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과 스캔한 황성신문 광고는 고대교우회 홈페이지에 김성석교우님이 올리신 것입니다 100년전인 1905년에 황성신문에 실린 입학생모집광고를 보니 지금의 화려한 입학생모집광고와 비교되기도하고 뭣보다 당시 기울어가던 국운을 어떻게든 되살려보려던 선조들의 고뇌가 보이는듯해서 맘이 아프기도합니다 이런 거창한 의미를 떠나서라도 100년간의 고대역사에서 의미잇는 자료같아서 다른 분들도 볼수있도록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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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경위
이 내용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라고 생각되나, 1905년 3월 ~ 5월에 발간된 황성신문에서 모교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 관한 내용을 알아보던 중에 학생을 모집하는 광고내용을 보고 정리한 것을 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마침 을유년인 2005년 3 ~ 5월은 모교가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시기로서 모두가 축하해야 할 경사스런 달이기도 하므로, 보성전문학교(교장 신해영)에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낸 학생 모집 광고의 실체(實體)를 인터넷 상에서 손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광고 내용만 발췌하여 재편집한 것을 참고자료로 소개합니다.
2. 조사내용
모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학생모집 광고가 황성신문에서 처음 발견되는 날자는 광무 9년(1905년 을사년) 3월 22일이고 개학일은 4월 1일로 되어 있습니다. 위에 첨부한 맨 위의 광고(황성신문1)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가운데(황성신문2)는 법률학 전문과 학생들을 추가로 충원하기 위한 광무(光武) 9년 4월 3일자의 광고(二回 學員募集 廣告)로서, 이 광고에는 개학일자가 4월 12일(음력 3월 8일)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의 광고(황성신문3)는 3월 27일자 광고로서 그 내용은 3월 22일자와 동일합니다.
광무 9년인 1905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고 황성신문 3면 또는 4면에 광고를 낸 일자와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1) 학원(學員) 모집 광고일(총 13회)
3월 22일(수), 3월 23일(목), 3월 24일(금), 3월 25일(토), 3월 27일(월), 3월 28일(화),
4월 1일(토), 4월 3일(월), 4월 4일(화), 4월 5일(수), 4월 6일(목), 4월 7일(금), 4월 8일
<황성신문 1905년 3월 22일 ~ 4월 1일 : 7차례 광고 내용, 위의 황성신문 1 및 3 참조>
學員募集廣告(학원모집광고)
今에 普成專門學校를 新設하고 一般國民의 專門學業을 養成코져하야
(이번에 보성전문학교를 신설하고 일반국민의 전문학업을 양성하기 위하여)
一校內에 五個專門科를 分設하고 內外國 法律 및 實業學 等을 敎授하오니
(단일 학교 내에 5개 전문과를 분설하고 내외국 법률 및 실업학 등을 교수하오니)
願學人은 本月三十日(陰曆 二月二十五日) 內에 本校 事務所로 來하야 請願하시오.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3월 30일 내에 본교 사무소로 와서 청원하시오.)
學敎 處所는 洞 前俄語學校
(학교의 위치는 전동 전 러시아어학교)
各 專門科 科目(각 전문과 과목)
法 學 專門科(법학전문과)
理財學專門科(이재학전문과)
農業學專門科(농업학전문과)
商業學專門科(상업학전문과)
工業學專門科(공업학전문과)
右各專門科의 課程은 浩繁함으로 에 省略함.
(각 전문과의 과정은 그 분량이 많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함.)
入學試驗日은 三月三十 一日(陰二月二十六日) 上午十一時
(입학 시험일은 3월 31일 음력 2월 26일 상오 11시)
試驗科目(시험과목)
內外國 地誌及歷史(내외국 지지 및 역사)
國漢文 讀書及作文(국한문 독서 및 작문)
算術(산술)
但 官公私立學校의 普通科 以上 卒業證書가 有한 人은 試驗을 不要할 事
(단, 관공사립학교의 보통과 졸업증서가 있는 사람은 시험을 볼 필요가 없음.)
右各科中入學人의 年齡은 二十歲 以上으로 定홈.
(각 과의 입학생의 연령은 20세 이상으로 정함.)
開學日 四月 一日 陰曆 二月二十七日
(개학일은 4월 1일, 음력 2월 27일)
各專門科 擔任講師는 外國에 留學하여 專門 卒業한 人으로 二十人을 薦定하고
(각 전문과 담임강사는 외국에 유학하여 전문 졸업한 사람으로 20명을 선정하고)
其氏名은 浩繁함으로 에 省略함.
(강사 이름의 소개는 여기서는 생략함.)
右各種 專門科 外에 外國語學 一科를 特設附屬홈.
(각종 전문과 이외에 외국어학 한 개 과를 특별히 설치하여 부속함.)
私立 普成專門學校 校長 申海永(사립 보성전문학교 교장 신해영)
校監 趙齊桓(교감 조제환)
學監 鄭永澤(학감 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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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회 학생모집 광고일(4월 3일 ~ 4월 8일 : 6차례 광고)
4월 3일(월), 4월 4일(화), 4월 5일(수), 4월 6일(목), 4월 7일(금), 4월 8일(토)
<황성신문 1905년 4월 3일 ~ 4월 8일 : 6차례 광고 내용, 위의 황성신문2 참조>
第二回學員募集(제2회 학생모집)
普成專門學校를 設立하고 第一回 應募學員은 現己開學 敎授하압는바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제1회 응모학생은 현재 이미 개학해 교수하고 있는 바)
法律學 專門科 學員을 再次 募集하오니
(법률학 전문과 학생을 재차 모집하오니)
願學人은 本月十日(陰曆 三月初六日) 內에 本校 事務所로 來하야 請願하시오.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4월 10일 내에 본교 사무소로 와서 청원하시오.)
入學試驗日은 本月十一日(陰三月初七日) 上午十一時
(입학 시험일은 4월 11일 음력 3월 7일 상오 11시)
試驗科目(시험과목)
內外國 地誌及歷史(내외국 지지 및 역사)
國漢文 讀書及作文(국한문 독서 및 작문)
算術(산술)
但 官公私立學校의 普通科 以上 卒業證書가 有한 人은 試驗을 不要홈.
(단, 관공사립학교의 보통과 졸업증서가 있는 사람은 시험을 볼 필요가 없음.)
右各科中入學人의 年齡은 二十歲 以上으로 定홈.
(각 과의 입학생의 연령은 20세 이상으로 정함.)
開學日 本月 十二日 陰曆 三月初八日
(개학일자는 4월 12일 음력 3월 8일)
右各種 專門科 外에 外國語學 一科를 特設附屬홈.
(각종 전문과 이외에 외국어학 한 개 과를 특별히 설치하여 부속함.)
北署 洞(북서 전동)
私立 普成專門學校(사립 보성전문학교)
3. 조사 결과
위에서 보면 1905년 3월 22일자의 광고에서 제1회 응모한 합격자의 개학일이 4월 1일로 정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법률학 전문과 학생을 재차 충원하는 4월 3일자 광고에서 제2회 모집 합격자의 개학일은 4월 12일이라고 공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성전문학교를 신설한 해인 1905년에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황성신문에 낸 광고의 횟수는 1905년 3월 22일부터 4월 8일까지 총 13회에 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참고1 ] 1905년 보성전문학교장 신해영(申海永, 1865∼1909 : 고종 2 ∼ 순종 3)의 약력
조선 말기 관리·교육자. 자는 윤일(潤一), 호는 동범(東凡). 본관은 평산(平山). 경기도 김포(金浦) 출생. 갑오개혁 때 관비로 일본에 유학,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04년 탁지부 참사관이 되고 이듬해 학부 편집국장에 임명되어, 이용익(李容翊)의 부탁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설립을 추진했으며, 그해 5월 보성전문학교 초대교장에 취임했다. 박은식(朴殷植)과 교분이 두터워 서우학회(西友學會)의 운영을 돕기도 했으며, 1906년에는《윤리학 교과서》를 지어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의 고취와 국권회복의 의지를 심어주었다가 후일 통감부로부터 불온한 교과서로 낙인찍혀 발매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1907년에는 재일한국인 유학생 감독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참고로 황성신문 1905년(광무 9년) 1월 16일자의 사립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학생모집 광고를 보면 보성전문학교 교장 신해영(申海永)이 동교의 강사로 임명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2 ]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 이용익(李容翊, 1854∼1907 : 철종 5∼순종 1)의 약력
조선 말기 정치가. 함경북도 북청(北靑) 출생.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明成皇后)와 민영익(閔泳翊) 사이의 비밀연락을 담당하다가, 민영익의 천거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단천부사로 승진했다. 1887년 영흥부사로서 감리함경남도광무(監理咸鏡南道鑛務)를 겸했다. 이어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발탁됐으나 1889년 민란으로 탄핵을 받아 나주 군지도로 유배되었지만, 곧 풀려나와 강계부사·철도사감사 등을 지내고 헌병사령관이 되었다. 1902년 탁지부대신이 되어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이준(李儁)·민영환(閔泳煥)·이상재(李商在) 등과 개화당을 조직, 친러파의 영수로서 일본의 조선침략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교섭하였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맺어진 뒤에 배일분자(排日分子)로 지목되었고,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압송되었다., 1905년 귀국하여 경상북도관찰사 등을 지내며 일진회(一進會) 타도를 주장하였다. 한편 일찍이 궁내부의 직조소를 개편, 견직기술을 강습하게 하였고, 각 도에 공업전습소를 설치했다. 1898년 석판인쇄기계를 도입하였고, 1903년 철도의 부설, 금융기관의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1905년 자비로 보성학원(普成學院 : 고려대학교 전신)을 설립하는 등 근대적 개혁과 민족계몽에 힘썼다.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육군부장이 되어 일본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프랑스, 러시아의 세력과의 제휴를 도모하라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프랑스로 가던 중 일본관헌에게 발각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사망했다.
첫댓글 저걸 다 해석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