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한우화회 대표이신 야마모토 히로시(山本浩) 쌤으로부터 부고 메일을 받았습니다.
조심조심 메일을 열었더니, 아아~ 이런!!!
"오사카의 야마다 아키히로 씨가 지난 7월 22일 소천하셨습니다.
장례식은 고인의 뜻에 따라 7월 27일에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렀습니다.
지병이던 백혈병이 갑자기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향년 83세였습니다."
6월에도 오류문고에 기증하는 책과 편지를 보내주셔서,
그 후 통화까지 했던 터라 더욱 놀랐습니다.
야마다 아키히로 씨와 부인이신 나미코 씨 두 분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아는 만큼만 써보겠습니다.
혹 이분들을 모르시는 분은, '이런 그리스도인도 있었구나' 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봉사의 생애
야마다 씨 부부는 일본 무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무교회 교우들도 잘 아는 분들입니다.
일본을 방문한 한국교우들이 오사카에 갈 경우, 환영하고 안내하는 임무는 이 두 분이 다했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일상생활에서도 봉사를 많이 하셨습니다. 한 예를 보겠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는데,
어느 분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傳說集(Selma Lagerlof 著)이라는 책을 꼭 듣고 싶다고 했나봅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두꺼운 책을 열심히 낭독하여 녹음했다고 합니다.
(부인 나미코의 목소리가 참 선명하고 좋았다고 기억합니다.)
비오는 날, 자전거를 타고,
그 시각장애인 부부의 마샤지샵으로 녹음테이프를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몇 년후 그 시각장애인 부부가 아직도 매일 듣고있노라 하여 감격했다는 글이 있습니다.
오류문고에도 그 테이프를 기증해 주셨습니다.
2. 어린이를 위한 성서학교 운영
두 부부는 자녀가 없습니다.
아들을 보기는 했지만 태어난 후 곧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서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성서학교는 작은 아파트였는데, 소수 아이들이 함께 성서를 읽고 복음을 배웠습니다.
어머니들의 부탁을 받아 하교후 종이접기 같은 방과후 활동도 하였습니다.
3. 오류문고지원회 업무
스기야마 나오(杉山直)라는 분이 마 선생(政池仁)의 권유로 한국에 기독교관련 도서관을 만드시도록
책을 지원하자 하여 오류문고가 설립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일을 부인이신 나미코 씨가 이어받았습니다.
남편은 고소공포증이 심하여 비행기를 탈 수 없어 한국을 오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류문고지원회가 해체된 이후에도 두 분은 지속적으로 책을 기증하였습니다.
소장하고 있던 책은 물론, 좋은 책이
출판되면 사비로 구입하여 보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책이 지난 6월의 징용공 관련 책입니다.
4.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
두 분은 오사카에서 성서집회를 하셨던 구 선생(黑崎幸吉)에게서 배웠습니다.
당연히 도쿄에서 오시는 모든 무교회 선생님들과 교류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야 선생(矢內原忠雄)이 히메지에 있는 한 교회에서 강연회를 하셨는데,
어떤 연유인지 그 원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나미코 부인이 당시 강연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녹음까지 해둔 게 남아 있어서
다행히도 원고를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글이 바로 그 유명한 '생사의 문제'입니다.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소중히 여겼던 두 분의 마음이 참 애틋합니다.
5. 사회활동
남편인 아키히로 씨는 사회활동에도 열심이었습니다.
'평화헌법을 지키는 모임'을 비롯하여, 재일동포를 지원하는 집회,
위안부를 위한 모임 등등 정의를 위한 투쟁활동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전화나 편지에는 항상 '나쁜 일본 정권이 빨리 무너져야 한다'는 말이 있어,
혹시 일본내에서 불이익을 당하시지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도 했습니다.
6.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
일본은 한국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하며 용서를 바란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기도할 때, 한국의 교우를 위해 기도한다며,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들며 안부를 물으시곤 했습니다.
성서신애지를 받으시고는 가끔씩 편지 안에 지대(誌代)라며 얼마를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 아래의 사진은 야마다 아키히로 씨와 야마다 나미코 씨 부부입니다.
제가 이 야마다 씨 부부와 직접적인 만남을 했던 건 1999년이니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근무하던 학교의 신우회선생님들과 함께 오사카와 교토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일본에 간다고 하니, 이진구 선생님께서 갖고 계시던 지도랑 자료들을 주면서,
기독교인들이니 야마다 나미코 씨가 하는 성서학교를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들도 모두 성서학교 견학을 반가워하여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성서학교는 10평 정도의 아주 작은 아파트였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과 구로사키 선생님의 사진과 글씨, 그리고 간단한 취사도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밤의 기억이 너무 생생합니다.
그리고 몇 년후, 남편과 함께 일본 자유여행으로 일주일간 곳곳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또 다시 이진구 선생님의 권유가 있어 오사카에 가서 전화를 드렸더니,
숙소로 찾아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키히로 씨는 엄청난 'too much talker'입니다.
전화 통화도 최소 30분, 편지도 최소 석 장입니다.
특히 편지에는 일본 무교회인들의 여러 소식을 알 수 있는 찌라시(^^)들을 동봉하여 보내주시곤 하여
항상 봉투가 두둑했습니다. 그 불룩한 봉투가 관심이며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받아볼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코로나가 풀려 일본을 갈 수 있게 되면, 가장 먼저 오사카에 가서 산소에라도 가고 싶습니다.
두 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야마다 선생님은 우리 집에도 가끔 전화 주시고 안부를 물으시곤 해서
남편이 당황(?)하던 일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두 분께서 이 땅에서 충성하셨던 일을 기억하시고
큰 상을 주시리라 믿으며 기도하겠습니다.
아, 그랬군요. 이제는 뜬금없이 걸려오는 당황스런 그 전화도 옛말이 되었네요.
야마다 님의 말씀이 어찌나 빠른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해서, 저도 당황할 때가 많았습니다.
알려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그러셨겠지요.
참 고마운 분입니다.
실천하는 참그리스도인이라고 늘 생각 했었는데 부인께서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셔서 참으로 인간적인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남편분마져 좋은곳으로 가셨다니 아쉬지만 천국행을 기도합니다. 저도 1999년도에 일한청년우화회초청으로 야마다선생님과 2박3일 동행하면서 오사카공항에서 함께 열열히 기도했던 기역이 생생합니다. 그후 나미꼬선생님이 한국방문때 어찌나 반가워 하시든지 참 정경운 분이였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늘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