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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년 유배의 삶 ‘음악 연주하듯’ 승화
요즘 주류예술은 돈과 직결된다. 이유는 예술이라는 꽃은 시장에서 화상과 관객이 피워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대가는 부자일 수밖에 없고 명작은 수천, 수억원을 호가한다. ‘이 작품 돈 냄새가 난다’는 시쳇말을 거론 안해도 돈을 먹고 자라는 예술은 응당 돈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간혹 사람냄새가 그리워 작가 스스로 외딴 곳에 궁지(窮地)를 파고 극한 상황을 연출하지만 붓을 놓는 순간 작품은 시장을 향한다.
그래서 작가는 배고파도 배고프지 않고, 외로워도 외롭지 않지만 예술의 자리까지 인간이 돈에 밀려났다는 점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타락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통시대 명작은 전적으로 혼자 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유배라는 강제된 궁지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외로움을 오직 붓 한 자루로 감내해야 한다. 요컨대 한 인간을 송두리째 평생 빨아 먹어야 피는 꽃이라고나 할까.
# 예술은 진정 시련을 먹고 자라는가
우리 문예사에서 작품과 생을 맞바꾼 예는 허다하다. 500권이 넘는 다산의 저작은 18년 강진유배의 대가다. 18세기 조선예원의 영수인 표암의 존재는 과거길이 막힌 30년간의 안산 고행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 추사체 또한 제주유배 8년과 그 이후의 결정이다.
그러나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생애는 고통으로 치면 이들을 다 모은 것이다. 1728년 이인좌 난으로 소론이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 원교는 출사를 단념하고 근 20년간을 야인으로 백하 윤순과 하곡 정제두를 사부로 글씨와 양명학 공부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차라리 원교 일생에서는 다행이었다.
원교의 진짜인생은 1755년 소론일파의 연잉군(훗날의 영조) 제거 역모사건(나주괘서사건)의 실패로 가담자 모두가 장살·옥사되는 가운데, 왕족의 후예이자 예술적 천품이 참작되어 영조가 원교에게 사약 대신 유형(流刑)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원교 스스로 이천리 유배 길을 나서는 1755년 3월30일을 성은(聖恩)으로 다시 태어난 생일 날로 삼을 정도였다. 원교는 조선의 최북단 함경도 부령에서 7년, 다시 최남단 절해고도인 전라도 신지도에서 15년간 도합 22년간을 유배지에서 살다죽었다. 요컨대 원교는 죽도록 유배지에서만 희(喜)·노(怒)·애(哀)·락(樂)을 모두 글씨에 담아냈던 것이다.
# 차라리 음악인 원교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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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이광사(1705~1777), ‘오언시팔곡병’(五言詩八曲屛) 중 6폭 부분, 72×38cm, 종이에 먹, 한빛문화재단 소장. | 그래서 그런지 원교의 글씨에는 유독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기 어려운 다양한 표정이 포착된다. 그중에서 날고 뛰는 행서(그림1)는 원교체의 진수인데, 작가의 성정(性情)과 기질(氣質)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다산과 같은 인물들은 반전이 심한 원교 행서를 “자형(字形)이 가증스럽다”고 혹평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씨에 개성을 그대로 담아내는 인물로는 원교를 따를 수 없다.
역사적으로도 그의 글씨를 놓고 스승인 백하와 서로 우열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하는 비록 초서라 하더라도 온화하고 단정하지만, 이광사는 행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자체라도 반드시 우울한 심기를 떨치듯 삐뚤삐뚤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규상은 ‘서가록’에서 “연기현감 황운조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원교글씨의 경악할 만한 면을 헐뜯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의 기걸(奇傑)한 기질로 액운이 쌓임을 만났으니 반드시 편안하지 못한 심기가 붓끝에서 울려나온 것일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것 같다.
하나의 획을 긋고 하나의 글자를 씀에 울림이 기세가 등등하고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진실로 은 갈고리나 쇠줄 같아 용이 날고 호랑이가 뛰는 듯한 기상이 바탕에 있다”(그림2)고 할 정도다.
요컨대 원교의 글씨는 획 하나 하나의 음악적 리듬에 자신의 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는 데 가장 큰 특장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것은 ‘서가록’에서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노래하는 사람을 세워두고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일 경우에는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썼으며, 노랫가락이 평조(平調)일 경우에는 글씨에도 평조의 분위기가 서려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글씨가 추구하는 바는 기(氣)라고 할 수 있다”고 한 데서 확인된다.
# 진·당 고법과 전서·예서를 동시에 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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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이광사, ‘침계루’(枕溪樓), 편액, 전남 해남군 대흥사 소재. | 그렇다면 원교글씨의 토대나 이상은 어디에 있는가. 원교의 문필은 고조부인 이경직·경석, 증조부 이정영, 조부 이대성은 물론 백부 이진유, 부친 이진검, 숙부 이진급 등이 타고난 명필임에서 확인되듯이 집안내림이다. 여기에다 당시 과장(科場)에서 시체(時體)로 통하던 당대 최고명필 백하 윤순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원교예술의 골간이 된다. 원교 스스로도 “내가 30세 이후로 고인의 필법을 전적으로 학습하였지만 필의(筆意)를 깨닫게 된 바는 백하에게서였다”라고 하였다. 요컨대 원교는 왕희지를 토대로 김생 이래 우리 글씨는 물론 중국의 당·송·원·명의 글씨맥락을 소화해낸 백하의 창경발속(蒼勁拔俗)한 글씨미학과 학서(學書)방법이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교의 글씨는 백하와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송은 물론 위·진 고법에서 거슬러 올라가 전서와 예서로 된 여러 비석 글씨를 아울러 구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원교가 왕희지를 근본으로 둔 옥동 이서나 공재 윤두서는 물론 백하 등 선대 명서가들의 서예이념을 공유하면서도 그 이전의 전·예서에 뜻을 두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교가 자신이 지은 ‘서결(書訣)’에서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왕희지 고첩(古帖)이 없었는데, 오로지 옥동과 민성휘 집에서 얻어 본 낙의론(樂意論)과 동방삭화상찬(東方朔畵像讚) 두 첩에서 내 평생 필력을 얻었다. 무릇 고첩은 모두 모각(摹刻)을 거듭하였으니 오늘날 왕희지의 본색을 정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한(漢)·위(魏)의 여러 비석글씨는 원래 각을 전하고 있어 심획(心劃)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이 두가지 첩을 여러 비석글씨와 비교하여 익혔다”고 고백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요컨대 원교는 오체일법(五體一法)을 주장하며 이미 추사가 목표를 삼았던 왕희지 근본의 해서나 행초 중심의 첩학파는 물론 이전의 전·예서 등 비학파의 성과까지 동시에 실천해낸 선구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 너무 심한 추사의 원교 비판
그러나 원교 글씨의 이러한 성취에 대해 정작 추사는 ‘서원교서결후(書員嶠書訣後)’에서 원교가 먹을 가는 법, 붓 잡는 법도 제대로 모르고, 구양순과 안진경 글씨를 일률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추사는 청에서 들어온 급진적인 비학파 이론을 토대로 원교가 왕체 소해법첩과 ‘순화각첩’ 등 첩학의 본래 결함도 모르고 있거나 한·위의 여러 비석글씨의 품평상의 오류까지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추사의 이러한 비판은 지금까지 본 대로 사실과는 다른 측면이 많을뿐더러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어 원교서예의 예술적 성취를 평가절하케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서결’ 통한 서예비평… 미학적 이상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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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1705~1777)의 ‘난저봉상 정약용등’, 비단·삼베에 먹, 개인소장. ‘난새가 날아오르고 봉황이 비상하며, 鼎이 뛰어오르고 용이 솟아오르듯하다’는 뜻이다. 당나라 한유의 ‘석고가’(石鼓歌)에 나오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서체는 고전(古篆)의 하나인 현침전(懸針篆)이다. | 필자는 최근 어느 잡지에 ‘지금, 한국미술의 현장’이라는 제하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요지는 서예 분야가 유독 다른 분야에 비해 작가나 비평가 교육자 전시기획자 등의 역할구분이 안되어 있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서단이 처한 현실이라 어쩔 수 없지만 실제 국제적인 행사까지 작가가 전시기획이나 비평도 하고 작가 선정을 하다보니 객관성이 떨어지는 일이 왕왕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옛 서예가들을 만나면서 정말 작가가 비평을 한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진다고만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이유는 현대와는 달리 적어도 전통시대에서 만큼은 이 말이 꼭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뛰어난 비평가는 그 이전에 훌륭한 작가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특히 시·서·화나 문·사·철이 종합되어 있는 서예의 경우 작가이자 비평가는 한 몸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이 모든 작가에게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비평이 있다고 해도 전문저작이 없고 편지나 시, 문집의 서문이나 발문 등을 통해 산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 작가이자 비평가인 원교
이런 가운데 우리 서예비평의 역사에서 추사 김정희나 표암 강세황의 존재는 단연 우뚝한 존재이고, 옥동 이서나 원교 이광사 또한 익히 아는 바대로 각각 ‘필결(筆訣)’과 ‘서결(書訣)’이라는 전문적인 서예이론서이자 비평서까지 남기고 있다. 특히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척박한 우리 서예의 비평문화에서 당시 글씨 역사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귀중하다.
특히 원교는 ‘필결’을 통해 자신의 서예철학이나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예를 보는 관점을 정확하게 피력하고 있다. 예컨대 원교는 우리나라 서예가 비평에서 통일신라 김생을 종장(宗匠)의 반열에 놓고 있다. 즉 “지금 김생의 진적이 거의 전하지 않으나 탑본 또한 기위(奇偉:기이하면서도 아름다움)하여 고려 이후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글씨이다…. 신라 승려 영업글씨는 수경(瘦勁:마르고 굳셈)함이 취할 만하고, 고려 승려 탄연은 오로지 ‘성교서(聖敎序)’만을 따랐으니 실로 우리나라의 비루한 획을 계몽시켰다”고 하였다.
# 비평의 척도로서 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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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의 ‘서결’(書訣)의 첫장과 마지막장, 17×8.5cm, 목각 탑본, 개인소장. 원교가 신지도에서 1764년 6월 1일 ‘서결’을 완성하여 아들 이영익에게 써 준 글씨를 모각한 탑본(榻本)으로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1766년 1월에 큰아들이 이긍익에게 써 준 것은 간송미술관에 전한다. | 이러한 관점은 원교의 선대 작가이자 이론가인 옥동 이서와도 궤를 같이한다. 그리고 조선의 명서가로서 원교는 수많은 작가 중 안평대군 이용, 자암 김구,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를 4대가라 평하였고 이 중에서 석봉을 최고로 쳤다. 특히 원교는 “석봉 같은 사람은 학식이 높지 못했지만 연습으로 고인의 필법에 부합하였고, 행초의 득의처는 웅심(雄深)하고 질건(質健)하여 송·원과 차이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반해 원교는 고려 말 조선 초 이후 조선의 국서체로 자리 잡았던 송설체는 물론 이를 토대로 한 안평대군의 글씨를 “재주는 있으나 일가를 이루지 못하였다”고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봉래 양사언에 대해서도 “봉래의 초서는 호탕하여 장지나 왕희지보다 낫지만 재능만 성해 그림자만 얻고 뼈를 잃은 격으로 특별히 일가를 이루지는 못하였다”고 혹평하고 있다. 이것은 백하 윤순이 “봉래는 역시 초서만 잘 쓰지만 역시 가장 훌륭하다”고 치켜세운 것과 달라 주목된다. 즉 원교는 서평의 기준을 고법(古法)이 녹아난 글씨의 굳센 기세에 두면서 우리나라 역대 서가 중 왕법을 기본으로 했던 김생, 영업, 탄연, 석봉을 최고로 꼽았던 것이다. 이러한 원교의 품평 잣대는 옥동의 예에서 보듯이 이미 송설체에 대한 반발로 왕법으로 복귀했던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가 작용되었음은 물론이다.
# 근골과 질박함이 구비된 글씨
그러면 이러한 비평의 잣대를 들이대는 원교의 글씨이 대한 이상이나 화두는 무엇인가. 원교는 특히 글씨의 고질(古質)과 연미(姸媚)에 대하여 말하면서 “상사(上士)가 도(道)를 들으면 근실하게 행하고, 중사(中士)가 도를 들으면 있는 듯 없는 듯하며, 하사(下士)가 도를 들으면 크게 웃어버리니, 웃지 않는 것은 도로 삼을 만하지 않다”고 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교가 모든 사람의 눈에 드는 것은 결코 글씨가 아니라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글씨는 근골(筋骨:근력과 뼈대)을 바탕으로 삼아야 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예의 고박하고 변화 있는 필의를 통해 험경(險勁)함과 소탕(疏宕)함을 동시에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옥동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지점인데 그래서 원교는 당 이후의 글씨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이며, 동기창의 말을 인용하여 수미(秀媚)한 자태가 글씨의 병폐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원교는 왕희지·왕헌지도 장지·종요에 비해 질박(質朴)하지 않다고 하면서 연미하거나 공교(工巧)보다 험경하고 졸박한 글씨를 우선적으로 보았다. 이에 원교는 이왕을 거슬러 올라가 종요와 장지를 따르고, 더 올라가 한나라 예서와 주나라 전서의 예스러운 필의를 배우라고 하였던 것이다.
#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미학적 이상을 대변한 ‘서결’
지금까지 ‘서결’을 통해 본 대로 원교는 위진필법과 전예중비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당대 이후 중국서풍에 대해 비판일변도 시각을 보였다. 그리고 조선의 명서가의 우열을 논하면서도 주관적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서결’을 통해 전예고비의 중요성과 공력(功力)의 가치를 일깨운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나아가서 원교의 서결은 당시 조선후기 시대적 관심사와 사대부들의 미학적 이상을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원교는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글씨가 비록 작은 도이지만 ‘반드시 먼저 겸손하고 두터우며 크고 굳센 뜻(謙厚弘毅之意)’을 지닌 뒤에라야만 원대한 장래를 기약 할 수도 있고, 성취할 수도 있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고 ‘서결’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공모전을 통해 자격증을 따듯 작가가 속성으로 배출되고 있는 요즈음에 더욱더 크게 들리는 것은 웬일일까.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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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李匡師) 초서(草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는 조선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명필이다. 또한 양명학자(陽明學者)이다.
그는 1755년(영조 31)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으로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될 때 이에 연좌되어 회령(會寧)에 유배되었다가 진도(珍島)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스승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배워 진(眞) ·초(草) ·전(篆) ·예(隸)에 모두 능하였고 원교체(圓嶠體)라는 특유한 필체를 이룩하였다.
이광사(李匡師)는 당시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의 그늘에 가려 잊혀진 인물이 됐고, 한 시절에는 그의 글씨마저 폄하(貶下)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추사(秋史)와 이광사(李匡師)의 일화로는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에 관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제주도로 유배길 에 해남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친구인 초의선사를 만난다.
그리고 이광사(李匡師)가 쓴 대웅보전(大雄寶殿)글씨를 보고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자네는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에 버젓이 걸어 놓을 수 있는가” 라며 호통을 친다. 추사의 극성에 못이긴 초의는 원교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으로 바꾸어 단다.
세월이 흘러 추사는 귀양살이 8년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다시 초의선사와 만난다.
그리고 내려놓은 이광사(李匡師)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아직 보존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때는 내가 잘못 봤어”라고 말하고 제자리에 다시 달게 하여 지금까지 대흥사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그리고 옆에는 추사의 무량수각(無量壽閣)도 있다.
아마 추사가 유배동안에 자기 반성의 더욱 성숙한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광사(李匡師)의 서체를 흠모(欽慕)하여 따른 서예가로 19세기 당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1772~1840)과 함께 “삼필(三筆)”로 불린 호남 최고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 있다.
특히 이름난 사찰에 가면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많이 볼 수 있다.
필자가 답사한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만 해도 아래와 같다.
*고창 선운사(禪雲寺) 천왕문(天王門), 정와 (靜窩)
*강진 백련사(白蓮寺) 대웅보전(大雄寶殿), 명부전(冥府殿), 만경루(萬景樓)
*지리산 천은사(智異山泉隱寺) 극락보전(極樂寶殿), 명부전(冥府殿)
*해남 대흥사(大興寺) 대웅보전(大雄寶殿) 천불전(千佛殿,) 침계루(枕溪樓) 해탈문(解脫門)
*김제 금산사(金山寺) 금강문(金剛門) 나한전(羅漢殿)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大雄寶殿) 설선당(設禪堂)
-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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