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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호 임락경의 한국 신학 이야기]
나의 옛 스승 이현필. 임락경
내가 어릴 적에 다닌 유등교회에서는 주로 배영진 장로님께서 설교를 하셨는데 이현필 선생 이야기가 거의 빠지지 않았다. 훌륭하시단다. 또 다석 유영모 선생께서는 한국에 인물이 둘 있는데 북에는 남강 이승훈, 남에는 이현필이라고 말씀하셨다. 당대 신앙이 깊고 예수 잘 믿는다고 한 세 분 중에서 서재선 집사님은 일찍이 돌아가셨고 오정환(후에 오북환으로 개명) 집사님은 5학년 때 뵈었으나 이현필 선생님은 뵈옵지 못했다. 내 생전에 꼭 만나고 싶은 첫 번째 분이 이현필 선생이었고 그 다음 유영모 선생이었다. 이 선생님은 내 고향인 순창에 자주 오셨으나 후두결핵으로 몸이 점점 약해지시면서 도무지 오시지를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찾아가서 뵈옵고 그 단체에 들어가 살아야겠다고 각오했다. 그래도 초등학교는 졸업하고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는 차비도 없고 고향을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군 제대하고 동광원에 들어가 살면 좋겠으나 이현필 선생은 몸이 아프시다니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얼굴이라도 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고 노력한 끝에 찾아가 뵈옵고 동광원에서 살 수 있었다.
이현필 선생은 어떠한 분인가. 물론 <맨발의 성자>(엄두섭, 은성)라는 책에도 소개되어 있으나 내가 곁에서 지켜본 이현필은 책과 다른 점도 있고 책에 빠진 이야기도 있다.
내가 소개하고픈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이다. 광복 직후부터 선생님은 ‘병원 가지 말자’, ‘약 쓰지 말자’, ‘학교 가지 말자’, ‘고기 먹지 말자’, ‘원조 물자 먹지 말자’, ‘결혼하지 말자’ 이렇게 주장하셨고 가르치셨다. 그 당시에 서양의학이 들어와 우리나라에서 못 고칠 병들을 고쳐 내고 있는데 병원 가지 말자는 것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지나고 보니 병원 안 가도 고쳐질 병이 훨씬 많아졌다. 약 또한 좋은 약도 많으나 좋지 못한 약이 너무나 많다. 학교 또한 이렇게 학교를 많이 다니는 나라가 또 있겠는가. 그리고 교육 정책 잘못되었다고 대안학교가 줄줄이 생겨나고 있다. 고기 먹지 말자는 이야기도 그 당시 전 국민이 영양실조로 고생할 적에 고기 먹지 말자고 한다면 어느 신앙인인들 수긍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보니 고기를 많이 먹어 생기는 병이 너무나 많다. 원조 물자 또한 지속적으로 원조해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 국민의 식성이 바뀌면 그네들의 잉여 농산물을 수입해야 될 것을 미리 아신 것이다. 이 선생님께서는 50년 후를 뻔히 보시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현필 선생은 1913년에 나셨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권동)에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어려서 총명하여 이웃으로부터 장래가 촉망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주 영산포로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났고 그곳에서 닭 장사를 했다. 일본인 우찌무라 간조 계열의 관파 씨가 세운 교회(일명 관파교회)에서 여전도사와 관파 씨의 전도로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였다. 1927년에서 1932년까지 화순군 도암면의 숨은 신앙인 이세종의 움막에서 성경 공부를 하여 이세종의 신앙을 본받고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 자기를 부인하고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와 살게 된다. 그때 같이 성경 공부에 참여했던 최흥종 목사, 강순명 전도사와 광주로 진출한다.
광주 YMCA 농촌사업협동조합 총무였던 에비슨(G. W. Avison)이 세운 농업실습학교에서 강순명 전도사가 이끈 ‘독신전도단’에 가입하여 3촌(농촌·어촌·산촌)전도운동에 참여하다가 이 무렵 서서평 선교사가 세운 확장 주일학교에 나갔다. 그렇게 서서평 선교사와도 사귀고 신앙생활을 함께하였다. 신안동 재매교회(현 광주신안교회) 전도사로 시무할 때 백춘성 장로와 신앙적 교제가 이루어지면서 백춘성 장로는 일생동안 동광원과 인연을 맺고 전 재산을 동광원에 헌납하기도 했다.
23세에 서울 YMCA 야간부 영어학교에서 영어 공부를 하면서 김현봉 목사가 시무하는 아현교회에 출석하였고 YMCA 총무 현동완과 원경선 선생을 만났다. 25세에 백영흠 목사 처제인 황흥윤 씨와 결혼하여 화순 가래몰에 분가하여 살다가 이세종 선생의 순결 사상을 본받아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신앙의 동지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제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43년(30세) 남원 삼일목공소에서 오북환 집사를 만나 수시로 모여 예배하고 성경도 가르치면서 비밀리에 예배를 한다. 지리산 자락 서리내와 갈보리에서 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남원 부근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때 이 선생의 신앙에 감화를 받은 신도들이 아예 가정을 버리고 모이기 시작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수도 공동체가 형성됐다. 오북환 집사는 아예 삼일목공소를 정리하고 이 선생과 수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6년(33세) 남원에서 시작된 신앙의 동지들, 바로 말하면 제자들과 광주로 와서 YMCA 구내에서 머물다가 회장 최흥종 목사, 총무 정인세와 신앙적 교제가 이루어져 일생 동안 친교를 나눈다.
1949년(36세) 수도 공동체가 방림동 밤나무골 부지 100여 평을 김판용 집사로부터 희사받아 그 터에 서울 YMCA 현동완 총무의 희사금으로 집을 지어 이주했다. 후일에는 백춘성 장로가 헌납한 자산으로 봉선동 감나무골까지 확장하였다. 이때부터 매년 수양회를 했다. 수양회는 꼭 공동체 식구들만 모여서 한 것이 아니고 멀리서도 참석하였다. 강사로는 최흥종 목사,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신 다석 유영모 선생, 현동완 총무 등이 언제나 오셨다.
1948년 여수 반란 사건 이후 고아들이 늘어나니 1949년부터 의사 김상옥 씨가 돈 8만 원을 주어 화순 도암면 봉화리 청소골에 초가 3칸을 매입하고 고아 8명을 돌보기 시작했다.
1950년 목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던 윤치호 선생의 제안으로 광주 중심의 유지 70명이 모여 고아원 동광원을 설립해 운영하기로 하였다. 당시 광주 YMCA 총무로 있던 정인세를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정인세 총무가 망설이고 있을 때 이현필 선생이 준 쪽지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느니라”(야고보서 1:27)라고 적힌 걸 보고 원장직을 수락하였다. 한때는 600명까지 돌보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남침하자 동광원 가족들과 피난 가지 않는 유하례 선교사를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으로 피신시켜 77일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보호해 주었다. 피난 과정에서 8명이 순교하였다.
1955년 후두결핵으로 고생하다 며칠 동안 물 한모금 넘기지 못하면서 제자 한영우가 머물던 서울 신촌의 한 굴로 찾아갔다. 여기서 아무 고기나 사오라고 해서 그것을 끓여서 입에 떠 넣으라고 한다. 떠 넣어서 고기 국물이 넘어가니 다시 떠 넣으라고 한다. 이현필은 동광원 식구들의 금기 사항인 고기 국물을 먹게 된다. 그러고 나서 “나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받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닙니다” 하며 동광원 사람들이 고기나 약을 안 먹고 이 같은 것을 금기하는 율법주의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이같이 몸소 실천하였다. 고기나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진정한 믿음 생활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또한 1951년 제중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병원 가지 말자’, ‘약 쓰지 말자’ 하고 금기해 왔던 계명 아닌 계명을 본인이 입원하면서 깨트렸다.
광복 이후부터 결핵 환자들이 늘어났다. 1956년 폐결핵은 불치병으로 경원시되어 환자들이 발붙일 곳이 없어 YMCA 현동완 총무의 도움으로 후원을 받아 무등산 올라가는 길 산수동에 30명의 결핵 환자 수용소를 짓고 송등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최흥종 목사님이 운영하셨고 김준호가 운영을 넘겨받아 무등산으로 진출하여 무등원이 생긴다. 제중병원 카딩턴(H. A. Codington, 고허번) 원장의 지원이 지속된다.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 경기도 고양시 벽제 계명산 아래서 “오 기쁘다, 오 기쁘다”를 외치며 임종하셨다. 계명산에 무덤이 있다.
▲ ⓒ눈부신창섭
여기까지는 호남신학대학교 차종순 총장이 쓴 <성자 이현필의 삶을 찾아서>(대동문화재단)를 참고해서 썼다. 물론 그 이전에 엄두섭 목사님이 쓴 <맨발의 성자>도 참조했다. 글을 정리하다 보니 <맨발의 성자>에는 무서운 글이 쓰여 있다. ‘출판 및 판매에 대한 모든 권한은 본 출판사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사전 서면 허락 없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번역, 재제작, 인용, 촬영, 녹음 등을 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러한 글이 쓰여 있음으로 <맨발의 성자>에서는 글을 인용하려다 가능하면 안 하려고 했다. 물론 <맨발의 성자>를 집필하며 자료 수집 차 엄 목사님께서 동광원에 오셨고, 오실 적마다 나는 동광원 식구로 거기에 있었다. 또 내가 한 이야기도 <맨발의 성자>에 들어가 있다. 처음 출판할 때는 단체 사진에 내 사진도 들어 있었다. 아무튼 되도록이면 인용을 안 하려고 한다. 하지만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니 출판사와의 관계에서 큰 시비는 없을 것으로 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맨발의 성자>에서 빠진 이야기들을 더 쓰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이현필 선생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었으나 만약 그때 엄 목사님이 쓰시지 않고 내가 썼다면 동광원과 이현필은 이단이 되어 한국에 사이비종교단체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엄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출신으로서 교계에서 인정해 준 어른이시기에 그분이 쓴 글이 한국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엄 목사님의 글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교계에서 동광원을 이단시했다. 후에 <맨발의 성자>에서 빠진 이야기가 있고, 재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동광원 측에서 먼저 차종순 총장에게 글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물론 부탁드린 시간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좀 더 정확한 자료와 다양한 증언들을 참고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지금부터는 차 총장님이 정리해 놓은 글을 참고로 내가 본 이현필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
차 총장님 역시 동광원을 이단에서 완전히 구해 주시는 큰 공을 세우셨다. 다행히 ‘무단 복제 인용’ 그런 문구가 없어서 맘 놓고 정리해 볼까 한다. 그러나 이 책들이 나오기 전에 내가 듣고 정리해 놓은 글도 있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또 유하례 선교사에 관한 내용은 내가 전주 진달네교회에 있을 적에 김금남 누님(현 동광원 원장)께 엄 목사님과 같이 듣고 같이 기록했었다. 3일 밤낮을 들은 이야기다.
이현필 선생의 삶은 이러했다
이세종의 산당에서 진행되는 성경 공부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최흥종과 강순명이었다. 화순 도암의 이세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사람이 되어 그동안 모은 재산을 노회에 헌납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광주의 많은 목회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화순 도암 천대산 아래 이공의 산당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최흥종 목사가 대표적이었다.
또한 이세종을 찾아온 사람으로서 서울 감리교신학교의 정경옥 교수(1903~1945)가 있었다. 진도 출신으로 서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 3·1운동으로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 진도에서 진도중앙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에 투신하고자 서울 협성신학교(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뛰어난 저술과 강의로 명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영혼의 밤을 경험하고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에서 나오는 진리의 기쁨을 발견하는 삶을 살았다. 이때 그는 화순 땅에 성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이 소문을 듣고 천대산 밑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는 이세종을 찾아가 직접 대화를 나눈다. 그때 나눈 이야기를 ‘숨은 성자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1937년 7월 <새사람>이라는 잡지에 실었다.
정 교수가 이세종을 묘사한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과연 자기를 이긴 사람이요 참된 사랑의 사도이다. 그에게 간디의 정책도 없고 선다싱의 이론도 없고 내촌(우찌무라 간조)의 지식도 없다. 그러나 나는 간디보다도 선다싱보다도 내촌보다도 이공의 인물을 승경하여 마지아니한다. 나는 이런 위인들보다도 그를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 물론 그는 설교가도 아니요 신학자도 아니요 경제가도 아니요 사업가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가식 없는 인물을 존경한다. 공은 몸갈피가 호리호리하고 키는 다섯 자도 못 된다. 그의 목소리는 옆 사람이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고 부드럽다. 나는 이 소박하고 순후한 성자를 대할 때 마음에 넘치는 감격을 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천태산에서 숨어 사는 이공 이세종을 세상에 알린 이가 정경옥 교수였다.
이세종을 성자로 알아본 정경옥 교수와 달리 최흥종 목사와 강순명 등은 1932년 이세종의 산당에 찾아가 이세종과 창세기 성경 해석을 놓고 논쟁했다. 그 자리에는 청년 이현필도 함께 있었다. 최흥종과 강순명은 그 모임에서 이해력이 빠르고 명민한 이현필을 보고 이렇게 시골에서 있을 것이 아니라 도시로 나가서 성경 학교를 나와 목회자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이현필을 설득했다. 그들의 권유에 따라 이현필은 광주로 나와서 최흥종 목사의 주선으로 에비슨이 세운 농업실습학교에서 기숙하며 강순명이 조직한 독신전도단에서 일하게 되었다. 독신전도단은 20명으로 짜여 있었는데 기성 교단의 반대로 순천 양토장으로 내려갔으나 이현필은 신안동 재매교회 전도사가 되면서 순천으로 가지 않고 1936년까지 재매교회 사역에 전념했다. 최흥종 목사와 그의 사위 강순명은 광주의 성녀로 알려진 서서평 선교사와 깊은 사귐을 갖고서 광주의 빈민들과 나환자들을 돌보며 서 선교사가 세운 이일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이현필은 1938년에 결혼하여 3년이 지나서 아내가 임신했으나 자궁 외 임신으로 수술을 했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해혼(解婚, 결혼 후에 생활을 유지하되 남녀가 결혼의 권리와 의무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방식)했다. 그 당시 해혼이 유행처럼 되었다. 인도의 간디는 1906년에, 오방 최흥종은 1935년에, 다석 유영모 선생은 1941년에, 이현필은 1941년쯤에 해혼했다. 물론 이세종에게는 일찍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 아니 그 후로도 해혼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후로는 가정생활보다는 기도에 열중하고 동광원의 독신단체가 시작되면서 가정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신앙생활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고통이 시작된다. 이 선생님은 이때부터 한평생 음식의 맛을 가리지 않고 사셨다. 그 당시 모두의 바람이었던 흰쌀밥에 고깃국으로 한상 가득 차려 놓은 밥상은 대하지 않으시고 일생을 사셨다. 의복은 언제나 한복 바지저고리였다. 내가 알기로는 동내의나 털 스웨터는 한 번도 몸에 걸치지 않았다.
이 선생님에게 새벽은 언제나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기도도 방 안이나 교회 예배당이 아니었다. 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산기도였다. 어느 날 산기도를 하고 새벽에 내려오는데 누나가 나와서 맞이했다. 동생의 애처로운 모습에 아침상을 차려 주는데 밥상 아래로 기어 들어온 고양이가 이 선생의 동상 걸린 엄지발가락을 고기로 알고 물었다. 이때 이 선생은 “이거 고기 아니요” 하면서 빼냈다. 기도에 열중하고 생활이 검소하다 보면 즉 육이 고통스러울수록 영은 활발히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때부터는 멀리 보는 일들이 생겨났고 이때부터 그 영적인 투시력에 끌려 신앙생활을 같이 하려고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졌다.
밤나무 밭에서 살던 어느 날 한 식구가 탁발하다가 개에게 물렸고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는데 저녁 예배 시간에 “여러분이 오늘 탁발하는데 개에게 쫓기는 것을 보고 특별하게 기도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김승명 장로에게 들은 이야기다. 이 선생님과 좁은 방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분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분은 먼 곳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한참 그분 이야기를 하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이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오시오’ 하였고, 그이는 들어와서 그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한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내 고향 교회 배영진 장로님은 ‘이현필은 예언가’라고 소개하였다. 1958년쯤의 이야기다. 배 장로님과 사모님이 이 선생님을 보러 광주에 갔다. 인사하고 떠날 때 갑자기 이 선생님이 “사진기 있었으면 장로님 내외분을 찍어 두었으면 하나 사진기가 없다”고 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모님이 돌아가셨다.
▲ ⓒ눈부신창섭
한편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모든 목회자나 교인들이 도시마다 세워진 신사에 참배하게 되었다. 1942년에는 한국에 있는 모든 개신교를 통합시켜 일본기독교조선교단만 남겨두었으며 각 지역을 교구로 묶어 교구장을 한 사람씩 임명하였다. 또 각 교파에서 발행한 신문을 통폐합해 하나로 만들고, 교회도 통폐합해 도시 하나에 하나둘 정도 남기고 예배를 드리게 했다. 나머지 교회는 팔아서 군수품 납부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이처럼 일제에 의한 배교가 강요되던 시기에는 기독교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사람, 해외로 망명하는 사람, 깊은 산이나 오지로 숨는 사람, 무장투쟁으로 맞선 사람, 신사참배를 거절하여 감옥에서 순교당하거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구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현필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가? 이현필은 1940년에서 1942년 사이에 화순군 도암면 청소골, 쑥골, 마당바위(문바위)에서 영적 고뇌와 투쟁의 시간을 가졌기에 사회의 흐름을 제대로 몰랐다. 그러나 신사참배하는 기성 교회 목회자는 일제의 지시에 따라 할 짓 못할 짓 다 해야 했고 교인들도 신사참배 확인서가 없으면 배급을 받지 못했기에 교인들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때문에 영혼을 파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때 남원읍 교회에는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어 진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꿋꿋이 살아가려는 집사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남원에서 삼일목공소를 운영하면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던 오정환·서재선·배영진 집사였는데, 이들은 비밀 집회의 주축이 되었다.
오정환 집사가 삼일목공소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게 된 동기는 1935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정환 집사의 동생 오동옥은 탈마지(J. V. N Talmage, 타마자) 선교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서구적인 사고를 가지고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어, 운남성경고등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신사참배 거부로 1940년 9월 20일부터 광주유치장에 1년 6개월 정도 수감되었다. 그 후 1년쯤 지나 타마자 선교사도 수감되었다. 타마자 선교사는 1941년 12월 8일부터 이듬해 4월 5일까지 100일 동안 수감되었고 이 기간의 경험을 <감옥일기>라는 책으로 엮었다. 이 일기에서 오북환, 오동옥 형제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나의 선교 구역 북동쪽에 있는 구역에서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였지만 군사정권에서 선교사들의 순회를 제지시켰기 때문에 나는 예배당을 보지 못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지역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에 그 회중은 오 씨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나와 함께 지금 감옥에 있는 오 씨 두 형제의 아버지다.” 여기에 기록된 오 씨 형제의 아버지 집이 바로 내 고향 순창 유등이다. 오 씨 형제의 집이 유등면 외이리 480번지이고 내 본적이 480-1번지다. 오 씨 형제의 아버님은 내가 어릴 적에 마을의 노인으로서 택호가 장가실노인이셨다. 집이 컸기에 사랑채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고 배영진 장로님께 들었다.
오정환 집사가 먼저 풀려나 1941년쯤 남원으로 가서 세 분이 삼일목공소를 차린 것으로 본다. 오정환 집사와 오동옥 목사는 신앙의 길이 갈린다. 오동옥 목사는 교회 조직에 참여하여 교회 위주로 신앙생활을 하였고, 형 오정환 집사는 교회 조직을 떠나 말씀과 기도와 실천의 삶을 살고자 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후일 오동옥 목사는 오방 최흥종 목사 장례식 때 사회를 맡았다.
남원 삼일목공소에서 오정환 집사는 이현필 선생을 초청하고 그 후로 한평생 같은 신앙의 길을 걷는다. 삼일목공소에서 숨어 드리는 예배에 남원에서 여러 가족이 늘어나게 되니 남원읍 교회의 눈치도 보아야 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도 드러날까 봐 일단 흩어지기로 한다. 오북환은 남원군 주천면에 있다가 화순군 도암면 둔전리 도구밖골로, 서재선 집사는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로, 배영진 집사는 순창 유등면 외이리로, 강남순(김금남 원장 어머니) 가족은 구례군 산동면 둔사리 서리내로 떠나게 된다.
이현필의 신앙을 본받고자 모이는 사람들
1947년에서 1948년 사이 이현필이 주로 활동하던 곳이 광주 방림동(지금의 봉선동), 전라남도에서는 화순 도암, 지리산 서리내, 갈보리(갈밭), 해남, 강진, 진도, 보성, 곡성 등이었고, 전라북도에서는 남원읍과 수지, 대산, 대강, 주생 등에서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이현필만 다녀가면 교회가 흔들린다. 한 번만 지나가도 가정이 있는 사람은 가정을 버리고, 처녀 총각들은 결혼을 안 하고 출가하고 학업을 포기하고, 직장인들은 직장을 버리고 떠났다. 이처럼 이현필의 신앙을 본받고자 일생을 바친 이들이 늘어나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곳곳마다 모여 농사짓고 가르치고 구제하고 무엇보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다.
임락경 시골교회 목사 sigolzzi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