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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실체
고조선은 전국시대 7웅 연나라와 힘 겨룬 북방 강국
고조선의 실체는 무엇인가.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 고조선은 신화의 세계 혹은 문명의 변두리에 있던 세계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에서 고조선의 역사는 유장하다. 공자의 춘추시대에 이미 뚜렷한 자취가 있다. 후대 한반도 왕조보다 역사가 길다. 2000여 년 전 후대들이 한반도로 들어온 뒤 잠긴 고조선의 문을 열려는 노력이 오늘 활발하다.
고려사에 “평양에 도읍한 단군이 전조선(前朝鮮)이고 기자조선은 후조선(後朝鮮)이며… 41대 후손 준왕(準王)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나라를 빼앗아 왕검성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卷58 志 卷12 地理)”라고 한다.
이것이 당시의 역사 인식이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은 실체가 없다. 위만조선만 불쑥 나타나 사기에 충실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사기의 미스터리다. 이런 기록은 ‘은나라와 기족의 역사를 제외하면 한국사는 BC 190년께 연나라에서 온 중국인 위만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자인하는 꼴이다. 위만 이전, 41대 왕까지 이어져 왔다는 고조선에 관한 구체적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왕궁의 유적이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아 온갖 억측이 난무한다. 고조선과 관련해 한국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시경(詩經)의 주나라 선왕(BC 827~782) 때 일이다. “왕이 한후(韓侯)에게 준 것은 그 추족과 맥족(貊族), 북쪽 땅을 받고 제후가 되었다(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大雅)”는 기록이다. 이 한후를 상당수 한국 사학자들은 한국인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록으로 이해한다. 역사의 시작을 중국의 한반도 지배에서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AD 1세기 중반 한나라 때 유명한 학자 모장(毛<8407>)은 시경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을 ‘북방의 제후급 인물이 오랑캐를 토벌한 것을 찬미한 것’이라고 했다. ‘한후’는 주나라 왕실의 신하인 제후를 의미하는 것일 뿐 한민족과는 관계없다는 의미다. 한민족을 의미하는 한(韓)의 개념은 당시엔 형성되지도 않았다. 시경에는 한후가 주나라 왕명을 저버리지 않고 밤낮으로 노력하면 제후의 지위를 유지시켜줄 것”이라는 구절과, “한후가 분왕(汾王) 조카딸과 결혼(韓侯取妻 汾王之甥, 大雅)”한 후 그 제후와 연나라 백성의 노고를 치하하는 이야기가 이어질 뿐이다. 즉 주나라 제후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시경에 나오는 ‘주나라 선왕 때 일’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단어는 한후(韓侯)가 아니라 맥족(貊族)이다. 맥족은 예족(濊族)와 더불어 고조선의 근간을 구성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예맥은 관자에 처음 나타난다. 관자(管子)의 “제나라 환공(桓公, ?~BC 643)이 북으로 고죽·산융·예맥에 이르렀다(北至於孤竹山戎濊貊, 小匡)”는 기사가 예맥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고죽은 은나라의 후예로 기족의 영역(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 지역)을 바탕으로 한 나라다. 고조선의 뿌리인 예맥은 요서~북만주에 걸쳐 활동했고 이후 부여와 고구려·전연·북위 등을 건국한 역사 주체다.
이어 전국시대 말기의 순자(荀子)엔 “진(秦) 북쪽으로 호(胡)와 맥(貊)이 접한다(强國)”는 기록이, 사기엔 “진(秦) 승상 이사(李斯)의 글에 ‘저는 (진시황을 보필하여) 북으로는 호맥(胡貊)을 쫓고…(李斯列傳)”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전국시대의 맥은 현재의 내몽골이나 요서 지역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BC 3세기에 편찬된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북해의 동쪽인 이예(夷穢)지방에서는 큰 게와 능어(陵魚)가 난다(北濱之東 夷穢之鄕大解陵魚, 卷20)”라고 한다. 여기서 북해는 발해로 보고 있다. 따라서 BC 3세기를 전후해서는 예족이 이미 요동 지역으로 많이 이동해 와있음을 알 수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예맥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입장을 종합해 “원래 예가 거주한 요하 동쪽에, 요서나 중국 북방의 맥이 이주해 ‘예맥’을 형성했지만 예맥이 언제 어떻게 하나의 종족 집단을 이루고 동으로 이동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사기 기록에 ‘예맥’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종족 연합체로 등장하고 흉노와 동쪽에서 접경한 사실에서 BC 3~2세기 무렵 예맥이 하나의 종족으로 존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고 본다”고 했다.
고대 한국인들의 영역은 현재의 베이징에서 북만주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 다만 중앙집중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해 고도의 행정조직을 갖췄다면 남았을 정리된 기록과 사서가 일절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기록은 없어도 역사는 계속됐다.
고조선과 연관된 ‘조선(朝鮮)’이란 단어도 관자에서 처음 나온다. 사실 ‘고조선’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가 만들어낸 말이다. 관자에는 “발조선에서 생산되는 범가죽(發朝鮮文皮, 卷23)”이라고 하면서 “(천금을 주어야) 8000리나 떨어진 오월이 (제나라에) 조공할 수 있을 것이고 범가죽은 금같이 귀하니 그 정도 지불해야 8000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발조선이 조공할 것이다(然後八千里之吳越可得而朝也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卷24)”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이 단독으로 나오지 않고 ‘발조선(發朝鮮)’이라 하여 여러 조선이 있는 것처럼 돼있고, 제나라를 기점으로 오월과 발조선이 모두 8000리로 되어있다. 발조선은 북방이다. 서쪽은 이미 여러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발조선의 남방한계선은 과거 고죽국(孤竹國)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한다. 관자는 BC 7세기께 “제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영지를 정벌하고 부지산(鳧之山)을 지나 고죽을 짓밟고 산융과 대치하였다”(大匡)고 했다. 고죽국이 멸망하고 이 일대는 연나라의 세력 범위에 들어간다. 과거 고죽국 지역이 자연스럽게 발조선의 남쪽 한계선이 됐을 수 있다. 결국 ▶은의 후예인 기국 또는 그 계승 민족이 이 시대에는 발조선으로 불렸거나 ▶이들 기국과 북방에서 남하한 맥족이 혼합하여 발조선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일 수도 있고 고조선의 전 단계 국가일 수도 있다.
따라서 BC 7세기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은 발조선이며 그들의 위치는 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에 이르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발조선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료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 지역은 중앙아시아에서 발달된 청동기와 금·은 세공기술의 이동통로로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고 신화적으로는 남방계(난생)와 북방계(천손)의 혼합지역이며,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온돌문화를 발달시킨 지역이다. ‘조선’은 이후 당당한 정치적 주체로 사서에 등장한다.
위략(魏略)에 “과거 기자 이후에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가 쇠퇴해가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왕실을 받들려 했는데,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이를 중지하고 예를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라고 하였다.
조선이 주왕실을 받들었다는 것은 명분일 것이다. 이 구절은 고조선이 전국 시대의 강국 중 하나인 연나라와 힘을 겨룰 정도의 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 연나라는 수십만의 대군과 700여 대의 전차, 6000여 필의 말, 10년을 지탱할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나라 때 전국책(戰國策)은 기록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연이 왕을 칭하고 조선후도 왕을 칭했다는 점이다. 연이 왕을 칭한 것은 역왕(易王, BC 332~321)의 시기. 그러므로 고조선은 전국 칠웅과 유사한 제후국 형태를 유지하다가 BC 4세기께 들어와서는 이미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국 7웅과 어깨를 겨루는 북방의 국가, 이것이 고조선의 실체다.
BC 4세기 이후 고조선과 연나라는 항쟁기에 들어선다. BC 3세기께 “연 장수 진개가 동호(東胡)를 기습하여 동호는 1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다(史記 匈奴列傳)”고 한다. 삼국지에는 “(조선왕의) 자손들이 교만해져서 마침내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은 매우 약화되었다(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고 했다.(동호가 고조선임은 이미 1회에서 밝혔다.)
만번한은 평북 박천 또는 현재의 랴오양(신채호의 견해) 등으로 비정되지만 랴오양 서쪽(요하 하류)으로 보는 것이 옳다. 요하 지역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645년) 진흙이 200여 리나 돼 인마가 통과할 수 없다… 대습지여서 당태종조차 말의 칼집에 장작을 메었다(寶藏王)”고 나온다. 따라서 연나라 대군이 요하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일대에는 후일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요동성·백암성(白巖城)·안시성(安市城) 등이 건설됐다. 결국 진개는 고조선(동호)의 서부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동호라는 단어가 사기에 처음 등장한 이후 ‘조선후’라는 말은 주로 동호(선비, 모용, 요 등)가 계승했다.
고조선은 진시왕의 진(秦)나라와도 관계가 있다. 삼국지에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까지 이르렀다. 당시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의 습격을 두려워해 진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魏書 東夷傳 韓)” 는 기록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는 길다. 은나라의 유이민과 숙신, 북방의 맥·동호 등을 기반으로 형성돼 BC 7세기에는 발조선으로 춘주 5패국이나 전국 7웅국과 같은 제후국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엔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연나라와의 대치했고 연의 공격으로 국력의 소모가 있었으며 BC 3세기 말에는 진(秦)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강국 고조선이다.
고조선 뿌리는 숙신, BC 2000년 이전 은나라 방계국가
청나라 고증학자 호위(胡渭)는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산동반도는 요(堯) 임금 때부터 조선의 땅”이라고 썼다. 사기에 “요(堯)임금은 의중을 시켜 우이(<5D4E>夷:또는 욱이[郁夷])의 땅, 즉 해 뜨는 곳(양곡·暘谷)에서 일출을 경건히 맞게 하였다(卷1 五帝本紀 堯)”고 하는데 주석에 “우이(<5D4E>夷)의 땅은 청주(靑州)”라고 했다. 청주는 현재의 산동반도다. 이 기록은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우이는 누구인가.
우공추지에 “동이 9족은 우이이고, 우이는 조선의 땅(四庫全書 經部 禹貢錐指 4卷)”이라고 했다. 나아가 사기에서 “양곡은 바로 해 뜨는 곳(日所出處名曰陽明之谷)”이라고 한다. 양곡을 매개로 산둥반도=양곡=조선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일단 이 기록이 고조선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시기, BC 2400년경의 기록이다. 그러나 고조선 연구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숙신(肅愼)이다. 고조선 그 자체이거나 고조선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숙신은 물길(勿吉)·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다 후일 여진족·만주족이 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는 “정시(240~248) 때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왕 궁(동천왕)은 매구루(買溝婁)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해 추격하게 했는데 옥저를 1000여 리 지나 숙신씨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6BCC>丘儉傳)”고 나온다. 옥저는 현재 함흥·신포 지역, 매구루는 현재 원산에 가까운 문천이다. 그러므로 숙신씨의 남방 한계선은 최소 금강산 일대 또는 강릉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한반도를 숙신의 나라 가운데 남부 지역으로 지칭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건녕 3년(896)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 무엇보다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그 주인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따라 왕건을 그 성주로 삼았다(太祖紀)”고 돼 있다. 이때 조선은 한반도라기보다 고조선의 옛땅, 숙신은 만주 또는 한반도 중부, 변한은 한반도 또는 남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숙신은 고조선 중심부라는 느낌을 주는 말이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머리글에는 금사세기(金史世紀)를 인용, “숙신은 한나라 때는 삼한(三韓)이라 했다”고 돼 있다.
이처럼 숙신과 조선(고조선)이 혼용되는 사례는 많다. 고조선 혹은 그 일부를 숙신으로 보거나 조선과 숙신을 상호연결된 독립 주체로 보는 식이다. 이런 혼용은 전설의 시대에서부터 청나라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숙신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사기에 나온다. “(우 임금은) 남으로는 북발, 서로는 융적 강족, 북으로는 산융과 발식신(發息愼) 등을 위무했다.”(卷1 五帝本紀 舜) 우(禹) 임금은 전설상의 인물로 정확한 시기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BC 2000년경 인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 때 대학자 정현(鄭玄)은 “식신(息愼)은 숙신으로 동북방 오랑캐”라고 해설했다. 일주서(逸周書)에도 “직신(稷愼)은 숙신(王會解篇)”이라고 한다. 숙신은 중국 전설의 시대부터 존재해왔던 나라 또는 민족이며 ‘발식신=발숙신’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발식신은 다른 용례를 찾기 어렵고, 가장 가까운 표현이 관자에 나오는 최초의 조선 언급인 발조선(“發朝鮮文皮”:管子 卷23)이어서 발조선은 발식신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된다. 즉 ‘식신=숙신=직신=조선’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숙신이나 조선은 어떤 민족명을 한자를 빌려 표현한 음차어라는 점과 고조선은 전설시대 때부터 중국민과 함께 존재했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죽서기년에는 “식신(또는 숙신)이 BC 1120년(무왕 15년)과 BC 1107년(성왕 9년)에 각각 사신을 주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이는 후한서에 “주 무왕이 은나라를 타도한 후 숙신 사신이 왔다”는 기사(卷115, 東夷傳)와 일치한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형제국)로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정비된 형태의 국가였으며, 숙신이 고조선의 전신이라면 은나라의 북부에 있던 숙신이 은나라 유민과 결합해 고조선이 발전적으로 통합됐을 가능성이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주나라 왕이 신하를 진나라에 보내어 한 말 가운데 “무왕이 은나라를 이긴 후(BC 1100여 년경) 숙신·연·박이 주나라의 북쪽의 땅이 되었다(昭公九年)”고 한다. 즉 주나라의 북쪽에 숙신·연·박이 연하여 있다는 말이고 연(燕)은 현재의 베이징 부근이다. 이 박은 고대 한국인을 지칭하는 발(發)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되고,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선민족인 맥족(貊族)으로 보고 있다(劉子敏古代高句麗同中原王朝的關係). 이것은 이후 순자의 “진(秦), 북으로 호맥(胡貊)이 접한다”, 사기의 “진(秦) 승상 이사(李斯)가 북으로 호맥(胡貊)을 쫓았다”는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5회 참고>). 나아가 박·숙신은 발신식(발조선)의 다른 표현으로도 추정된다. 결국 주(周) 초기 숙신 영역의 남방 경계가 고죽국에 근접한다.
사기(史記)에 “공자(BC551~BC479)가 진나라(현재의 카이펑 인근)에 머물 때 화살 맞은 매들이 떨어져 죽자 공자가 ‘이 화살은 숙신의 것’이라고 했다(卷47 孔子世家)”고 한다. 공자가 숙신의 화살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화살 맞은 매가 멀리 날지 못했을 것이니, BC 6세기 숙신의 영역은 넓게 잡으면 현재 허베이(河北) 북부, 황하 이북이나 연나라 이북인데 이는 고조선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록은 국어(國語:춘추시대 8국 역사서)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전한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卷18 辨物篇), 한서(漢書)(卷27五行志) 등에도 전한다.
한나라 말기 양웅(揚雄·BC53~AD18)이 저술한 방언(方言)에는 “조선과 열수 사이”라는 말이 20회 이상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연의 경계 밖으로 더러운 오랑캐인 조선과 열수의 사이(第1)” “무릇 초목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북연과 조선 사이를 일컬어 초망(가시덤불)의 땅이라 한다(第2)” “연나라의 동북쪽과 조선, 열수의 사이를 일컬어 목근(무궁화)의 땅이라고 한다(第5)” 등을 들 수 있다. 대체로 고조선을 낮춰 보는데 이런 경우는 중국을 괴롭힌 경우 많이 나타난다. 다루기 힘든 상대라는 의미다. 방언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토대로 보면, 고조선은 연나라 북쪽에 연이어 있다. 이는 숙신과 고조선 영역이 일치함을 확인시킨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열수(列水)다. 지난 2000여 년간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대동강 중심설이 일반적 견해였다. 고려 때 삼국유사, 조선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사강목(東史綱目)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을 거치면서 견고해졌다. 고조선의 수도는 현재의 평양, ‘패수(浿水)=청천강(또는 대동강)’ ‘열수(冽水)=대동강(또는 한강)’ 등으로 보고 있다.
중국 최고(最古)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BC3~4C로 추정)에는 “열수 동쪽에 열양(列陽)이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해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卷12 海內北經)”고 한다. 같은 책에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고 이 나라를 조선이라고 부른다(卷18 海內經)”고 한다.
그런데 열수가 대동강이라면 이 기록은 틀렸다. 대동강(또는 한강) 동쪽에 열양이 있고 그 동쪽에 고조선이 있다면 고조선은 현재의 함흥이나 강릉이다. 고조선은 이 지역을 단 한번도 지배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열수는 대동강이 아니다.
사기 조선열전의 주석으로 실린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 등의 강이 있는데 이 세 강이 합해 열수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나 조선은 이 강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것이다(朝鮮列傳)”라고 한다. 그런데 수경주에는 습여수(濕餘水)가 나오는데 이 강이 유수(濡水:란하의 다른 명칭)와 합류하는 강이라고 한다(濡水). 현대의 대표적 고대사가 리지린은 “이 습여수가 바로 습수”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열수는 란하다. 리지린은 “열수는 란하의 지류인 무열수(武列水)와 같은 강”이며 그 근거로 수경주에 “유수가 흐르는 도중 무열계(武列溪)를 지나면서 이곳을 무열수라 하고 무열수의 약칭이 열수”라고 한 기록과 열하지(熱河志)에 “란하가 과거 무열수”라 하고, 건륭황제의 저작인 열하고(熱河考)와 수경주에서도 “열하는 무열수”라고 하는 기록을 들었다. 즉 ‘란하=무열수=열하=열수’라는 것이다. 열하지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이전까지는 란하를 유수라 했고 그것을 난수(難水)라고 썼으며, 당나라 때 이르러 란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열수는 란하 유역이나 대릉하 유역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산해경에 나오는 동해는 현재의 서해, 북해는 발해인 것이다.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베이 지역과 남만주 지역에서 나타나고, 한 이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나타난다. 이는 고조선의 영역과도 일치한다. 고조선 기원을 연구했던 러시아의 L. R. 콘제비치도 한국의 역사적 명칭에서 “사료에 나타나는 고대 조선족과 숙신족의 인구 분포가 지리적으로 서로 일치하고, 숙신과 조선족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새를 공동 토템으로 가지고 있으며 두 민족 모두 백두산을 민족 발상지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토대로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고 했다.
숙신과 조선이 동계(同系)라는 점을 대표적 선각인 신채호도 지적했다. 신채호는 “발숙신(發肅愼)이 발조선(發朝鮮) 대신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숙신’인데, 만주원류고에서 건륭대제가 숙신의 본음을 주신(珠申)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음도 결국은 주신이 된다”고 했다. 고대 문헌에서는 조선·숙신·식신 등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어 ‘조선=숙신=식신’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숙신의 역사를 바탕으로 보면, 고조선은 전설의 시대부터 역사에 뚜렷이 존재해온 민족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국으로 주나라 초기에는 사신을 보낼 만큼 일정한 국체를 가졌으며, 황하 유역 이북을 지배하다 은나라 멸망 후 은의 유민과 결합해 보다 확대된 고조선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초기 고조선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