니까, 골치 아픈 사람이 들어가요. 그런 걸 모르니까요.
그래서, “응애”하면서 나오는데요.
세상과 접촉했다 해서, ‘촉’입니다.
그 다음 ‘수’입니다. 좋고 싫은 것을 받아들인다고요.
그다음이 ‘애’‘취’‘유’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소유욕이 생겨서 취하려 하고요, 중생은 이렇게 삽니다.
육도윤회는 12인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생사’입니다.
왜 일체가 유심조인가. 내가 무명과 욕심으로 탁태되는지, 내가 어떤 부모와 인연되는지 모두 내가 짓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니까 부모를 원망해요.
쌍둥이도 다르거든요. 육신적 기질은 같더라도, 성격이나 지혜는 다른데요 전생에 닦은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99프로 이상은, 임신한 사람은 임신하고나서 음식 먹는 것을 조절해요. 어떤 부모도 자식에게 정성을 들이고, 기도를 해요. 그런데 왜 나오는 자식마냐 다르냐하면, 음욕으로 들어갔느냐 법으로 들어갔느냐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애취유에 얼마나 담담하게 사용하면서 살아갈것인지, 빠져서 살것인지 전부 자기가 짓습니다.
여러분 나이 먹으면 인과를 이해합니다. “세상에 공짜없구나”알게 되고요. “전부 제가 짓는구나”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초등학교 동창들 만나보면, 다들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동기교무들 20년만에 만났는데요. 그때는 다들 비슷했는데요. 어떤 사람은 벌써 법력을 갖춘 사람도 있고, 아직 철 없어서 상대심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부 자기가 지은 것입니다. 일체가 다 자기가 짓는것입니다.
어떤 자기가요? 여러분의 마음이요.
그런데 12인연의 실체를 들어갔더니 뭐냐? 공이라는 겁니다.
마음의 실체를 들어갔더니, 진공이더라.
그런데 진공한 가운데 묘유하더라
그것이 마음이고 부처입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도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요.
의두요목 12조 보지요.
12.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마음이 부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범부도 됩니다.
즉심시불이고, 즉심시범입니다.
13조 봅시다.
13. 중생의 윤회되는 것과 모든 부처님의 해탈하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윤회되는 것” ㅡ 수동적입니다.
“해탈하는 것” 능동적으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주의 주인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윤회되는 존재가 아니라, 해탈자유하는 존재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윤회되는 존재로 살아요. 끌려서 살아요.
천업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천업도 경하게 할 수 있고요.
정업도 내가 내 습관을 고치면서, 수양을 통해서, 업을 녹이고 녹일 수 있습니다. 본래의 마음은 걸림이 없습니다. 형체가 없으니, 무슨 걸림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본래 그런 겁니다. 욕심이 들어서 걸리는 겁니다.
14조 보시지요.
14. 잘 수행하는 사람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하니 어떠한 것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인가.
불리자성입니다.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불즉성입니다.
성즉법이고요.
자성이라는 것은, 참 나를 의미합니다. 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는 무엇일까요? 참나가 주인이 되는 삶입니다. 물질이 또는 체면이 아니라요. 형식이, 용김이 아니라,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성품을 깨쳤고, 성품을 경계 속에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불리자성도, 동정간 불리자성이어야 합니다.
초입자들이 좌선때는 불리자성이 되더라도, 동시에는 안되는 게 많지요.
개신교 신자들이 특히 그렇지요. 예배볼때는 불리자성이 되는데요. 교회 밖만 나가면 안되지요
공부길 잡은 사람은 동정간 불리자성하는 사람입니다. 삼학공부를 동정간에 놓지 않는 사람입니다. 정할 때는 입정입니다. 정에 들어갑니다. 동할 때는 일심입니다. 동할 때는 어디가나 주인으로 사는 것이 일심입니다. 세상에 다들 손님뿐입니다. 집에서도 손님이고요, 교당에서도 손님, 모임가서도 손님이고요. 정성도 아니고 일심도 아닙니다. 내가 나의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불리자성은 어디가서나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심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여기가서 손님, 저기가서 손님은 일심이 아니라요, 객입니다. 소중한 내 인생을 손님으로 사시겠습니까.
15조 보시겠습니다.
15. 마음과 성품과 이치와 기운의 동일한 점은 어떠하며 구분된 내역은 또한 어떠한가.
성품의 나타남이 마음입니다. 여기서의 마음은 아까 말한 마음과 다른데요. 성품에서 발현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성품에서 나오면 성품과 마음이 둘이지만, 나오기 전 자리는 하나입니다.
마음이 사람 마음이 아니라요, 우주도 같습니다.
우주 처지가 나뉘기 전 그 자리, 부모에게 몸받기 전 그 자리, 다 똑같습니다.
이치와 기운ㅡ 우리가 이치속에서 사는데요, 이치의 바탕하에 움직이는 것이 기운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이지, 결국은 하나입니다. 아까 진공묘유를 우주에 많이 쓰고요, 공적영지를 사람에게 쓰는 말인데요. 심성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이치와 기운은 우주에 쓰는 말입니다.
어쩔 때는 저런 표현, 어쩔 때는 이런 표현이 쓰이는데, 이해를 돋우기 위해 그렇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에서도 ‘심지’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자성’이라고도 표현되지요. 심지는 무엇이든 생성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자성은 내 마음자리를 되돌아가기 위한 뜻에서 쓰인 뜻입니다.
똑같은 말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말들을 쓰는 것입니다.
마음과 성품, 이치와 기운도 같은 말들입니다.
원불교 공부를 하다보면, 유교 공부도 도교 공부도 불교 공부도 하게되는데요. 같은 이치거든요. 용어들만 다르게 쓰이는 겁니다.
병원가니까 수명이 6개월 남았다는 선고를 받으면 어떻게 사시겠어요?
여러분 의두요목 공부하는 것은, 그러한 경계에서 해탈로 써먹자는 것입니다. 지적 호기심으로 언어의 유희로 즐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삶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교리를 말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이 생활속에서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잘못하면, 내가 학교를 안 나왔는데 왜 어렵게 말씀하시나 그러는데 ㅡ 여러분 삶의 직접적인 이야기를 오늘 드렸습니다.
III. 질문과 답
[문]
의두는 불교에서 화두잖아요?
의두나 화두에 대해, 선사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스스로 풀어야지, 어느 누군가가 풀어주는 식으로 도움을 받으면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자기가 풀어야하는 것인데요.
의두는 자기 혼자서 풀어나가야하는 것인지요? 아니면, 원불교에서는 함께 풀어야하는 것인지요?
[답]
좋은 질문입니다.
의두는 혼자 풀어야합니까? 같이 풀어야합니까?
혼자도 풀고요, 같이도 풉니다.
강연하고 회화할때도 의두입니다. 의두를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함께요. 그런데 오늘 제가 얘기한 거는 성리쪽으로 이야기 드렸습니다. 성리는 직관이라서 자기가 해야하는 겁니다. 성리는 견성이라 했죠.
여러분들이 다양한 궁금증이 있는데요, 다양한 궁금증이 들어가다 보면 점점 개수가 줄어듭니다. 하다보니까, 과거의 업력, 습관 욕심 이것들이 튀어나옵니다. 그럴 때 보통 경계들이요, 경계들이 나올 때 서원이나 신이 약한사람은 의심이 사라져버립니다. 의심을 하다보면, 여러분의 수많은 업이 여러분을 잡습니다. 그래서 수양이 동반 되어야합니다. 수양으로 업을 녹이며 해야합니다.
의두요목 20개가 하나만 제대로 풀면 다 풀려요. 20개는 하나이거든요. 의심을 하나 잡으면요. 어린이들이 계속 질문을 하듯이, 여러분도 마음속에 계속 물어야하거든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만법귀일’을 자주 말하는 겁니다. 무엇이 들어서 그러냐ㅡ 생로병사는 무엇이 들어서, 흥망성쇠는 무엇이 들어서, 진강급은 무엇이 들어서ㅡ 그렇게 들어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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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휴 기간동안 타이핑하시다니 ㅠ 감사해요!!
우왕... 인의교우님 감사해요 >0<
감사합니다~ 교무님께선 항상 서성거리지 말라 하시지요.
전에는 좀 지독하다 생각했는데, 이제야 직관의 무서운 위력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어찌 이 법문을 듣고 응답을 안하리까? 우리 모두 귀 기울입시다.
한번만 더 멈추어 봅시다~! 오늘은 같은 말이나 다른 표현이라는 말씀에 꽂힙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