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金聲根(1875 ~ 1910)】 "1945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활동"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가족 배경과 청소년기의 이력 역시 알 수 없다. 이명은 다른 한자의 김성근(金星根)과 안근(安勤)이다.
1944년 1월 20일 일본 조지대학(上智大學) 재학 중에 학병(學兵)으로 강제징집당하였다. 1944년 5월 훈련을 마치고 중국 쉬저우(徐州)에 주둔한 일본군에 이동 배치되었다가, 6월 초에 다시 안후이성(安徽省) 쑤셴(宿縣) 지구로 이동 배치되었다. 이 부대에 강제징집당해 편입된 한국인 사병 정명(鄭明)·김성환(金聖煥)·전이호(全履鎬)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찾아가고자 1944년 6월 16일 병영을 탈출하였다.
서쪽으로 계속 잠행하여 중국군 유격대의 전초기지가 있는 허점(許店)에 도착하였다. 중국군 유격대장 오한민(吳漢民)의 도움을 받고 중국군 유격대 푸양(阜陽) 사령부에 머무는 동안 한국광복군에서 파견된 장조민(張朝民)의 안내를 받아, 1944년 6월 30일 안후이성 린취안(臨泉)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1944년 7월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 약칭 한광반)에 제1기로 입교하여 약 4개월간 장교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주로 장교로서 갖추어야 할 군사훈련과 정훈교육이었다. 1944년 11월 한광반을 졸업하고 광복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1945년 1월 새로 임관받은 광복군 장교들이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근무지 발령을 희망했으므로, 한국광복군총사령부는 이들을 충칭으로 불렀다. 이에 1945년 1월 21일 신송식(申松植) 교관의 인솔 아래 53명의 한광반 졸업생 광복군 신임장교들이 린취안에서 출발하여 1월 31일 충칭에 도착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는 2월 20일 이들을 한국광복군의 보충대인 토교대에 임시로 배속하였다.
1945년 4월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錫)의 요청으로 장준하(張俊河)·김준엽(金俊燁)·노능서(盧能瑞) 등과 함께 광복군 제2지대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광복군 제2지대에서 무기고(武器庫)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총사령부와 미국의 전략첩보기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가 합작하여 미군의 한반도 상륙 때 참가할 광복군의 특수 유격훈련을 실시하게 되자, 1945년 5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 OSS 제1기 훈련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4일 약 3개월간의 OSS 훈련을 마치고 광복군 내의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할 때, 국내정진군 대장인 이범석의 부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국내정진작전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10월 이범석 지대장과 함께 단체 귀국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46년 6월 인천으로 환국하였고, 얼마 후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665.html
임경석의 역사극장 14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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